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궁녀’ 낙화암엔 애수의 노래… ‘서동 설화’ 궁남지선 연꽃의 초대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7-11 09:36
- 업데이트 2024-07-11 09:40
우리나라 최고의 인공정원인 부여의 궁남지. 연못 주변의 버드나무 뒤쪽이 거대한 연밭으로 조성됐다. 지금 궁남지 연밭에는 연꽃이 만개했는데, 2000년 만에 싹을 틔웠다는 ‘대하연(大賀蓮·오가하스)’도 지금 꽃이 절정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감상과 애환의 눈으로 보는 충남 부여
안압지보다 40년 앞선 궁남지
‘2000년 된 연꽃’ 활짝 꽃피워
중앙엔 무왕 설화 깃든 포룡정
부소산 북쪽 벼랑엔 낙화암
쪽배 띄우고 감상하던 작사가
‘꿈꾸는 백마강’ 노랫말 지어
‘3년 회춘’ 약수 유명한 고란사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도 방문
지금은 샘 안에 자외선살균기
궁중 요릿집 ‘명월관’ 주인과
기생들에 사군자 가르친 김규진
전국 다니며 서화 현판 남겨
김시습이 말년에 머물렀던 절집 무량사. 김시습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 있다. 부여에서 백제가 아닌, 조선의 시간을 볼 수 있는 장소다.
부여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부여가 최고의 여행지였던 이유
백제의 고도 부여는 100년 전쯤 ‘최고의 여행지’였다. 70년 전에도, 5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 곳, 경주만 빼면 나라 안에서 부여와 겨룰 만한 곳이 없었다. 명승과 고적, 그리고 흘러간 역사의 회한과 상념이 여행의 중심에 있던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부여는 더 이상 최고의 여행지가 아니다. 여행이 대중화하면서 거의 모든 여행지가 과거보다 더 유명해졌지만, 부여의 명성은 영 예전만 못하다. 여행의 욕망은 다양해졌고, 여행지를 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좋았던’ 시절의 부여를 대표하는 명소는 부소산과 낙화암, 그리고 고란사였다. 그중 으뜸은 낙화암이었다.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스토리는 고리타분한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백제 멸망의 비사(秘史)와 애화(哀話)의 절정’이었다. 스러져가는 백제에 궁녀가 자그마치 ‘3000명’이라는 것부터가 ‘뻥’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궁녀 3000명’은 향락에 빠진 백제왕실의 타락을, ‘투신’은 백제 멸망 순간의 비장감과 처연함을 극적으로 대비해 보여줬으니까.
낙화암은 본래 ‘타사암(墮死巖)’이었다. ‘떨어질 타(墮)’에 ‘죽을 사(死)’자를 썼다. ‘떨어져 죽은 바위’란 뜻이다. 그 이름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후대에 그걸 버리고, ‘꽃이 떨어진다’는 뜻의 ‘낙화(落花)’를 이름으로 걸었다. ‘진술’이었던 공간의 이름이, ‘감상’으로 바꿔치기 된 것이다. 개명은 아마도 이런 감상을 공유하는 이들의 ‘집단 창작의 형태’로 이뤄졌으리라.
시대를 지나오면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고 재생산됐다. 그걸 꼭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잘 짜인 스토리가 결과적으로 지역 정체성을 만들고, 유적을 귀하게 여기게 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건 부여는 사실이나 진술이 아닌, 감상과 애환으로 보는 곳이었다는 것. 과거의 부여에서는 모든 것이 다 쓸쓸했다. 부소산의 가랑비, 낙화암에서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잠긴 달…. ‘부여 팔경(八景)’은 하나같았다.
# 부여 여행을 잘하는 방법이 있다
그 시절 부여가 관광지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는 오래된 신문기사로 증명된다. 조선일보 1936년 8월 27일 자에 ‘백제 고도 부여에 탐승객(探勝客·관광객)이 급증했다’는 기사가 있다. 기사를 간추리면 작년, 그러니까 1935년에 연간 1만 명이 부여를 찾았는데, 이듬해 1936년에는 상반기에만 벌써 관광객이 1만 명이 넘었다는 내용이다. 관광객 급증의 이유로 지목한 것이 부여 ‘백제관’의 박물관 분관 승격이었다. 백제관은 박물관 분관 승격 전에는 ‘고물(古物)진열관’으로 불렸다. 모든 것이 다 누추하고 허름했던 시절이었다.
부여에 가서 고물진열관, 아니 박물관 분관에 들렀다가 백마강에 황포돛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하며 낙화암을 둘러보는 건, 그 시절 꿈꿨던 여행의 로망이었다. 요즘도 그게 여전히 로망일까. 백제의 애수와 회한은 여전한가.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거나 ‘고란사 약수를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전설을 사람들은 여태 믿을까.
과거에 부여를 여행하는 이들이 지참했던 건 ‘감상’이었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전의 방식대로 부여를 여행한다면 박제된 시간이 고리타분하고 풍경도, 이야기도 지루할 따름이다. 박제된 백제만 보지 말고, 고대국가 백제 위에 덧입혀진 근대와 현대의 스토리를 따라 여행하는 게 지금 부여를 여행하는 방법이다.
1000년 전 백제의 시간이 그렇듯, 100년 전의 식민지 시대도, 50년 전 압축성장 시절의 이야기도 다 역사다. 이런 접근이야말로 부여 여행을 풍성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 백제의 이야기 위에 심어진 연꽃
‘왕년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부여에서는 낙화암과 부소산이지만, 궁남지(宮南池)부터 간다. 이유는 하나. 궁남지 연꽃이 딱 지금, 절정을 건너가고 있기 때문이다.
궁남지는 말 그대로 ‘궁(宮)의 남(南)쪽에 있는 연못’이다. 연못은 백제 무왕 때 조성됐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경주의 안압지보다 40년쯤 앞섰으니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정원이다.
궁남지 이야기는 삼국사기도, 삼국유사도 다뤘는데 시선이 다르다. 먼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한 대목.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이십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였다. 연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만들었다.”
삼국사기가 연못의 조성과정과 형태에 주목했다면, 삼국유사가 기록했던 건 궁남지에 깃든 이야기다. 삼국유사 무왕 편에 나오는 이야기. “무왕의 어머니는 남지(南池·궁남지) 둑에서 혼자 살다가 그 못의 용과 상관하여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훗날 무왕이 된) 서동이고, 재능과 도량을 헤아릴 수 없었다.”
둥근 연못인 궁남지 한가운데에 나무다리로 건너갈 수 있는 포룡정(抱龍亭)이란 정자가 있다. ‘용(龍)을 안았다(抱)’는 정자의 이름은 무왕의 탄생 설화에 기댄 작명이다. 포룡정 현판은 1971년 당시 국무총리던 김종필이 썼다. 그는 부여 출신이다. 백제의 시간 위에 더해진 역사다.
궁남지의 주인공은 언제부턴가 연못 둘레에 심은 연꽃이 됐다. 궁남지 주위는 거대한 연밭이다. 연꽃은 여름 한복판에 핀다.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 혹은 퍼붓는 장맛비 속에서 봐야 한다. 보통 수고롭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꽃이 피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만한 수고를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궁남지 연꽃이 좋아서다.
# 2000년 전의 연꽃이 피었다
궁남지에는 봐야 할 연꽃이 있다. ‘대하연(大賀蓮)’이다. 연못 북쪽 자그마한 연밭에서 자란다. 지금 대하연의 연분홍 꽃이 절정이다.
대하연은 일본에서 가져왔다. 대하(大賀)의 일본식 발음이 ‘오가’다. 일본의 식물학자 오가 이치로(大賀一郞). 그는 1951년 일본 지바(千葉)현 도쿄(東京)대 운동장에서 미라 발굴 중 2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연꽃 씨앗 3개를 발견했다. 그해 5월에 이 중 한 개의 씨를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듬해 7월 발아한 연이 분홍색 꽃을 활짝 피웠다. 그게 바로 오가하스, 곧 대하연이다.
일본의 대하연을 당시 부여문화원장이던 이석호가 1973년 국내로 들여와 기르다가 2008년 5월 부여에 기증했다. 부여군은 기증받은 대하연을 궁남지에 심었다. 부여 유적지에 일본서 가져온 꽃을 심는다는 게 불편할 수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궁남지에서 출발한 백제의 정원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오가하스도 여기서 건너간 연꽃의 후손일지도 모를 일. 시대가 좀 맞지 않고 고증도 없지만, 앞서 말했듯이 부여는 사실보다는 감상과 애환의 눈으로 보는 여행지가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대하연은 ‘200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연꽃일 수 있다.
‘2000년 전 연꽃’이라니까 무슨 후광이라도 두르고 있을 것 같지만, 대하연은 다른 연꽃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10년 가까이 대하연을 봐온 궁남지 사적관리소 이은원 주무관도 “대하연을 다른 연꽃과 섞어 놓으면, 한 송이도 찾아낼 자신이 없다”고 했다. 연꽃에는 다양한 품종이 있는데, 좋은 품종의 조건 중의 하나가 ‘꽃이 높게 피는 것’이다. 연잎 위로 높게 피면 꽃이 도드라지니까 그렇다. 순전히 인간의 관점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대하연은 좋은 품종이 아니다. 아주 드물게 높이 핀 것도 있지만, 대부분 잎 아래서 숨듯이 핀다. 꽃잎도 힘없이 늘어져 생기가 없어 보인다. 좀 더 예쁘게 생겼다면 훨씬 나은 대접을 받았을 텐데…. 2000년의 시간 저편에서 건너온 것인데도, 봐주는 사람 별로 없는 한쪽 구석에서 대하연이 쓸쓸히 꽃을 피우고 있다.
# 낙화암에 슬픔이 켜켜이 쌓이다
이제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으로 간다. 부소산은 부여 왕궁의 뒷산이다. 산이라지만 사실 나지막한 구릉이다. 가장 높은 곳이 해발 106m. 어디가 정상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부소산이 부여의 진산으로 꼽히는 건, 백마강이 굽이치는 북쪽이 벼랑을 이루고 있어 천혜의 성벽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소산 북쪽 벼랑에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다.
근대적 유람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1930년 무렵부터 낙화암에서는 투신 사건이 줄을 이었다. 1930년 5월 20일 열아홉 살 여성이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졌다. 사연인즉 이랬다. 시집간 지 2년 만에 이혼한 뒤, 공장도 다니고 떠돌이 생활도 하다가, 어찌어찌 친어머니가 봐준 집에서 첩으로 살았는데, 이전 시어머니가 찾아와 ‘왜 남의 첩이 돼서 본처에 못할 짓을 하느냐’며 집안을 뒤집어 놓았다. 상심한 여성은 이튿날 새벽, 낙화암 위에서 신발과 버선을 벗었다.
그해 10월 2일에는 충남 논산에 사는 40대 남자가 몸에 철사로 큰 돌을 칭칭 감아 매단 뒤 낙화암에서 뛰어내려 숨진 사건이 있었다. 논산의 한 부호와의 소송에 패소한 뒤, 신세를 비관해오다가 목숨을 버린 것이었다.
1956년 7월에는 고란사에서 함께 사흘째 머물렀던 무량사의 비구니와 동학사의 비구니가 함께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는데, 하필 같은 날 낙화암의 정자 백화정 앞에서 수면제를 먹고 목숨을 끊은 시신까지 발견되면서 충격을 더했다.
그 시절 낙화암은 관광지이기도 했지만, 밑바닥까지 절망했거나 억울하기 짝이 없었던 이들이 ‘마지막’을 생각하며 찾아오는 곳이었다. 삼천궁녀의 죽음보다, 오히려 그 사연들이 더 처연하고 가슴 아프다. 백제의 시간 위로 더 슬픈 사연이 켜켜이 쌓였다.
# 시 한 수와 노래 한 소절
조선 시대에 백마강과 낙화암을 찾은 선비들이 가장 많이 꺼내 펴들었던 문장이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목의 시(詩)였다. “상여부지망국한(商女不知亡國恨·노래를 파는 여인은 망국의 한을 알지도 못한 채) 격강유창후정화(隔江猶唱後庭花·강 너머 저쪽에서 ‘후정화(애절한 노래)’를 부르는구나.” 시에 스며 있는 건, 덧없음과 회한이다.
지금 낙화암에서 가장 많이 떠올리는 건, 노래 ‘꿈꾸는 백마강’이 아닐까.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사가 김용호가 1941년 지방순회공연차 부여에 들렀다. 어렵게 짬을 내서 백마강에 쪽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했다는데, 거기서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로 시작하는 가사가 탄생했다.
노래 ‘꿈꾸는 백마강’의 2절에 ‘고란사 종소리’가 나온다. 고란사는 낙화암 아래 자그마한 절집이다. 언제 창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백제 멸망과 함께 불탔다가 이후에 한 번의 중창과 두 번의 중수를 거친 뒤에 1900년 은산면의 숭각사를 옮겨 중건했다. 지금은 그마저도 다 사라졌고, 남은 건 1931년 지은 법당과 종각뿐이다.
고란사는 쇠락의 흔적이 역력하다. 비가 새는지 주 법당인 극락보전 지붕 한쪽 지붕을 푸른 비닐로 덮었다. 스님은 출타 중이었고, 찾는 이도 없어 고란사는 적요한 ‘진공의 공간’ 같았다.
낙화암 아래 고란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그림.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이다.
# 벽화와 사진으로 전설을 읽다
고란사 명물은 극락보전 뒤편에서 솟는 약수다. 백제의 왕실에서 그 물을 가져다 마셨다는데, 고란사 약수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절 뒤편 벼랑에서 자라는 고란초 이파리를 물 위에 띄워 가져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약수에는 ‘마실 때마다 3년 젊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보다 인상 깊었던 건, 약수 물 깊이 설치한 ‘자외선 살균기’였다.
고란사에 가거든 극락보전 외벽을 유심히 보자. 벽에는 고란사의 역사부터 이런 저런 얘기들을 벽화로 그려뒀다. 벽 한가운데 나당연합군에 쫓겨 낙화암에서 뛰어내리는 궁녀 그림이 있다. 몸을 날리는 궁녀들 뒤로 성안의 건물이 불타고 있고, 말을 탄 나당연합군이 뒤쫓아오고 있다.
세 명의 소녀가 뱃사공과 함께 배를 타고 고란사로 향하는 장면을 담은 벽화도 있다. 서기 518년. 시마메, 도요메, 이시미, 이렇게 세 명의 일본 소녀가 비구니가 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와 고란사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믿을 수 없는 얘기.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게 서기 552년. 불교가 전해지기도 전에 일본인 소녀가 고란사를 찾아왔다는 얘긴데….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다.
벽화 아래에는 1959년 9월 19일,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고란사를 방문했을 당시 찍은 흑백사진 두 장을 걸었다. 한 장은 이 전 대통령이 고란사 약수를 마시는 사진이고, 다른 한 장은 대통령 내외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자세히 보니 프란체스카 여사 발목에 붕대가 감겨 있다. 구두를 신고 고란사를 찾았다가 발목을 삐끗했었단다. 이 전 대통령이 낚시를 하다 방귀를 뀌니까 도지사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시절이었으니, 영부인의 부상에 난리가 났음은 물론이다. 대통령 내외가 돌아가자마자 고란사 가는 오솔길이 대대적으로 정비됐단다.
부소산에서 만난 현판들. ‘고란사(皐蘭寺)’ ‘백마장강(白馬長江)’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고, 아래 ‘인빈출일(寅賓出日)’은 한학자 겸 서예가인 조병호의 솜씨다.
# 백제가 아니었던 시간의 부여
고란사에는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皐蘭寺(고란사)’라 쓴 절집 현판이 걸려 있다. 근대를 대표하는 서화가 해강 김규진의 독특한 서체의 글씨다. 글씨보다 특이한 건 현판 양옆의 여백에 먹과 초록으로 그린 난초다. 난초 그림은 ‘죽농거사’ 안순환의 작품이다. 안순환은 이름난 궁중요릿집 ‘명월관’ 주인이었는데,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안순환은 명월관 기생들에게 사군자를 가르치던 김규진과 친해진 뒤 함께 전국의 명승을 다니며 서화작품을 했다. 이 둘이 글과 그림으로 쓰고 그린 현판이 서울 개운사, 공주 마곡사, 순천 송광사, 합천 해인사에서도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현판 얘기를 더 해보자. 부소산에는 이리저리 이어진 운치 있는 산책길이 있다. 솔바람 시원한 그늘 길이라 느긋하게 산책하기 딱 좋다. 그 길에 몇 개의 누각이 있다.
낙화암 가까운 곳에 ‘사자루(泗자樓)’가 있다. 누각이 선 자리는 부소산 정상이다. 본래 여기는 백제 때 왕과 귀족이 달을 보던 송월대(松月臺) 터. 임천면에 있던 관아의 건물을 뜯어 1919년에 여기에 옮겨 지었다.
정면의 사자루란 현판 글씨는 의친왕 이강이 쓴 것이고, 백마강 쪽 처마 아래 ‘백마장강(白馬長江)’이란 글씨는 김규진의 것이다. 김규진이 의친왕에게 글씨를 가르쳤다니, 스승과 제자가 한 누각에 글씨를 얹은 셈이다.
김규진은 글씨에 담긴 생각을 글로 남겼다. 백(白)자는 태극의 지형에서 취했고, 마(馬)자를 쓸 때는 백마가 풀밭에 누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생각했으며, 장(長)자는 백마강의 길게 흘러가는 기세를 담았고, 강(江)자에는 반은 물이고 반은 땅인 형상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설명을 읽고 다시 보면 글씨에 담긴 뜻이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 반대쪽 부소산 자락에 영일루(迎日樓)가 있다. 이것도 동헌 정문이었던 것을 196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역동적 느낌의 현판 글씨는, 부여 출신 서예가 원곡 김기승이 썼다. 현판 글씨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누각 안쪽에 걸린 현판의 ‘인빈출일(寅賓出日)’ 글씨다. 인빈출일은 ‘떠오르는 해를 공손히 맞는다’는 뜻. 그림인 듯 글씨인 듯, 추상적인 미감이 느껴지는 글씨는 추사의 맥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는 한학자 겸 서예가 조병호의 솜씨다.
부소산은 백제의 공간이지만, 누각은 근대에 옮겨온 것들이다. 부여도 마찬가지. 백제의 도읍이지만, 부여에 백제만 있는 건 아니다. 부여에는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도, 매월당 김시습의 무량사도, 북벌을 꿈꾼 효종의 절치부심의 문장을 힘찬 글씨로 새긴 ‘대재각(大哉閣)’ 비석도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붙잡혀 갔다 귀국 길에 가져온 매화나무 ‘부여 동매(冬梅)’는 또 어떤가. 이런 곳들이야말로, 새로운 눈으로 부여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곳들이다.
■ 낙화암과 곰
믿기 어렵지만, 낙화암 아래에서 큰 곰이 잡힌 사건이 있었다. 때는 1931년 10월 11일. 백마강에서 낚시하던 어부가 강 건너편에서 큰 곰이 낙화암 쪽으로 헤엄쳐오는 걸 발견했다. 주민 20여 명이 달려나가 곰을 에워쌌는데, 고란사 뒤쪽으로 도망치던 곰은 몽둥이를 든 주민을 공격하고 도주했다. 결국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장총 45발을 발사해 곰을 사살했다. 죽은 곰은 무게가 40관(150㎏)이 나갔다는데, 고기를 팔아 20원을, 웅담을 팔아 50원을 받아 마을 주민들이 도합 70원의 수입을 올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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