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뭇별이 들려주는 이야기(마음글)

[2007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7. 12. 16:03

[2007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류진

 



당신은 이런 모습으로 그녀 앞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당신은 서 있지 않고 누워 있다. 예상치 못한 오늘의 만남이 난감하고 당혹스러운 건 그녀보다 당신이 더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신도 그녀도 처음에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신이 먼저 방에 들어와 있었다. 누군가 당신을 이 방에 밀어놓고 나갔다. 아무리 최신식 설비를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스테인리스 일색의 기구들이 반사시키는 형광등의 차가운 빛과 방 구석구석 배어버린 퀴퀴한 냄새, 음습한 공기는 그러잖아도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는 당신의 속을 다시 한 번 뒤집어 놓는 듯했다. 사실 당신은 이곳으로 옮겨진 것부터가 맘에 들지 않았다. 당신은 그저 조용히 쉬고 싶을 뿐이었다.

잠시 후 클립보드를 들고 방으로 들어온 그녀가 당신이 누운 간이침대 옆에 멈춰 서서 의뢰서를 뒤적였다. 그녀는 지루하다는 듯 옆 테이블 위에 클립보드를 가볍게 던져놓고 당신의 얼굴 위에 덮여있는 하얀 시트를 걷었다. 그녀의 덤덤한 눈동자에 당신의 얼굴이 찍힌 순간 당신의 꼭 감긴 두 눈 속으로도 그녀의 얼굴이 동시에 날아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린 다음 조금 전 테이블 위에 놓아둔 부검 의뢰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름을 확인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을 뿐, 어디선가 마주쳤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지 그녀는 혈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당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도록 꼼꼼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녹색 가운을 입은 그녀는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녀가 누군지 금방 알았다. 금발에 가깝도록 밝게 염색한 머리색과 갈색 눈동자, 깜빡일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꼬리부분에서 반듯한 각도로 꺾인 진한 눈썹, 찡그릴 때 잡히던 눈썹과 눈썹 사이의 귀여운 주름. 그녀도 당신을 알아보았다. 당신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당신이 내뿜은 자기저항에 밀쳐진 것처럼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갈색 동공은 놀라움으로 확대되었고 마스크 안에서 벌어진 입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 다른 부검 팀은 없었다. 반지하에 위치한 부검실에 지상으로 향한 창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검은 색의 두꺼운 커튼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빛을 차단시켜 버렸다. 사방으로 꽉 막힌 벽, 스테인리스로 조립된 높낮이가 조절되는 부검 테이블 다섯 개가 간격을 맞춰 늘어서 있고 그 테이블마다 싱크대처럼 수세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모든 부검테이블 옆에는 외과용 카트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이 형광등 불빛을 싸늘하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당신은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녀의 어깨라도 감싸주며 난 괜찮다, 고 안심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었다. 당신은 그저 천장에 매달린 희뿌연 조명기구 아래 누워 있을 뿐이었다.

    지금 부검받기 위해 누워있는 이 남자 며칠전 처음 만나 뜨거운밤을 보냈는데…
    자살? 타살?…난 그의 몸에 칼을 댄다


    그녀가 마치 당신에게 자신을 확인시키려는 듯 다가와 허리를 반쯤 기울였다.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 고리를 한쪽 귀에서 떼어내었다. 마스크가 그녀의 왼쪽 귀에 매달린 채 당신의 얼굴 위에서 덜렁덜렁 흔들렸다. 그녀의 코에서 뿜어져 나온 더운 숨이 당신의 차가운 피부에 와 닿았다. 순간 뜨겁던 그녀의 호흡이 떠올라 당신의 얼굴까지 달아오르는 듯했다. 그녀가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당신 귀에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석현이었군요, 당신 이름이…….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스테인리스 기구에 예리하게 반사된 다음 당신의 귀에서 커다란 파장으로 진동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날 예술의 전당 뒤편 산자락에는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틔우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남부순환도로에 그것들이 환장하게 피어났을 것이다. 투명한 햇살이 그립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말간 봄볕 아래 피었을 샛노란 개나리를 보며 뻥 뚫린 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싶었다. 당신이 개나리를, 드라이브를, 햇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딸깍, 조용한 부검실 안에 공명처럼 메아리쳤다.

    카메라를 든 남자와 조금 전 당신을 이 방에 밀어 넣고 나갔던 보조연구원이 녹색가운으로 갈아입고 들어섰다. 시작할까요? 그녀는 듣지 못한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어디 안 좋으세요? 평소에는 사체 앞에서도 찬바람이 돌만큼 이성적이기만 했던 그녀가 오늘은 달라 보였던지 연구원이 다시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단호하게 말했다. 아녜요. 시작하죠. 그녀가 턱 아래서 덜렁거리던 마스크를 나머지 귀에 걸고 라텍스 부검용 장갑과 고글을 착용하는 동안 연구원이 당신의 몸에서 하얀 시트를 완전히 거두었다. 당신은 가벼운 실내복 차림이었다. 당신의 몸은 사후경직이 이루어진 데다가 밤새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어서 몹시 빳빳했다. 두 남자가 힘들여 당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소매를 빼냈고 등을 한쪽으로 밀었을 때 그녀가 당신의 옷을 빼냈다. 바지를 벗기는 일은 조금 더 쉬웠다.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고 연구원이 당신의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당신은 이제 트렁크 팬티만 입고 있었지만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몸을 마지막으로 가리고 있던 속옷마저 벗겨내었다. 당신의 옷들은 연구원에 의해 봉투에 담겨 색인표가 붙여진 후 보관대로 옮겨졌다. 당신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모습으로 그녀 앞에 전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옮겨요. 그녀가 말했다. 카메라를 들었던 남자와 연구원이 각각 당신의 겨드랑이와 발을 잡아들고 이동침대에서 부검대 위로 당신을 옮겼다. 그녀는 클립보드와 펜을 뽑아든 후 당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머리 뒷부분이 깨졌어요. 연구원이 당신의 부서진 머리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건 좀 있다 열어보죠. 그녀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마치 책상서랍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의 반대쪽에 있던 연구원이 말했다. 선생님, 이건 뭐죠? 당신의 왼쪽 턱 아래쪽엔 멍 같은 거무스름한 자국이 선명히 번져 있었다. 당신의 턱을 위로 들어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반듯이 누운 당신의 어깨뼈도 오른쪽보다 왼쪽이 높이 솟아 있었다. 당신의 왼쪽 턱에서부터 왼쪽 어깨를 지나 왼손에 이르기까지 라텍스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하나하나 맥을 짚어나가듯 훑어 내려갔다. 손톱과 만나는 당신의 손가락 끝은 마디마디 단단한 못이 박혀있다. 현악기 연주자군. 바이올린이나 비올라겠지. 그녀가 부검표에 그것을 기록했다. 차석현. 바이올리니스트? 그녀는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당신의 허리엔 팬티의 밴드 자국이 검은 띠처럼 허리를 빙 둘러 나 있을 뿐 특별한 상처는 없었다. 다만 최근에 부딪혔을 법한 멍 자국이 당신의 허벅지와 무릎 부근에 군데군데 검푸른 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검시도표에 그려진 인체도 위에 조목조목 체크를 해나갔다. 연구원이 찍는 카메라의 하얀 플래시가 당신의 몸 위에 잠깐씩 내려앉았다. 그날 밤 나이트클럽의 사이키 조명도 그녀와 당신의 몸 위로 눈이 부시게 펑펑 터지곤 했었다.

    그녀가 당신을 만난 것은 사흘 전 금요일 밤이었다. 지금껏 해온 그 어떤 경우보다 부패가 심한 익사체 부검이 있던 날이었다. 몸은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부패했고 가스가 차오른 얼굴은 참혹하게 뭉그러져 있었다. 과연 이 사체가 한때 인간이었나 싶을 만큼 처참했다. 신원확인을 위한 샘플 채취와 직접 사망 원인을 위한 작업은 그동안 해왔던 그 어떤 부검보다도 그녀를 곤혹스럽게 했다. 인턴생활을 하다가 부검을 하겠다고 자원해서 다시 부검의 과정을 수료한 후 그녀가 국과수에 들어온 지 3년째였다. 의대에 입학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혼자 키운 딸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는 것을 몹시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녀도 수련의를 하면서 외과과장인 아버지와 함께 환자에 관해 토론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따뜻했다. 하늘이 내려준 직업이라며 그는 인술을 베풀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감사했다. 그러나 한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것은 단순한 사고였지만 그즈음 특별한 뉴스거리가 없었던 매스컴은 의료사고를 대서특필했다. 병원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아버지 개인의 무능으로 몰아갔고, 힘을 가진 환자의 가족들은 5년이나 병상에 누워있던 딸의 죽음에 대한 상징적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가끔 요양소로 면회를 가면 그녀의 아버지는 휑한 시선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시린 눈빛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두 눈은 이내 젖어버렸고 결국은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눈빛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내를 보고 있었다. 남편의 성공과 가정이 자신의 기쁨은 될 수 없다며 어느 날 다섯 살짜리 딸과 남편을 떠난 여자. 그 뒤로 뉴욕에서 화랑가의 새 별로 떠올랐다는 그 여자를 아버지는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녀와 아버지에게 그 여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자신을 견디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의료사고 이후, 아버지는 자신을 지켜오던 갑옷과 투구를 벗어버렸다. 삶을 지탱시킬 모든 것들을, 사랑과 용서, 희망과 동정, 심지어 위선과 허세조차 놓아버렸다. 세상이 놓아버린 자신을 더 이상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건 차라리 잊고 사는 것보다 힘들었다. 그녀도 아버지를 놓아버리고 싶었다. 더 강해야 했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 어떤 것에도 동정이나 감상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랬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까지 황폐해지지 않았을 거였다. 그녀는 자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부검의였다.

    부검에는 의료사고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증거를 건네주는 게 끝은 아니었다. 망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 혹은 누명 쓴 용의자의 결백을 밝혀주는 더 큰 일이 부검의 몫이란 걸 그녀는 뒤늦게 알았다. 게다가 사체와의 친밀감은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람이 썩어 가는 냄새만큼은 절대 무디어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향수를 사용했다. 부드러운 여성용이 아닌 남성용 크롬향을 선호했다. 그녀는 일을 할 뿐이었다. 간혹 그들의 사인이 너무 잔인하다거나 형사들을 통해 그들의 기막힌 사연을 듣게 될 경우에도 그녀는 가능한 한 덤덤하려고 노력했다. 부검대에 누운 사체는 자신의 억울함과 슬픔을 이야기한다고,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줘야 한다고 선배들이 말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했다. 선배들은 그녀를 얼음마녀라고 불렀다. 그런 별명이 오히려 그녀는 썩 맘에 들었다.

    금요일의 사체는 열다섯 살도 채 안 된 여자아이로 추정되었다. 그것도 강간을 당한 채 강물에 버려진. 퇴근 후 그녀는 크롬아자로를 온몸에 듬뿍 뿌리고 남산에 위치한 호텔 나이트로 차를 몰았다. 아무리 말없고 무난한 시체라도 한나절을 주무르다 보면 스스로 격렬히 반응하는 몸, 뜨거운 피가 흐르는 따뜻한 몸을 느끼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나이트에 와서 독한 알코올을 마시며 귀를 찢을 것 같은 음악에 몸을 맡겨 땀을 흘리고 나면 비로소 죽어 있던 세포 하나하나가 싱싱하게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날도 그랬다. 그녀는 블랙러시안과 함께 던힐을 피워 물었다.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밤이라 회식을 마친 직장인들과 외국인들이 담배 연기 자욱한 바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댄스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는 사람들로 홀은 북적였다. 그곳에 당신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 당신이 데킬라를 마시며 말보로의 독한 연기를 날리고 있을 때 그녀가 당신 건너편 자리에 와 털썩 앉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당신이 그녀를 눈여겨본 것은 아니었다.

    그날은 당신이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있는 오케스트라의 정기 연주회가 있던 날이었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청중들 앞에서 당신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마이너를 연주하고 있었다. 제1악장 알레그로 몰토 아파시오나트 이분의 이 박자의 격정적이고 매우 빠른 부분이었다. 제2주제를 오케스트라가 연주했고 다시 당신의 독주 바이올린에 의해 선율이 인계되었다. 연주시간만큼은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나면 폭죽 같은 박수소리가 당신을 위안해 줄 것이었다. 지휘자의 소개로 단원을 대표해서 청중들 앞에 인사를 하는 것도 당신이었다. 수석바이올리니스트로서 단연 짜릿한 순간이었다. 청중은 열정적인 당신의 연주에 모두 취해있는 듯 보였다.

    그때였다. 당신의 활이 현을 타고 올라갔다가 다시 힘차게 하강할 때, 지판 위에서 비브라토로 강렬히 탄력을 받아 고음의 소리를 내던 당신의 바이올린 줄이, 정확히 말하면 E 선이 탕, 하고 브리지에서 퉁겨져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줄은 관자놀이를 향해 쏘아진 총성처럼 탕, 당신의 고막을 찢고는 바이올린의 가늘고 긴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줄이 끊어지던 순간, 옆에 있던 제2바이올리니스트가 순간적인 본능으로 연주를 이어가긴 했지만 그 잠시, 불과 3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지휘자는 지휘자대로, 연주자들은 연주자들대로, 관객은 관객대로, 마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만 아는 비밀인 양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는 것이었다. 콘서트홀은 찬물이 끼얹어진 듯 긴장감이 흘렀고 그 정적의 순간 당신의 귀엔 소름 끼칠 만큼 싸늘한 땀방울이 똑, 똑,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에게 그 모든 것은 마치 슬로비디오로 재생해 보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악보대 옆에 준비되어 있던 보조 바이올린으로 나머지 연주를 할 수는 있었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연주가 끝나고 오케스트라 전체에 대한 격려의 박수가 홀 안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당신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당신이 가진 네 개의 줄 가운데 두 번째 줄이 끊어진 순간이었다.

    첫 번째 줄이 끊어진 것은 2주전이었다. 당신의 삶은 언제나 조율이 잘 되어 있었다. 적어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너무 조이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아니 어쩌면 조금 탱탱하게 당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어차피 느슨할 수는 없는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만이 소리를 낸다. 하지만 팽팽함은 언제 끊어질지 모를 불안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신은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이면 대형마트에서 아내와 함께 장을 보았고 생일이나 기념일엔 아내에게 목걸이나 반지를 선물하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했다. 받침이 없는 요일에는 일찍 들어와 샤워를 하고 분위기 좋은 음악을 틀어놓고 와인을 마시며 아내와 섹스를 했다. 결혼 초부터 전세를 전전하지도 않았다. 20대에는 20평. 30대에는 30평. 그리고 40대에 들어서서 당신네 가족은 50평대 새 아파트로 입주했다. 집은 항상 반짝거렸고 언제나 일곱 벌의 와이셔츠는 칼같이 다림질되어 옷장 속에 걸려 있었다. 아내가 집안일을 모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일하는 사람이 다녀갔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은 반장을 도맡아 했고 당신도 예상보다 이른 나이에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의 자리에 올랐다. 당신은 생활의 모든 안정이 자랑스러웠고 의심할 여지 없이 당신의 아내도 그 행복에 동참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겨울이 끝나가면서 살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창들하고 만났어, 좀 늦을 것 같아. 당신의 아내는 술에 취해 밤 열두 시가 넘어 들어오기도 했고 때로 당신의 손이 닿으면 진저리를 치며 등을 돌렸다. 당신은 심부름센터에 아내의 뒷조사를 의뢰했다. 일주일 만에 남자와 술을 마시는 아내의 모습과 모텔로 들어가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 당신의 손에 들어왔다. 사진을 구겨버리며 아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그날도 연주회가 있었다. 아내는 평상시처럼 차분히 넥타이를 매주고 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사랑하는 사람 있어. 아내는 정확히 사랑하는 사람, 이라고 발음했다. 피가 정수리를 뚫고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려는 것을 당신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 사람은 날 숨 막히게 하지 않아. 아내는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당신의 첫 번째 줄이 끊어져 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사이키 조명 아래 춤을 추고 있었다. 테크노 음악이 나오면 헤드뱅잉을 하며 몸을 흔들었고 오래된 디스코 음악이 나오면 손을 위 아래로 찔러가며 엉덩이와 허리를 뒤틀었다. 당신은 바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잠시 춤을 멈추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웨이터가 따라준 스트레이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잔을 내려놓던 그녀의 시선이 맞은편에 있던 당신의 시선과 부딪쳤다. 아니, 당신 혼자서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낀 것인지도 몰랐다. 당신은 빨려 들어가듯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고 바를 돌아 그녀 앞에 섰다. 뭘 어찌해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외로웠던가. 그녀가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건배를 하자는 뜻으로 당신이 잔을 들었고, 그녀는 그런 당신을 공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다 잔을 들어 당신의 유리잔에 챙, 하고 부딪쳐 주었다. 그때 당신은 생각했다. 이 여자 안엔 몇 개의 줄이 있을까.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생명의 줄은 저마다 다르다. 기타가 여섯 줄, 가야금이 열두 줄, 마흔여섯 개의 현을 가진 하프도 있다. 질긴 가죽을 실컷 두들겨 맞아도 끄떡없는 드럼이나 눈부신 금속으로 튼튼하게 태어난 트럼펫, 또는 피아노처럼 다양한 절대 음을 가지고 있어서 아주 가끔 조율을 필요로 할 뿐인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는, 그리고 매번 스스로 최적의 음을 정확히 짚어내야만 하는 현악기 같은 운명을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현악기 주자는 그 누구보다 음에 민감하다. 조금의 오차도 용서되지 않는다. 그 예민한 안테나가 전혀 다른 빛깔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당신과 같은 코드를 찾아낸 게 분명했다.

    배신을 당해본 적 있어요? 그것도 두 군데서. 당신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가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안됐군요. 나랑 일하는 사람들은 돌아누울 줄도 모르는데. 그녀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춤추실래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그녀를 따라 함께 홀로 나가 귀를 찢는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진한 향수가 코에 스쳤다. 그녀의 분위기에 비해 강한 향기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블루스 음악이 처음 나왔을 때 홀을 빠져나가려는 그녀에게 당신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별 거부감 없이 당신이 내민 손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당신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리듬을 타며 스텝을 옮기자 그녀도 조심스럽게 발을 떼었다. 미국 음대 유학 시절 친구들과 파티를 할 때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실력이므로 당신의 리드가 전문적이고 세련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설픈 솜씨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당신이 싫지 않았다.

    ‘죽어 있는 당신’은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연주회는 망치고 아내에겐 새 남자가…
    삶을 지탱하던 줄이 하나씩 끊어진다

  • 그때 이 남자의 몸은 살아 있었어, 그녀는 생각했다. 연구원이 외과용 카트에서 샘플 채취용 봉투를 가져와 그녀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그녀는 빳빳이 부검대 위에 누워 있는 당신의 손톱과 머리카락, 턱 밑에 까끌하게 자란 수염을 잘라 봉투에 넣어 다시 연구원에게 주었다. 미국에 다녀오는 친구들이 종종 엘에스디(LSD)나 엑스터시를 가져왔고 그들과 어울려 당신은 이따금 환각에 빠지곤 했었다. 마약을 했다는 것도 알려질까, 당신은 잠시 긴장했다. 그런 당신을 그녀가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꼬박 하루를 냉동실에서 차가워진 몸이 부검실의 실온에서 부들부들 녹기 시작할 때였다. 얼어 있던 당신의 페니스도 나른해져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두 번째 곡에서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건 탐색이었다. 그녀는 당신을 밀어낼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몸 안에 쌓여 있는 노폐물들을 쏟아버리기 위해서라면 혼자보단 둘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세 번째 다시 춤을 청했을 때도 그녀가 순순히 당신의 손을 잡자 당신은 조금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당신은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남자의 반쪽과 여자의 반쪽이 합쳐지는 것이 블루스다. 남자의 오른쪽과 여자의 오른쪽이 겹쳐지는 것. 둥, 둥. 북을 울리며 심장과 심장이 저희들끼리 만나 먼저 탐색전을 벌이는 것. 온전히 하나로 겹쳐지기 위해 드러내놓고 질탕하게 벌이는 전희. 그 순간 당신은 끊어진 두 개의 현을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남아 있는 두 개의 현이었다. 당신의 코는 그녀의 체취에 파묻혔고 입술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키스했다. 당신의 손은 이제 그녀의 브래지어를 풀어헤쳐 버리고 싶다는 듯 호크가 단단히 채워진 그녀의 등을 반복해서 쓰다듬었다. 당신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을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아.

    뒤집을까요? 연구원이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소리에 맞춰 당신의 몸이 돌려졌다. 앞부분과는 달리 접촉부위가 많은 뒷부분엔 몸 전체로 퍼지기 시작한 거뭇한 시반이 당신의 어깨와 등은 물론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까지 퍼져 있었다. 와, 이거 긁힐 때 많이 아팠겠는데요. 연구원이 반쯤 킬킬거리며 당신의 등을 가리켰다. 등 한가운데는 네 개의 손톱자국이 양쪽으로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고 그 위로 검은 딱지가 오도독 굳어 있었다.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분명 그날 함께한 절정의 순간에 당신의 등에 깊이 파묻은 그녀의 손톱자국이었다. 그녀는 손톱을 감추려는 듯 라텍스 장갑을 낀 손바닥을 바짝 오므려 자신의 몸 뒤로 감추었다.

    준비됐습니다. 연구원이 말했다. 아. 그래?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듯 대답했다. 다시 원래로 되돌려 놓은 당신의 몸을 바라보던 그녀가 마침내 메스를 들었다. 그녀는 당신의 목 아래 오른쪽 어깨뼈부터 배꼽까지, 다시 왼쪽 어깨뼈부터 배꼽까지 Y자 절개를 했다. 이미 얼었던 몸이므로 당신의 몸은 두 쪽으로 주욱 갈라지면서도 피 한 방울 스며 나오지 않았다. 피부와 지방층, 근육층과 장막 등 네 겹의 단계를 지나자 마침내 당신의 장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신의 위장엔 특별한 음식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녹지 않은 약물을 추출해내는 게 까다롭지 않았다. 그녀는 당신의 간 조직과 폐를 끄집어낸 후 조직을 조금씩 떼어내 보관함에 넣었다. 당신의 깨진 머리를 열어볼 차례였다. 메스로 당신의 귀에서 귀까지 절단한 후 냄비뚜껑을 열 듯 그녀가 당신의 두개골을 열었다. 당신의 얼굴이 이마에서부터 갈라지며 일그러졌다. 둘로 나뉜 당신의 얼굴 사이로 단단한 머리뼈가 나타나자 그녀 손에 들린 전기톱의 스위치가 올려졌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전기톱이 당신의 머리뼈를 절단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아니어도 어딘가에 부딪히며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대뇌조직이 손상되어 있었다. 그녀는 기록을 하고 있던 연구원에게 당신의 상태를 말해주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깨져버린 당신의 머리를 열어본다고 해서, 식어버린 심장을 꺼내 본다고 해서 당신의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녀는 부검의 생활 처음으로 자신이 왜 이런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날 당신과 그녀는 호텔 룸에 올라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하게 옷을 벗어던지고 서로 뒤엉켜서 젖은 입술을 빨고 서로의 혀를 감았다. 두 사람은 침대 위, 소파 밑, 카펫 바닥 그리고 목욕탕을 뒹굴었다. 당신과 그녀에겐 오직 그 순간만이 존재했다. 그녀에게 당신은 붉은 피가 뜨겁게 돌고 있는 사람이었고 당신에게 있어서 그녀는 잠시라도 현실을 잊게 할 유일한 도피처였다. 두 사람은 지칠 때까지 서로의 정수리 끝까지 파고 들어가지 못해 미칠 것처럼 몸부림쳤고 그렇게 서로의 몸을 죽일 듯 조이고 굴리고 유린하며 끝날 것 같지 않은 밤을 보냈다.

    당신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없었다.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늦은 아침의 창백한 햇살만이 당신을 비추고 있었다. 당신에게 아침인사를 건네는 상냥한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신은 꼼짝 않고 누운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윙, 하는 정적의 소음만 귓바퀴를 맴돌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힘없이 누워 있던 당신의 몸은 스프링에 장착되어 쏘아진 고무줄처럼 침대에서 한순간 튕겨져 올랐다. 탕, 당신은 호텔 룸을 두리번거렸다. 당신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온 울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건 분명 두 개밖에 남아있지 않던 당신의 바이올린 줄 하나가 끊어지는 소리였다. 공허, 지난밤 무의미했던 육체의 격렬함과 지금껏 지켜온 삶의 허상들, 팽팽하게 조여 있던 줄 하나가 또다시 툭, 하고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서로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내는 공연일정과 상관없이 결혼 후 처음으로 외박을 하고 들어온 당신에게 이 한마디만을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껏 나는 아내에게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신은 휘청거리며 연습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창가 흔들의자에 기대 앉았다. 검보랏빛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발을 굴러 흔들의자에 진동을 주었다. 낡은 요람을 태우듯 의자가 삐걱삐걱 당신을 흔들었다. 불안은 음에 있는 것도 악기에 있는 것도, 또 그것을 놓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그걸로 불안해하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거지요. 종종 찾아가 상담치료를 받던 의사의 조언도, 그러나 큰 위로가 되진 못했다. 당신은 어두운 연습실에 있는 그 모든 것들, 피아노와 바이올린, 책상과 그 위에 있는 책들, 보면대와 악보들을 주욱 눈으로 훑었다. 이 방에 있는 것들만은 내 것이었던가. 당신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남자는 날 숨 막히게 하는 당신과는 달라. 아내의 음성과 홀을 가득 채운 청중의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안 돼. 당신은 귀를 막고 소리쳤다. 그 중간 중간 지난밤 그녀의 뜨거운 호흡이 느껴지다가는 또 이내 텅 빈 침대가 떠올라 당신은 참을 수 없이 외로워졌다. 당신은 비틀거리며 방안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손에 닿는 대로 쓸어버리고 내던지고 미친 듯 집어던졌다. 삶이란 팽팽하게 조여진 줄이 하나씩 끊어져 나가는 것을 견디며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아 있는 마지막 줄이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당신은 더 이상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끊어질 바엔 마지막 줄만은 당신 손으로 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멀리 창밖에 펼쳐진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당신은 자신이 기다리던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는 학원에 가고 없는 시간이었다. 충격은 받겠지만 제 엄마를 닮은 아이는 당신이 없어도 잘 자라줄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내가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자신의 그림자를 봐주지 않는 남편과 살아야 했던 아내는 어쩌면 남몰래 정신과를 드나들며 상담치료를 받던 당신보다 더 쓸쓸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책장 서랍 깊은 곳에서 처음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던 무렵 구해서 숨겨두었던 약을 찾아내었다. 당신은 떨리는 손으로 약을 입에 털었다. 그리고 보드카를 들이켰다. 목구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와 잠시의 정적. 겁에 질린 당신의 아내가 부서져라 문을 두드리다 열쇠를 찾아들고 와 문을 열었다. 당신은 한쪽 벽에 쓰러질 듯 기대앉아 있었다. 당신의 혈관은 알코올에 취해 약을 흡수했고 재빠르게 졸음을 실어 날랐다. 가물가물 꺼져가는 의식 저 멀리 당신의 아내가 보였다. 당신은 마지막 힘을 다 끌어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난장판이 된 연습실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게 이미 동공이 풀린 당신의 모양새는 여자가 겁을 먹기에 딱 좋을 만큼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이 다가서자 아내는 흠칫 놀라 당신을 피했다. 아내를 해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당신도 외로웠다고, 아내에게 그 한마디만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당신의 혀는 굳어 버렸고 심장박동수도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휘청거리던 당신의 몸이 아내의 몸 위로 푹 꼬꾸라진 건 순간이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당신을 세게 밀쳐냈다. 그 순간 당신은 남아 있던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당신은 꼿꼿이 뒤로 넘어지며 장식장 유리를 깨고 쓰러졌다. 옆으로 미끄러져 넘어지며 다시 선반 장식장에 놓여 있던 뾰족한 수석에 뒷머리를 강하게 짓찧었다. 당신의 깨진 머리가 피를 뿜었다. 당신의 아내가 귀를 찢을 듯 비명을 질렀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당신의 아내는 덫에 걸려 몸이 찢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당신은 이 난리를 치고 떠나야 하는 것이 아내에게 조금은 미안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남아 있던 외줄을 당신 스스로 풀어준 것이었다. 이제 당신은 아무것도 연주할 필요가 없었다.

    당신의 갈라진 몸에서 장기를 꺼내는 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당신의 몸이 덩그러니 비어가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당신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당신이 한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는 듯이, 당신의 삶을 모두 이해했다는 듯이 그녀의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뿌연 물안개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보았던, 너무나 익숙한 외로움과 절망만이 당신을 채우고 있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의 위에서 발견된 약이 아니어도 스스로 칼이 되어 자신을 베어 버린 당신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당신의 열린 몸을 촘촘히 봉합했다. 그녀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날 아침, 잠든 당신을 두고 일찍 나오지 않았다면, 그날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더라면. 당신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가슴이 옥죄어왔다. 자꾸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아 그녀는 연구원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일부러 고글을 밀어 올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당신도 울고 싶어졌다. 다시 한 번 그녀의 따뜻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철들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살아갈 이유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었다.

    연구원 하나가 샤워기를 들고 당신의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피부에 와 닿은 물줄기가 차가웠지만 당신은 오히려 개운함을 느꼈다. 당신 안에 수십 년 함께하며 당신을 이루었던 모든 것들이 끄집어내어지고 삶의 부스러기들까지 말끔히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런 당신을 그녀가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몸에서 빼낸 부속품들은 검사실에서 잘려지고 토막 나고 약품에 담겨져서 빠르면 한 달, 늦으면 두 달쯤 걸려 부검 결과가 완성될 것이다. 하얀 시트가 펄럭 공중에 펼쳐졌다가 사뿐히 당신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연구원이 당신의 이마 위까지 시트를 꼼꼼히 덮었다. 당신은 밀 침대에 밀려 다시 부검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당신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송차에 실리고 있었다. 당신은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는 영안실로 옮겨져 장례절차에 따르게 될 것이다. 당신의 몸은 속이 횅하니 비어 있는 고무인형 같았다. 그런 몸이 당신은 허전하기도 했지만 가뿐한 것 같기도 했다. 몸 속에 수소만 채워준다면 애드벌룬이 되어 파란 하늘을 맘껏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눈썹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피로가 몰려왔다. 가만히 누워만 있었는데도 이렇게 고단한데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당신은 부검실에 남겨두고 온 그녀를 잠시 생각했다.

    당신을 보낸 그녀는 손끝으로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갑자기 잊고 있었던, 잊으려고 애썼던 아버지가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졌다. 목이 따끔거렸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서던 연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다음 준비 됐는데요. 그녀가 돌아섰다. 하얀 시트에 덮인 또 한 구의 시신이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평상시와 다름없는 차가운 얼굴로 하얀 시트를 거두었다. 부검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주검 앞에 선 그녀의 발이 휘청거리고 메스를 든 손이 바르르 떨리는 걸,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