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해방정국의 3대 비극
③1948년 제주 4·3사건(상)
지난 4월에 연재를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척 긴장했고, 살얼음을 밟는 것 같았다. 틀린 점이나 없는지, 내 글로 말미암아 마음 아파할 사람은 없는지, 사자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일은 없는지….
이번 글에서 특별히 그런 넋두리를 하는 것은 제주 4·3사건이야말로 너무 극명하게 좌우가 갈려 대치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한국의 현대사는 은원(恩怨)이 너무 깊다. 어느 편에 설 수도 없다. 학자의 소신이니 역사가의 정론이니 하는 것이 참으로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제주 4·3사건을 쓰려니 그런 감회가 더욱 새록새록하다.
4·3사건 당시 학교 운동장에 모인 제주 주민들. 공산 게릴라들에 부역한 혐의가 있으면 즉각 처형됐다.
아름답고 슬픈 제주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곳은 한라산의 아름다움이다. 세계 10대 절경에 뽑혔다거나 내 나라 땅이라거나 하는 것과 관계없이, 나는 설령 한국인이 아니었더라도 한라산의 설화를 꼽았을 것이다. 이 좁은 땅에 한대(寒帶)부터 아열대기후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한라산에 갈 적마다 늘 기쁘고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제주 4·3사건을 쓴 뒤로부터 그렇게 되었다. 더욱이 이산하의 시 ‘한라산’의 다음 구절을 읽을 때면 가슴이 저려온다.
‘한라산’ - 이산하
제주도의 아름다운 신혼 여행지는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제주는 참으로 신기한 곳이다. 30년 전에 제주 사건을 답사하면서 몇 가지 놀란 일이 있다. 한집안에 살면서도 부모와 자식이 따로 밥을 지어 먹는 것이 이상했다. 김씨 집에 혼사가 있을 적에 하객인 이씨 집안의 아버지는 저쪽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저쪽 어머니에게, 형은 저쪽 형에게, 그리고 동생은 저쪽 동생에게 따로따로 축의금을 내는데 축의금은 각자 받은 사람의 몫이었다. 대문도 특이했다. 집이 비었을 적에는 긴 막대기를 가로질러 놓고, 여자만 있을 적에는 막대기를 비스듬히 놓고, 손님이 들어와도 좋을 때는 그 막대기를 치운다.
육지 사위는 괜찮지만, 육지 며느리는 환영하지 않는다는 점도 특이했다. 제사는 아들딸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면서 모신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에서 맏며느리가 영정을 드는 것도 이색적이다. 이를 두고 누구는 제주의 여성 존중 풍습이라 하고, 누구는 4·3사건 때 남자들이 많이 죽어 그렇다고도 하나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앞의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문화인류학을 꺼낼 것까지는 없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그들의 독립심이 매우 강인하다는 것이었다.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천주교인과 주민들의 충돌 사건을 다룬 영화 '이재수의 난'(1991).
소외의식이 강했던 제주도
역사적으로 볼 때 제주도는 대륙과의 격리로 말미암아 행정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혜택이 빈약해 소외의식과 경계심이 강렬했다. 이미 조선 시대 후기부터 제주도민들의 이러한 불만은 조직적 저항으로 나타났는데, 양제해(梁制海)의 난(1812), 철종 시기의 민요(民擾, 1862), 방성칠(房星七)의 난(1898), 그리고 그 유명한 이재수(李在守)의 난(1901) 등으로 말미암아 중앙정부와의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이정재와 심은하가 주연해 영화로도 유명해진 ‘이재수의 난’(1999)만 하더라도 할 말이 많다. 한국 천주교 박해사를 이야기할 때면 왕조로부터 박해받은 순교자의 거룩한 신심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제주도에서는 프랑스 세력을 배경으로 신자들이 비교도를 박해하다가 사단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흔히 제주 교안(敎案)이라 부르는 이 사건에는 제주의 슬픔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4·3사건 당시에 민병대(民兵隊)들이 “예수쟁이를 죽여야 한다”고 외치며 대정교회 이도종(李道宗) 목사를 죽인 사건(전정희, ‘대정교회’, 국민일보 2015. 5. 23.)은 그런 복수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 시대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제주도에 부임한 관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그 부하들은 육지인이었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가 되면 일본은 제주도를 최후의 항전지로 생각하고 많은 무기와 병력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무기에 매우 친숙해 있었다. 종전 무렵의 제주도에는 6개 보병사단과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육군과 막강한 해·공군 25만 명이 주둔하고 있어 도민들보다 군인이 더 많았다. 일본은 아마도 제주도를 ‘한국의 시칠리아(Sicily)’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E. Grant Meade, 1951, p. 34)
해방 당시 인구 25만 명
해방 당시의 제주도는 13개 면에 인구 25만 명을 가진,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군(郡)이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5만 명이 더 귀환했다. 나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본이나 육지로 나가 있던 유학생, 사상 도피자, 상공인들이 대거 귀환한 데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좌익 사상에 젖어 있었고 남로당과 연결된 사람도 많았다. 미군정이 들어서기에 앞서 인민공화국 정부가 있었으며 남로당원이 자칭 5만 명 있었으나 대부분이 농부와 어부였고, 진심으로 공산주의의 교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G2 Periodical Report, No. 1097, 1 April 1949) 그들의 이입은 분노를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해방정국에서 제주 상황을 가장 정확히 인식했던 사람은 제주 사태의 조사 책임을 맡았던서울지방심리원(審理院) 판사 양원일(梁元一)이었다.(그는 지난날 조선정판사 사건의 주심 판사였다. 그는 정부 수립과 더불어 용산 거리에서 백주에 총을 맞고 죽었다. 죄목은 ‘술주정’이었다. 좀 이상하지 않나?) 그의 판단에 따르면, 제주도민들은 사실상 정부 행세를 하던 인민공화국을 너무 과대평가했고, 경찰이 가혹한 행동을 자행함으로써 인심을 잃었으며, 여기에 우익청년단이 협조했고, 밀무역 단속을 빙자해 관리들의 횡포가 극심했으며, 도민들은 강대한 세력에 아부해 지위와 재산을 보존하려는 심리가 강했고, 남북 협상을 지나치게 기대했다는 것이다.(조선일보 1948. 6. 17.)
경찰의 가혹 행위, 곧 고문이나 수탈, 보복 살해 등에 관해서는 제주 사태의 진상조사를 맡았던 최란수(崔蘭洙) 경감의 기록(동아일보 1948. 6. 23.)에 잘 나타나 있는데, 100명 전후의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를 비롯한 우익들이 제주도민의 생업이었던 일본-제주-육지 사이의 중간 무역을 위협하고 침해했다. 당시 미군정 아래에서 귀환 동포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재산은 대부분 섬에 결핍되어 있는 생활필수품이었는데 서북청년회가 이를 압수해 상인들에게 다시 팔아 돈을 벌었다.(조선일보 1948. 7. 24.)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의 3·1절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서울운동장(우익)과 남산(좌익)에서 따로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가 행진을 하는 동안에 좌우익이 충돌해 사망자 16명과 부상자 22명이 발생했다.(조선일보 1947. 3. 2.) 그와 때를 같이해 제주 남산국민학교에서 3·1절 행사를 마치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현장에서 6명이 피살되었다.(동아일보 1947. 3. 4.) 시위가 격화된 것은 3·1절 경축식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의 시국 문제를 거론했고, 그 틈새에 남로당이 사건을 확대하려고 암약한 탓이었다.
제주 4·3사건 당시 제주도 제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왼쪽)과 한라산 유격대장 김달삼.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폭력화
이와 같은 복합적인 요인으로 민심이 격분한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에 도민들이 경찰서와 우익을 공격하는 것으로 제주 사건은 본격적으로 폭력화했다. 첫날의 민병대 수는 100명이 넘었다. 당시 제주에는 15개 지서에 약 480명의 경찰관이 있었는데, 이날 경찰관서 11개소가 습격을 받았고 경찰관 4명이 사망했으며, 일반인 8명이 사살되었다.(조선일보 1948. 4. 6.)
습격의 주요 원인은 밀수 혐의 등을 이유로 도민과 그 가족에게 가해진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횡포, 고문치사, 강간 등에 대한 보복에서 비롯되었다. 민병대의 최초 목적은 경찰에 구금되어 고문당하는 피의자들을 구조하려는 것이었다. 첫 공격자들이 공산주의 이념에 몰두해 있었다고 믿을 만한 증거는 없지만 15개 경찰서 가운데 11개소가 한꺼번에 습격을 받은 것으로 보아 배후에 아무런 밀모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태가 악화하자 정부는 1400명의 본토 경찰을 파견하는 한편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김정호(金正晧)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해상교통망을 차단함으로써 외부 세력의 가세를 막으면서 민병대의 귀순을 유도하고자 했다. 김정호는 만주 봉천군관학교 3기 출신으로 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경찰에 투신, 경무부 공안국장을 맡고 있었다. 처음 귀순 공작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제주지사 유해진(柳海辰)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섭을 위해 ‘산(山)사람들’을 만나기로 한 날 갑자기 몸이 아파 못 가겠다고 말했다.
그다음의 교섭 책임자는 김정호였으나 그 또한 갑자기 서울로 올라갈 일이 생겨 빠졌다. 세 번째로 임명된 책임자는 제주경찰청 감찰청장 최천(崔天)이었는데 그 또한 회담 당일에 갑자기 몸이 아팠다. 이어서 제주도 민족청년단장이 네 번째 책임자로 지명되었으나 그도 또한 담판을 회피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아카이아동맹군의 장군들은 전쟁만 임박하면 위경련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플루타르코스 영웅전』‘아라토스전’), 한국에서도 꼭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9연대장 김익렬(金益烈)이 다섯 번째 교섭자로 지명되었다.
다섯 번째 교섭자 김익렬
김익렬(1921~1988)은 경남 하동(河東) 출신으로 일본 고베(神戶)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후쿠지야마(福知山)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해방을 맞이해 귀국한 인물이다. 그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에 소위로 임관했으며, 제주도에 부임할 당시에는 중령이었다. 그는 유서를 써 남겨두고 한라산 유격대 김달삼(金達三: 1925~1950)의 아지트로 올라갔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대좌가 이뤄진 것은 4월 28일이었다. 이때 김익렬을 따라간 부관이 이윤락 중위였는데 그는 이후락(李厚洛)의 사촌 동생이었다.
제주 대정중학교에 소장된 김달삼의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대정 출신이다. 본명은 이승진(李承晋)으로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정토종계(淨土宗系) 세이호(聖峯)중학교와 주오(中央)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아버지가 살던 대구에서 잠시 살았는데 이때 어떤 형태로든 대구 사건과 연루되었을 것이다. 1946년에 제주도로 귀향한 그는 대정초급중학교에서 역사와 공민을 가르치면서 남로당 대정면 조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남로당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강문석(姜文錫)의 사위였다.(『20세기 제주인명사전』, 2000, 102~103쪽)
김익렬의 유고(遺稿) ‘4·3의 진실’(『4·3은 말한다』(2), 1994, 320쪽)에 따르면 두 사람은 전혀 초면이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주 사건을 논문으로 발표한 메릴(John Merrill, 1980, 174쪽)과 김익렬의 선임 연대장이었던 이치업(李致業)은 김익렬이 학병 출신으로 김달삼과 동료였으며 제주도에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번개 장군』, 2001, 107쪽)
유격대의 지휘자는 김달삼이었지만 군사 지휘관은 학병 출신인 이덕구(李德九)였고 초기의 병력은 500~600명 정도였다. 이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무렵 버리고 간 무기를 모아 무장하고 군사훈련은 팔로군(八路軍) 출신들이 담당해 자못 그 기세가 당당했다. 〈계속〉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0396
1948년 제주 4·3사건(하)
김익렬과 김달삼, 그리고 박진경
1948년 4월 말이 되자 유격대의 숫자는 2000명 정도로 늘었으며 약 3개월분의 탄약과 식량을 저장하고 있었다. 유격대 가운데는 퉁퉁 부은 젖가슴을 보이면서 어서 집에 돌아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여인도 있었다. 김익렬은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해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명단에 기재된 범인들의 자수‧도망은 자유의사에 맡기겠으며, 김달삼과 유격대 두목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선박을 제공할 용의도 있으며, 이를 보증하고자 자기 가족을 인질로 잡혀두겠다고 약속했다.(김익렬, 1994, 328~330쪽) 이 자리에서 그가 제시한 요구 사항은 전투 행위의 중지와 즉각적인 무장 해제였다.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행방불명 표지석에서 고인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뉴스1
이에 대해 김달삼이 제시한 조건은 제주도민으로만 행정 관리와 경찰을 편성하고, 민족 반역자·악질 경찰·서북 청년들을 제주도에서 추방하고 제주도민으로 편성된 경찰이 구성될 때까지 군대가 제주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현재의 경찰은 해체하며, ‘의거’(봉기)에 참가한 어떠한 사람도 죄를 묻지 않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충돌 초기의 ‘공산 혁명’ 색채는 보이지 않았다. 김달삼의 제안은 김익렬의 직권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일단 휴전에는 합의를 보았다.
전투가 소강(小康)에 들어간 상태에서 5월 1일의 노동절(May Day)이 다가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날 오전 11시쯤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제주읍 중산간 마을 오라리를 습격해 주민을 죽이고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경찰이 저지른 귀순 방해 공작이었다. 며칠 안에 귀순 작업이 종료되어 진압이 끝나게 되면 경찰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그들은 두려워했다. 더욱이 우익들은 연대장 김익렬을 암살하겠노라고 위협했다. 습격은 2~3일에 걸쳐 자행되었다. 5월 3일에도 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일본군 중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귀순 민병대를 습격했다.(김익렬, 332~335쪽) 이윤락은 민간인을 습격한 것이 경찰과 우익이었다는 증언을 남겼다.(양소훈, 2015, 44~46쪽)
이 무렵 5월 5일에 제주도에서는 딘(William F. Dean) 군정 장관의 주도 아래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宋虎聲),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Mansfield), 제주지사 유해진, 제주경찰청 감찰청장 최천이 참석해 진압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온건 화평 전술을 주장하는 김익렬 연대장과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 사이에 첨예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제주 4·3사건 당시 남조선국방경비대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왼쪽)와 부역 혐의자를 사살하라는 지시를 거부한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
정부 측에서는 김익렬에게 “10만 달러를 줄 것이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라”는 회유가 있었으나 김익렬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딘 장관이 토벌 작전으로 방침을 결정함에 따라 김익렬은 용공 분자라는 의혹을 받고 여수 14연대장으로 전출했다.(김익렬, 338~341쪽) 하필이면 여수 14연대장으로 전보된 것도 운명이었다.
김익렬의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朴珍景: 1920~1948) 중령이 부임한 것은 5월 6일이었다. 그가 부임한 직후 9연대는 11연대로 편제가 변경되었다. 박진경은 경남 남해(南海) 출신으로 오사카(大阪) 외국어학교를 졸업해 영어에 능통했다. 그는 해방이 되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소위로 임관했으나, 행정 장교 출신이었으므로 작전 지휘의 경험이 없었다.
딘 장군은 영어가 불편하지 않은 박진경을 몹시 총애했다. 박진경은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기 때문에 지형과 요새 배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취임식에서 미욱한 짓을 저질렀다. 자기 부친은 친일 단체인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 간부였으며,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발언한 것이다. 김익렬의 유고(344~345쪽)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 발언에 대해 이철승(李哲承)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들은 박진경이 양민을 보호했다고 반박했다.(‘민족 정론 소식’, 2000년 3월호, 4~5쪽)
대대적 토벌 작전, 경찰의 실수
박진경의 부임과 함께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다. 김정호 사령관의 작전 계획은 초토화[淸野] 작전이었다. 이 작전이 제주도의 민중 봉기를 유격대로 확대시킨 근본 원인이 된다. 더욱이 사태를 어렵게 만든 것은 경찰의 실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과 죄상을 은폐하고자 오히려 노골적으로 귀순 공작을 방해했다. 미군정이 초토화 작전을 묵인하게 되자 경찰은 공공연하게 마을들을 초토화해 나감으로써 산간 주민들이 산으로 도주해 유격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유격대에 자진 합류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제주도에서 밭의 경계선에 돌담을 쌓은 것은 유격대에는 훌륭한 방새(防塞)가 되었다. 언제인가 나는 제주도 우근민(禹瑾敏) 지사에게 돌담 기술자를 명장(名匠)으로 선정하라고 말했다가 그곳 출신이면 초등학교 출신도 다 하는 일이라고 핀잔만 들었다. 돌담뿐만 아니라 산간 지역에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토굴이 많아 유격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박진경이 부임한 뒤 거의 1개월이 지나 군정장관 딘은 박진경의 사기를 고무하고자 몸소 제주도에 내려가 대령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그날 관리와 민간 유지들을 초청해 성대한 축하연을 열었다. 박진경이 만취해 6월 19일 오전 3시에 연대본부의 숙소에 돌아와 잠이 들었을 때 문상길(文相吉) 중위를 비롯한 4명의 부하가 그를 사살했다. 그들은 박진경의 무자비한 공격 작전이 살해의 동기였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고등군법재판은 문상길, 신상우(申尙雨) 1등상사, 손선호(孫善鎬) 하사, 배경용(裵敬用) 하사 등 4명에게 총살형을 선고했다.(조선일보 1948. 8. 11.; 8. 15.) 그때 문상길의 나이는 22세였다. 세월이 흐르자 우익들은 그들이 남로당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박진경의 장군 추서를 추진했다.(‘민족 정론 소식’, 4~5쪽) 박진경의 후임으로 최경록(崔慶祿) 중령이 취임했다.
이 무렵인 9월 14일에는 제주 사건과 관련해 목포(木浦)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440명의 죄수가 집단으로 탈옥했다. 경찰은 그들을 처형하고 살점을 저며 좌익 인사들에게 배달했다.(John Merrill, 193쪽) 군사 법정은 공산주의 용의자 1650명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이들 가운데 250명이 처형되었다. 이와 함께 여수·순천 사건의 소식을 듣고 유격대는 다시 경찰초소를 공격했다. 아울러 여순 사건은 우익들에게 제주 학살의 명분을 제공해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경비대와 경찰은 제주도 주민을 해안에 설치된 캠프로 소개(疏開)하고, 한라산 아랫자락을 따라 가옥과 농작물을 불태웠으며, 혐의가 있는 유격대와 그들의 가족을 살해했다.(Allen R. Millett, 1997, 528쪽) 일부 해병은 포로가 된 유격대의 목을 일본도로 베어 허리에 차고 기념촬영을 했다.(鄭采浩, 2000, 61~65쪽)
4·3사건 당시 군경이 성산포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 지시서.
성산포경찰서 문서가 말하는 것
인간의 마성(魔性)은 얼마만큼이나 극악할 수 있을까? 과연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잔혹하게 동족을 집단 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방 공간이라는 동족의 무대에서 이민족(異民族)의 식민지 지배에서도 겪지 않았던 대량 학살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다시 어리석은 질문을 해보자. 도대체 얼마나 죽였을까? 양민 학살의 진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성산포경찰서에 소장된 문서(사진)가 곧 그것이다. 이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계엄사령관이었던 해병대 김○○ 중령이 성산포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공문인데, 1950년 8월 30일자로 시달된 이 문서의 내용은 성산포경찰서에 수감 중인 C-D급 미결혐의자를 1주일 안인 9월 6일까지 모두 사살하라는 것이었다. D급으로 올라갈수록 중범자다. 그들은 물론 재판을 거치지 않은 혐의자일 뿐이다.
그런데 문서 윗부분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총살이 집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모두 성산경찰서처럼 총살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재판도 거치지 않고 중령의 명령으로 모두 총살하라는 이 공문은 시행 여부와 관계없이 그 당시가 얼마나 무법천지였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 중령은 그 뒤 해병대사령관으로 진급했고 독립유공자 5등급을 받았으며, 어느 교회 장로님으로 살다가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불이행(不履行)’이라고 부전지(附箋紙)를 붙인 인물은 성산포경찰서장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신원을 추적해 보니 문형순(文亨淳) 경감이었다. 대정리 앞바다에서 이 문서를 들여다보는데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문제를 학술적으로 처음 다루었던 메릴은 적어도 제주도 인구의 약 10%인 3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John Merrill, 194~195쪽) 군정청에서는 1만5000명이 살해당하고 3분의 1의 가옥이 파손된 것으로 보고했으며(G-2 Periodical Report), 군사(軍史)학자 밀레트는 제주도에서 ‘사라진’ 주민이 약 3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아마도 실제로 피살된 숫자는 8000에서 1만 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Allen R. Millett, 528쪽)
제주도의회가 접수한 피해자 통계에 따르면, 당시 피살자가 9987명, 행방불명자가 1225명,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피해자 1031명, 피해자로 접수되지는 않았지만, 사망이 확실한 무연고 피살자가 2598명, 합계 1만4841명으로 집계되어 있다.(『제주도 4·3 피해조사 보고서』, 2000, 60~63쪽)
‘보복 살해’ 악순환이 낳은 비극
제주 4·3사건에 투입된 군경들이 부역자 혐의를 받은 주민들을 처형하고 있다.
요컨대, 제주 4·3사건의 본질은 사건의 발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수습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적 현상이다. 원인만 따지는 것은 죄상을 묻으려는 구실일 뿐이다. 제주 사건은 처음에 자발적인 민중 봉기로 시작된 것이었으나 ‘서로의’ 보복 살해로 말미암아 사태가 악화했고, 남북한이 정면 대결로 굳어지자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추격을 겪게 된 잔여 세력들이 점차 조직적인 빨치산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제주 사태는 남로당이 승리할 수 없는 때에 무장투쟁에 뛰어든 결과를 초래했고, 우익들에게는 양민 학살이라는 오명을 안겨주었다.
김달삼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제주도에서 탈출해 월북했다. 북한 혁명 열사의 능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 1950년 9월 30일에 죽은 것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김익렬은 그 뒤 육군 중장에 올라 국방대학원장을 끝으로 퇴역했다. 그는 ‘좀 허풍스러웠으며 좌경한 군인’(이치업, 110쪽)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공개하라면서 가족들에게 제주 사태의 진상을 담은 유서(遺稿)를 남겼는데, 이렇게 끝이 난다.
“나는 경찰의 최고 책임자인 조병옥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 작전의 만행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김익렬, 305, 357쪽)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