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남조의 그리움, 김세중미술관
입력 2023.11.17 00:15
업데이트 2023.11.17 06:18
김인혜 미술사가
지난달 김남조(1927~2023) 시인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나대로의 추모를 하고 싶어서, 효창동 김세중미술관에 다녀왔다. 이 미술관은 김남조가 남편인 조각가 김세중(1928~1986)을 위해 지었다. 부부가 수십년간 함께 살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미술관이다. 김남조는 1986년 작고한 남편을 기리는 일을 홀로 장장 37년간 해왔는데, 2015년에 남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지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왔다.
지난달 작고한 시인 김남조가 조각가 남편 김세중을 그리며 서울 효창동 살림집에 세운 김세중미술관. [사진 김인혜]
남편인 조각가 이름 따서 세워
옥상엔 김세중의 이순신 두상
남편은 과천 현대미술관 개관
건물은 민현식 건축가가 설계했다. 크지 않은 공간을 적절하게 배분한 건축적 고려가 돋보인다. 터가 아무리 작아도, 이 터를 집보다도 오래 지켜낸 나무 한 그루를 차마 베어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터줏대감처럼 관객을 맞이한다.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은 나무 옆으로는 김세중의 청동조각 ‘성모 마리아’가 고요히 빗겨 서 있다.
옥상의 작은 야외조각장에는 김세중이 광화문에 세운 이순신 동상의 얼굴이 실물 크기로 놓여 있다. 광화문에서라면 저 높은 곳에 올라앉아 감히 대면할 수도 없는 이순신의 두상을 바로 눈앞에서 성큼 만나는 경험은 살짝 묘하다.
김세중미술관 야외조각장에 놓은 김세중의 이순신 장군 두상 조각. [사진 김인혜]
그러나 이 미술관은 김세중의 조각은 몇 점 상설 전시할 뿐으로, 대체로는 후대 조각가들을 위해 자리를 내준다. 지금도 박병욱(1939~2010)의 작은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대에서 김세중에게 조각을 배웠던 박병욱은 한때 생계를 위해 미국계 회사에 취직해 베트남 전쟁 중엔 사이공에서 삽화를 그리는 일도 했단다. 1973년 다시 조각에 몰두하여 평생 인체 조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 그가 1975년 국전에서 첫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스승인 김세중이 양복값을 보냈다는 일화가 연보에 적혀 있어 웃음이 났다. 김세중은 내가 본 중 누군가에게 금일봉을 줬다는 일화가 가장 많은 예술가인 것 같다.
김세중은 누구인가. 그는 1928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릴케가 쓴 ‘로댕의 말’에 감화받아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해방 후 서울대에 미대가 생기자마자 입학하여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교수로 발탁됐다. 그러니 처음부터 매사에 앞장서 맏형 역할을 도맡아야 할 운명이었다. 새로 해방된 나라에서 국가 시책에 참여하는 일, 문화행정에 관여하는 일도 해야 할 위치였다. 김세중은 서울대 미대 학장으로서 여러 국제교류사업을 추진했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1983년에는 과천에 생길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사업을 책임지는 관장으로 임명됐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1986년 개관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전무후무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세워진 미술관 중 가장 큰 규모다. 아시안게임을 앞둔 일정에 맞춰 급히 추진된 사업인데, 이 일을 맡아 할 인력과 조직은 거의 없었다. 그때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정규직 학예연구사가 아예 없었다. 김세중 관장은 직접 국회의원과 공무원을 찾아다니며 중간중간 좌초될 위기의 사업을 일으켰다. 공사 진행을 총괄하면서 시공업체 직원들에게 저녁마다 밥과 술을 사는 게 일과였고, 인부들에게는 사비를 털어 ‘오리털 파카’를 사서 돌렸다.
더구나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제대로 된 소장품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으니, 그 넓은 전시장을 채울 국제 수준의 개관전을 만들기 위해서도 동분서주했다. 그는 개관전으로 ‘한국 현대미술’ 전시뿐 아니라 ‘프랑스 20세기 미술’ ‘현대 아시아 미술’ ‘와이즈만 컬렉션’ 등 지금 기준으로도 성사하기 어려운 총 4개의 대규모 기획전을 준비했다. 국내외 인재들을 총동원했다. 그러다가 그는 미술관 개관을 불과 2개월 앞두고 과로로 쓰러졌다. 매우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다음은 부인 김남조의 몫이었다. 김남조는 이듬해 ‘김세중기념사업회’를 만들고, 비단 보자기에 꽁꽁 싸두었던 김세중의 퇴직금으로 ‘김세중미술상’을 제정했다. 이후 ‘청년조각상’과 ‘한국미술저작상’을 더 만들어 올해까지 100명이 넘는 조각가와 연구자에게 매년 수천만원의 상금을 주는 일을 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때 애썼던 실무진의 모임을 최근까지도 매년 챙겨서, 연말마다 이들에게 식사대접을 해왔다. 2015년에는 김세중미술관을 열어, 후대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 작고 후 김남조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음가짐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그(김세중)의 삶이 나에게 위탁되어서 두 사람 몫으로 그 뜻을 헤아리면서 살아야겠다.” 말은 쉽지만, 30년 넘는 동안 실천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 오늘은 김남조와 김세중의 ‘헤아림’을 생각하며, 효창공원 옆 김세중미술관으로 한걸음. 관람료 무료.
김인혜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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