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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5. 18. 22:43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김병익

 내일 개막되는 2002 한일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행사의 전야제가 아마 지금 이 시간에 열리고 있고 모든 텔레비전 방송사는 이 화려하고 거창한 장면을 중계하고 있을 것이며, 그리고 또 저도 꽤 좋아하는 프로 야구 경기도 이제 쯤 시작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흥미로운 볼거리들을 놓아두고 지금 여러분은 이 자리, 재미없고 지루할 이 문학 행사에 와 계십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은 지금 이 아름다운 봄날의 저녁에 영화관에서 데이트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유쾌한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 좋은 시간들을 버리고 따분하고 열기 없는 이 자리로 와 따분한 주제에 눈과 귀를 열어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이 자리에 오셨는가요. 어떻게 되어 더 즐겁고 화려하고 신날 수 있는 자리를 포기하고 이 허술하고 어둡고 한심한 곳에 모여 계신가요.

 어쩌면 스포츠보다는 문학에 더 관심이 있어서일지도 모르며 혹은 명예로운 대학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친구를 축하해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고 정말 이것저것 마땅히 갈 데가 없어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문학 행사에 오신 것은 취향일 수도 있고 연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며 어쩌면 달리 할 일이 없어 마지막으로 취하게 된 걸음일 수도 있습니다. 이 행사의 참여 연유는 갖가지이겠고 그에 대한 열기도 상당히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유와 정도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여러분은 이 대학 문학상 수상식이라는 문학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고 제게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여러분들이 지금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문학을 선택했고 이 문학적 행위에 동참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라는 다소 시니컬한, 그러니까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그 패배에 맞서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제목을 저 스스로 잡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문화의 세기’ 라고 하지만 그 문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문학이라고 이름 부를 때 함께 다가오는 진지하고 엄숙하며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을 파괴하고 배반하며 혹은 퇴화시키고 밀쳐내는 그런 문화입니다. 앞선 20세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하며 이제는 현장으로부터 물러나고 있는 저 같은 아날로그 세대가 보기에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문명 시대의 문학은 흔히 경고되듯이 ‘위기의 문학’ 이고 ‘추락의 문학’ 이며 어쩌면 ‘문학의 부재’, 적어도 ‘문학의 주변화’ 라고 판단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진단이 아닐까 여겨질 정도입니다.

 저의 비관적인 진단은 물론 강력한 반박을 받을 것입니다. 현상은 그렇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많은 문학적 열정들을 보이고 있으며 창작의 산물과 그것을 향유하는 독자들도 더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 대한 반박의 자료로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인간과 역사의 발전이란 문맥에서 보자면 문학의 쇠퇴라는 저의 인식은 전래의 문학의 변화로 이해해야 하리라고 스스로를 나무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반론들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저 자신도 대부분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문예지들이 여전히 쏟아져 나올 뿐만 아니라 이달만 해도 두 개의 문학 계간지가 새로이 창간되었으며 신문들은 문학도서의 광고들을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싣고 있고 지하철 승객들의 상당수는 소설책을 읽고 있습니다. 방송에서도 이제는 독서 프로그램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고 서점은 대형화가 되고 있으며 하나의 문학책이 몇 만, 몇 십만 부가 판매됨으로써 한국의 문학 독서 수준도  선진국 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곳곳에서 문예창작과가 신설되고 이 과는 학부제의 선풍 속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신문과 잡지의 장편소설 공모에도 백 편에 가까운 응모작이 투고되고 있고 50대 혹은 60대가 신인상을 받거나 시집 출판으로 문단에 데뷔하는 일도 자주 보입니다.

 문학에 대한 이처럼 변함없는 열기 속에서 ‘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비관적 진단이라는 말은 바로 이 대학에서 몇 해 전에 열린 심포지엄을 들으며 저 자신이 가진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위기라고 부르는 것은 변화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 정서적 반응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문학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문학적 감동과 감수성은 더욱 넓고 깊게 번질 것인데 다만 그 문학의 양상과 형태는 새로운 문화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 변모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것은 중세의 문학이 구텐베르크 이후 근대 문학의 형식으로 변모하는 것, 혹은 한말의 우리 한문 문학이 서구 문명의 충격 속에서 한글 문학으로 변모하는 것을 바라보던 구세대들이 품었던 미래에 대한 비관적 견해와 어쩌면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러니까 저 스스로 문학의 위기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 한 것은 아니고 어쩌면 장기적인 전망에서 낙관하고 있었다고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때에도 지울 수 없이 의식의 뒷자리에 그림자처럼 남아 있던 회의적인 감정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저 자신이 디지털의 새로운 문명적 패러다임에 익숙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남아 그 어둠의 깊이를 더하고 그 넓이를 더 넓히며 이제는 비관적 전망으로 번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몇 해 사이에 문명이든 문화든 특히 문학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고 오히려 ‘새로운 세기의 도래’ 라는 엄청난 사태에서 예상되던 천지개벽과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9.11테러가 증거 하듯 구시대적인 국제적. 민족적 혹은 종교적 갈등만을 크게 부각시켰을 뿐입니다. 새로운 문명권으로의 진입이라는 것이 그처럼 “어느 날 갑자기” 라는 식으로 충격적인 돌변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의 전환이 제게 가르친 실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실상 속에서, 이번에는 거꾸로, 문학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그럼에도 상존할 수 있다는 논리도 발견되고 있음을 저 스스로 인식해야 했습니다.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러니까 서기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달력이 바뀌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변화할 수 없는 것처럼, 디지털 문명 세계로 우리의 삶이 옮겨졌다고 해서 문학도 갑자기 환골탈태의 급변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세력은 마치 우리가 모두 잠들어 있는 한밤중의도둑처럼 뒷담을 넘어 슬그머니 들어와 집 안의 재물들을 조금씩 흠집을 내기 시작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없어지고 어떤 것이 망가졌는지 알지 못한 채 여전히 평온과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 재물 조사를 해보니 이것도 없어지고 저것도 망가지고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온 것들이 사라지거나 훼손되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단한 재물 조사를 좀 해봅시다. 지금 상영되고 있는 한 영화는 3백만 명을 훌쩍 뛰어넘게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만 웬만한 한국 영화로써 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 들이는 일이 이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10여 년 전 백만 귄 이상 팔린 책들이 더러 있었지만 지금의 이른바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30만 부 수준이고 게다가 그 대부분의 문학책이 아니라 경영이나 처세에 관련된 비문학 분야의 도서들 입니다. 대학 졸업생들로서 가장 인기 있는 취업 처는 방송사와 벤처 기업입니다. 하긴 전문 문학인을 위한 취업의 자리는 전에도 없었으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뛰어난 인재들은 작가가 되거나 문학을 선택하기보다는 비즈니스나 재테크, 컴퓨터 응용 산업을 우선적으로 택하고 있으며, 혹 그들이 문화적인 쪽으로 진출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그 분야는 영상 예술이거나 문화산업 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현상적인 사례들은 아직은 미온적이고 물론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장래를 예단할 수 있는 추세라는 점에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커다란 재물 손실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약 3분의 2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며, 청소년의 대부분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입시 공부를 제한다면 단연 인터넷이며 가장 즐기는 것은 게임이고 가장 사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지 상품들입니다. 문학책은 이제 텔레비전에 크게 소개되어야 ‘뜨게’되고 시집은 인기 드라마에서 한번 읽혀지면 애송 작품이 됩니다. 근래의 새로운 장르로 많은 독자를 가지기 시작한 환상소설은 모두 인터넷에서 조회 수가 많아야 종이책으로 발간되며, 문학을 주종으로 하던 출판사들은 어린이 도서, 만화, 대중 도서로 경영을 유지하는 대가로써 그 출판사의 성격과 권위를 변질시키고 있으며, 작가들은 전통적인 본격 문학 작품에서 상업성을 더 크게 고려하는 대중 문학 쪽으로 창작 방향을 조금씩 옮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제 사람들은 문학에서 ‘시간 죽이기’ 의 재미를 찾을 뿐 구태여 삶의 지혜나 계몽적인 사유를 기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왕의 문학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 되어온 이득들을 이제는 다른 데서, 가령 인터넷 같은 것에서 얼마든지 쉽고 풍부하게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꺼번에 잡다한 현상들을 거칠게 늘어놓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문학이 우리의 삶과 문화에서 자리하고 있는 위상을 큰 눈으로 큰 줄기를 잡아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첫째로 문화의 주류가 문자의 문화로부터 영상의 문화로 옮겨가기 시작했다는 것, 둘째로 컴퓨터와 인터넷이 우리 일상을 주도하며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것, 셋째로 문화 산업 분야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 넷째로 새로운 시장 경제 체제의 논리에 문학을 비롯한 전통적인 문화 예술이 적응하기, 아니 굴복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의 문명이 아날로그부터 디지털 문명으로 전화하고 있다는 것, 세계는 거대한 자본-과학 복합체의 세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효용 가치보다 교환 가치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거대한 전환 속에서 전통적인 문자 문화가 쇠퇴하고 있다는 것, 인문주의의 미덕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리라는 것, 물신주의적 풍조 속에서 속도주의와 변화에의 추구가 강요되고 있다는 것, 문화의 생태적 다양성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 등등의 추세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거창한 변화의 힘을 문학이라 해서 모면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미 그 징조가 드러나고 있지만, 문자 문화의 대종이며 아날로그 시대 예술의 중심이고 인문주의적 정신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문학도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역시 큰 눈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작가는 ‘인류의 스승’ 이라는 위엄 있는 자리에서 이미 퇴위한 지 오래거니와 창조자라는 그 영예로운 전문적 권위조차 상실되고 있는 중이고, 그러는 가운데 아마도 작가라는 신분의 위엄과 장인적 성격도 훼손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말하는 고급한 의미에서의 ‘작가의 죽음’ 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작가의 추락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무원이나 의사가 시인이 되거나 평범한 시민이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문학의 민주화라는 긍정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 보기 좋은 양상 속에서 문학적 권위의 상실이라는 자기 파괴적인 현상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가 강화되면 작가는 아마도 영화나 게임의 스토리 제공자라는 문화 산업의 한 아이디어 제공자, 그러니까 비창조적인 기능 지식인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물론 전래의 문학가, 특히 소설가는 여전히 창작을 하고 발표를 하겠지만, 고통의 문학, 진지한 문학의 존중받는 창조적 행위로서보다는 예술적 자율성을 상실하고 부르디외가 말하는  시장 기능에 구속되는 소비 문학의 생산자로서 작업하게 될 것입니다.

 장인적 창조자로부터 시장 경제에 예속된 문화 산업의 기능자에게 문학이 옮겨질 때 그 작품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곧 문학의 질적 위상적  변화를 보여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문명 시대의 문학 작품은 그 주제가 성이나 스릴 혹은 환상과 같은 감정의 자극제이기 쉽습니다. 그것들은 마르쿠제가 말하는 바의 에로스 문명으로부터 섹슈얼리티의 일차원적 심성으로 독자들의 감수성은 획일화할 것입니다. 그 문체는 경쾌하고 서술적으로 흐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독자로 하여금 사유하며 반성하도록 유도하기보다는 재미에 젖어 빠르게 읽고, 읽고 나서는 잊어버리는, 그러니까 작품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장 조사를 통해 기획되고 광고와 유통 시스템으로 유포되며 그래서 지하철에서 한 번 읽고 버리게 될, 다 마시고 버리는 음료수 캔처럼 일회적인 소비품이 되겠지요. 이 인기 있는 문학 작품들은 인터넷을 통해 독자들에게 접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래의 출판사와 서점의 비중을 상당히 떨어뜨리고 그 이용료도 오늘의 책값보다 훨씬 저렴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리프킨이 주목한 바의 소유에서 접촉으로의 문화 상품이 될 것입니다. 독서의 텍스트 구입비가 싸면 쌀수록 그 전파의 위력은 그만큼 커지겠지만 거기서 얻어낼 것 역시 그만큼 싸구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컨대, 문학은 문화 산업의 하나가 될 것이며 문학 작품은 비주얼과 오디오의, 혹은 이미지와 게임의 그 숱한 문화 상품 중 허약한 하나가 될 운명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아날로그 시대의 독자들이 문학에 대해서 품었던 신비감, 진지성, 지혜에의 열망, 낭만적인 꿈, 비판적인 인식과 같은 덕성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예술 작품에 대한 이러한 기대를 굳이 문학이 아니라 영화나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긴 했지만, 사실 그것은 문학에 대해 체념하기 위한 하나의 위안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학이 더 이상 가능할 수 없는 시대에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는 문자가 아닌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우울한 전망을 그렇게 바꾸어본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전시대적인 문학은 아니더라도 문학은 상존할 것이며 어쩌면 다른 형태로 더 왕성하게 요구되고 더 활발하게 수용될 것이라고 혹은 저에게도 반박하겠지요. 당신이 말하는 문학은 과거의 구태의연한 시대의 문학이 아닌가, 시대가 바뀌고 인간과 그 삶도 변화하며 따라서 문화와 정서도 변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당신이 과거의 아날로그적 문학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저는 문학이라는 한 가지 말을 쓰면서 제가 피하고 싶은 문학과 고집하고 싶어 하는 문학, 다가올 새로운 문명 체계에서의 문학과 전통 속에서 축적되어온 인류의 자산으로서의 문학, 일회적인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으로 충분한 문학과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어 영원한 고전적 정신으로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할 문학의 상반된 두 문학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라고 말할 때의 그 문학은 시간의 때를 타지 않고 문명의 변화라는 파고를 이겨낼 수 있는 인류의 영원한 문화적 자산으로서의 문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엄숙하고 고통스러우며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과 꿈을 키우는 문자 예술로서의 문학이 여전히, 살아남아야 하며, 살아남아 있음으로써 우리의 의식과 정신, 정서와 꿈으로 우리 내면 속에서 움직거려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학을 구분하기 위해 진지한 문학이란 이름으로 불러봅시다.

 이 진지한 문학이 그럼에도 상존해야 하는 이유는 세계와 문명 그리고 삶의 행태와 인간의 욕구가 진지한 문학의 존재를 그 뿌리로부터 줄기와 잎새와 꽃과 열매까지 두루두루 위협하고 있고, 그래서 그 생존이 위기에 닥쳐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허물고 짓누르려는 세력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진지한 문학이 이런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내야 하듯이 그것도 구조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불변하는 가치,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이 구조의 작업은 보다 막중한 작업이 되는 것이며, 그 작업은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가오는 문명적 힘들과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은, 마치 전체주의적 세력 앞에서 지켜내야 할 자유의 정신처럼, 시장 경제의 타락 속에서 추구해야 할 평등의 이상처럼, 문학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불가결한 덕성과 창조에의 열정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학은 인간을 사물화 하는 기능주의, 사람을 기계로 전락시키는 속도주의, 인류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획일주의에 대항하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휴머니즘으로서의 역할과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지한 문학이 우리에게 일구어주는 반성적 사유, 창조적 영감, 초월에의 꿈, 인간다움의 덕성은 달리 그리고 어느 다른 곳에서는 얻어낼 수 없는 인류의 고결한 정신의 영원한 원천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21세기의 디지털 문명 속에서 이 진지한 문학을 추구하고 수행하는 장인적 예술가는 틀림없이 외롭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 진지하게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없기에 외롭고, 시장 경제의 교환 가치 체계로부터 밀려나 있으니 가난할 것이며, 풍요와 쾌락을 즐길 수 있는 길을 두고 가난하고 힘든 길을 타고 있으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고독하고 빈곤하고 고난스럽기에, 바로 그렇기에, 그 길은 고상하고 명예롭고 의미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학은 그런 고상함과 명예로움과 의미 있음 그 자체로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진지한 문학으로의 험난함을 통해 그것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가 왜 그 길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그 스스로 본보기로서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야구장이나 영화관, 텔레비전이나 술집 대신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고귀한 것으로의 작은 체험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연유로든 이 동참의 작은 계기를 통해 문학은 그래도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2. 5. 30. 계명대학신문사 주최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