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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비 내리고, 바람 불어 … 우리의 가을이 서글피 떠나갑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1. 7. 13:05

[나무편지] 비 내리고, 바람 불어 … 우리의 가을이 서글피 떠나갑니다

  ★ 1,204번째 《나무편지》 ★

  비 차갑게 내리고, 바람 세차게 불어 …… 또 하나의 가을이 떠나갈 채비를 마무리합니다. 지구 반대편 유럽에는 세 시간 동안 이백 밀리미터의 물폭탄을 동반한 태풍으로 전례 없는 피해를 받았다는 심상치않은 뉴스가 눈에 띄는 아침입니다. 종작없는 계절의 흐름에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 곁에 잠깐 머무른 가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고, 결국은 여름도 가을도 우리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나무와 함께 맞이하게 되겠지요.

  올 단풍은 여느 가을에 비해 신통치 않았다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하십니다. 원주시의 유난스러운 홍보와 ‘은행나무 축제’ 때문에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가 찬란한 가을 풍경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한 게 돋보이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올 가을 단풍은 다른 해의 가을만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단풍 빛깔 깊어지기 위해 꼭 필요한 때의 날씨 탓이었겠지요. 일테면 지난 주에 난데없이 ‘인디언 섬머’처럼 더웠던 날들을 보내야 하는 데에서 이미 올 단풍의 투미한 빛깔은 예고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쉬움 남긴 이 가을이 비와 바람에 쓸려 꼬리를 보이며 사라지는 중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가을 풍경도 그랬습니다. 무엇보다 ‘천리포수목원 가을 풍경의 치명적 아름다움’의 상징이라고 늘 이야기해온 팜파스그라스가 꽃차례를 피워올리기 시작하던 지난 시월부터 그랬습니다. 처음 꽃차례가 올라올 때부터 언제나처럼 풍성하게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봄부터 팜파스그라스의 가을 꽃차례를 기대하고 맞이한 시월의 팜파스그라스는 여간 신통치않은 게 아니었습니다. “혹시 좀 지나면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가을 내내 그 생각만 떠올리며 되풀이해 찾아보곤 했지만, 가을의 절정이라 할 무렵인 엊그제까지도 팜파스그라스는 그저 그런 상태였습니다.

  ‘기후변화’라는 말을 ‘기후붕괴’라는 표현으로 대치하는 게 일반적이게 된 것도 얼마 전입니다. 우리 사는 곳의 기후를 이제는 제대로 예측하기도 어렵고, 예측한다 해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기 어려워진 상황이라는 게 기후를 이야기하는 많은 분들의 공통적인 이야기입니다. 꽃 피고 단풍 드는 나무들의 살림살이도 이처럼 붕괴한 기후 앞에서 앞날의 사정을 예측하기 어려운 겁니다. ‘치명적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듯했던 팜파스그라스의 초라한 가을 개화 앞에서는 참 많은 생각들이 오갑니다.

  힘겨운 날들을 보내야 했던 화살나무 단풍이 그래서 더 애처롭게 느껴졌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가을 숲을 찾을 때마다 화살나무 단풍부터 찾아보려 했던 게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 생명의 안간힘을 떠올려야 한 때문이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으로 피워올린 화살나무의 핏빛 단풍이 더 치열하게 바라보였던 것은 나무가 살아가는 이곳, 이 땅의 사정이 더 힘겨운 때문일 겁니다. 생각이 앞선 때문이었는지, 가을 풍경이 예전만 못하게 눈에 들어왔어도 화살나무의 붉은 핏빛만큼은 더 찬란하고 화려하게 여겨졌습니다. 그게 더 서글펐습니다.

  차가운 비, 세찬 바람 맞으며 이제 화살나무도 애면글면 잎을 떨구겠지요. 벌써부터 화살나무는 핏빛 붉은 잎과 헤어지기 위해 나뭇가지와 잎을 잇는 잎자루 안쪽의 물관 안에 떨켜층을 짓고 키웠습니다. 미세한 조직인 떨켜층을 나무로부터 잎이 떨어져나가기 위한 채비라는 뜻에서 ‘탈리대(脫離帶)’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단풍 빛깔이 짙어졌다는 건 바로 그 탈리대가 클 만큼 컸다는 이야기이고, 그 신호로 나뭇잎의 엽록소가 비활성화하면서 단풍 빛깔이 오른 것이니까요. 이제 미련없이 잎을 떠나 보내고 겨울을 잘 나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다시 다가올 내년에도 어김없이 여름 지나면 은행나무 잎은 노랗게 물들고, 단풍나무는 빨간 빛을 드러내겠지요. 가을 풍경을 수놓을 국화 종류의 꽃들도 활짝 피어나겠지요. 내년에는 단풍 사정이 어떠할지 가을 꽃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날지 지금은 누구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지금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둔 이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 우리 곁에서 더 이상 사그러들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지요. 그게 지금 나무 앞에 서서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여름 물러갈 즈음이면 언제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진다이개미취’ 꽃이 다음 가을에도 지금 못지 않게 화려하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을에 이토록 아름다운 꽃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더 오래 지켜내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더 세심하게 찾아야 하겠습니다.

  비바람 다녀가시는 이번 주부터는 날씨가 매우 추워진다는 게 지금의 일기예보입니다. 환절기 독감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우리가 건강해야 우리 사는 우리의 환경을 지킬 수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게 이 계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년 11월 6일 월요일 아침에 1,204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