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한 남자
[김민철의 꽃이야기]
<226회>
어느날 아침 갑자기 손이 브로콜리로 변해버린 남자가 있다. 이유리의 단편 ‘브로콜리 펀치’에 나오는 남자에게 일어난 일이다.
<원준의 오른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팔뚝 가운데쯤부터 점점 푸르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해서 가장자리가 깔쭉깔쭉한 잎사귀들로 감싸이고, 손가락은 연둣빛 줄기가 되어 끝으로 모여서는 아프로 펀치파마같이 뽀글뽀글 큼직한 푸른 송이를 이룬 그러니까 완벽한 브로콜리, 빼도 박도 못 하도록 브로콜리였다. 게다가 참 실하기도 하지, 슈퍼에서 마주쳤다면 무심코 덥석 집어 들었겠다 싶을 만큼 신선하고 굵직해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매만질 수밖에 없었다.>
화자가 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병원이 가자 사람들은 ‘어머 브로콜리 저거 정말 오랜만에 보네’, ‘저렇게 큼직한 브로콜리가 되다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겠는걸’이라고 한마디씩 하느라 시끄럽다.
◇결이 다른 이유리식 판타지 소설
사람의 손이 브로콜리로 변했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이유리 소설에서 이 정도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유리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에 있는 다른 소설에선 죽은 아버지가 나무로 변신해 연애까지 하고(‘빨간 열매’), 사고를 당해 물에 빠져 죽지만 사후공간으로 이동해 외계인들과 대화하고(‘둥둥’), 5년 전 죽은 남자친구가 손톱에 빙의해 나타나고(‘손톱 그림자’), 이구아나가 사람처럼 굴기(‘이구아나와 나’) 때문이다.
오른손이 브로콜리가 된 이유는 ‘마음에 짐이 커서’였다. 원준은 복싱 선수로 상대를 잘 때려눕히려면 우선 억지로라도 상대방을 미워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원준은 평소에 여자친구를 만나 세상만사를 스스럼 없이 얘기했지만, 복싱에 대한 이야기에서만큼은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브로콜리 모양의 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자와 원준, 안필자 할머니 일행과 함께 산에 올랐다. 원준은 산 중턱 낭떠러지에서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며 응어리를 풀어내고 할머니가 싸온 음식을 양껏 먹었다. 그러자 원준의 브로콜리는 ‘작은 불꽃’ 같은 폭발을 보이며 예쁜 꽃을 수없이 피어내기 시작했다. 낫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 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어느새 소설에 몰입해 페이지를 넘겨가고 있었다. 왜 브로콜리가 생겼는지, 어떻게 치료해야하는지 등에 관심이 높아져 단숨에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판타지 소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만 ‘브로콜리 펀치’는 다른 판타지 소설과 결이 좀 다르다. 이유리식 판타지는 현실·생활 속에 잘 녹아들어 있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할 정도’(문학평론가 소유정의 해설)다.
◇브로콜리·배추·콜라비는 한 뿌리
브로콜리는 십자화과 채소다. 십자화과는 꽃잎이 네 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꽃 모양이 십자 모양이라고 붙은 이름인데, 대부분 먹을 수 있는 고마운 식물들이다.
심자화과인 배추, 브로콜리, 콜라비, 콜리플라워, 케일, 브뤼셀(Brussels)...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양도 다양하고 맛도 다른 것 같은 이 채소들은 놀랍게도 모두 하나의 식물, 야생 겨자에서 품종을 개량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2022년 카오스 식물 강연 시리즈 중 9강은 포스텍 생명과학과 최규하 교수의 ‘식물 유전학과 육종의 역사’였다. 이 강연을 들으면서 배추, 콜라비,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케일, 브뤼셀의 조상이 같다는 사실에 놀랐다. 조상이 같은 정도가 아니라 같은 종에서 나온 품종들이라니! 그것을 정리해놓은 것이 아래 그림이다.
그 종은 바로 야생 겨자 식물 ‘Brassica oleracea’다. 지금의 겨자와는 다른 종이다. 이 하나의 종에서 인류가 어떤 부위가 발달한 것을 반복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채소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 야생 겨자 식물에서 꽃봉오리와 줄기가 큰 것을 계속 반복해 선택한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브로콜리라는 식이다.
인류는 무엇을 선택했을까? 그 대상은 자연변이다. 그러니까 야생 겨자는 꽃봉오리가 큰 것, 잎이 큰 것 등 조금씩 자연변이를 하는데, 필요에 따라 꽃봉오리가 큰 것을 골라 심고, 그 중에서 또 꽃봉오리가 큰 것을 골라 심는 것을 오랜 시간 반복한 결과 오늘날 브로콜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야생 겨자에서 잎이 좋은 것(그 중에서 속이 단단하게 뭉치는 것)을 계속 선택한 것이 배추, 꽃봉오리가 좋은 것을 계속 선택한 것이 콜리플라워, 줄기가 좋은 것을 계속 선택한 결과가 콜라비, 잎이 좋은 것을 선택한 것이 케일, 잎 새싹이 좋은 것을 선택한 것이 브뤼셀이다.
식물은 4억 년 전 최초로 출현해 오늘날까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런 식물의 역사에서 인류가 큰 것, 원하는 것을 고른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할텐데 그 시간에 오늘날 같은 변화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매끈매끈한 빨간 열매, 푸릇한 풀 냄새 등과 같이 식물을 유심히 관찰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감각적인 표현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스스로를 집에서 식물을 돌보는 ‘식집사’라고 표현하고 ‘식멍’(식물 멍하니 바라보기)이 취미 중 하나라고 말할 정도다. 작가는 식물을 통해 사랑의 새로운 방식을 알아간다고 했다. 식물마다 필요한 비료와 물 주는 횟수가 다르듯 “사랑이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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