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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잊어서는 안 될 ‘사소한’ 이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2. 20. 12:50

詩를 잊어서는 안 될 ‘사소한’ 이유

 

 깨끗한 죽음이었다. 오규원 시인의 유해는 강화도 정족산 기슭 소나무 아래 묻혔다. 시의 언어가 한없이 투명해지기를 바랐던 시인의 몸은 하얀 뼛가루의 모습으로 흙 속에 사라졌다. 한 시인의 죽음은 사소한 일일 수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너무나 많은 죽음을 접하고 미디어는 끔찍한 사건을 끊임없이 쏟아 낸다. 많은 언론 매체가 시인의 죽음을 서둘러 보도했지만 그의 죽음은 곧 잊혀질 것이다.


벌써 두 주가 지났다.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고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시인의 죽음을 기억하며 한번쯤은 우리 삶에서 시와 문학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의 사소한 죽음을 하나의 상징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시와 문학이 반드시 세상에 있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시와 문학은 일용할 양식이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처럼, 그렇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시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온전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어떤 순간은 행복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본과 속도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세상에서 그래도 다른 아름다움의 척도가 있음을 짐작해 보는 경험은 소중하다. 시는 언어를 극도로 예민하게 사용하면서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그 투명한 언어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면 함부로 쏟아지는 이 세상의 넘치는 말의 허위를 서늘하게 바라볼 수 있다. 시를 읽으면 일상 속에서 무수히 뱉어 낸 자기도 알지 못하는 관념이 문득 부끄러워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시를 쓰는 사람의 수와 시를 읽는 사람의 수가 비슷하다는 씁쓸한 농담은 시를 둘러싼 문화적 상황을 말해 준다. 시보다 상품가치가 앞선 소설조차 1만 명의 독자를 만나기 어려운 시대에 시의 위축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쑥스럽다. 대형 서점에서 아직 시집 코너가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은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시를 사랑한다는 찬사는 이제 민망하다.


시를 쓰는 사람과 작은 모임은 여전히 움직이지만 독자는 시로부터 많이 떠났다. 영상매체의 득세로 문화적 환경이 변화한 가운데 새로운 시대의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화법을 찾지 못한 것도 원인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 사회가 ‘시의 시간’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다는 게 문제다. 삶의 구조가 시의 시간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한다. 무서운 속도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시를 통해 작고 의미 있는 정지의 순간을 경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시를 읽는다. 촉촉한 위안의 말을 구하기 위해서, 삶을 지탱할 단단한 지혜의 잠언을 얻으려고…. 연인에게 전할 달콤한 말을 찾기 위해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 이유가 하나일 수는 없다.


시를 읽는 독자가 아직 이 땅에 있다는 점은 감사한 일이다. 오규원 시인이 죽음을 앞둔 병실에서 제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눌러 써 준 마지막 시에는 ‘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라는 표현이 있다. 나는 그것을 더 잃을 것이 없는 한국시에 대한 암시처럼 함부로 읽는다.


중요한 점은 어떤 영상매체도 시인의 이 절제된 문장을 영상으로 담아 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고 이 문장을 재현하려 한다면, 그는 이 말의 투명한 깊이 앞에서 절망할 것이다. 그것이 언어를 통해 사람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시를 잊어서는 안 될, 사소한 이유다.


[동아일보 / 이광호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