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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식 추기경이 밝히고 이종상 화백이 그려낸 ‘순교의 빛’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6. 5. 15:55

유흥식 추기경이 밝히고 이종상 화백이 그려낸 ‘순교의 빛’

[장재선 선임기자의 예술 순례]

문화일보입력 2022-09-13 09:05업데이트 2022-12-22 22:56

 충남 당진 신리성지의 순교미술관 ‘하늘전망대’에서 관람객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장재선 선임기자



■ 장재선 선임기자의 예술 순례 - (5) 당진 신리성지 순교미술관

대전교구장 지낸 兪추기경
지역 순교史 알리는데 앞장

2017년 성지에 미술관 개관
노출콘크리트 기법 등 통해
내포 간척지 갯벌 색감 표현
로마 지하묘지 기린 전시장엔
李화백 1000호 대작 등 눈길

꼭대기 ‘하늘 전망대’ 오르면
주교관 재현 초가 등 한눈에




충남 당진 신리성지(新里聖地)로 가는 길에 속된 생각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신리성지가 속해 있는 대전교구 주교였던 유흥식 추기경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작년 6월 교황청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주교에서 대주교로 승급했고, 지난 8월 추기경에 서임됐다. 세속으로 치면 초고속 승격인 셈이다. 그런데 그는 주교로 18년간이나 봉직했다. 주교 서품을 함께 받은 동료 사제가 대주교가 되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제 역전이 된 셈인가. 이는 미욱한 속세인의 생각일 것이다. 그는 교황청 직원들이 장관이라는 직책 대신 ‘돈 라자로(Don Lazzaro·라자로 신부님)’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제다. 직위를 따지지 않고 그저 하느님이 주신 자신의 소임에 충실히 따를 뿐이다.

그는 서임식 후 “죽을 각오로 추기경직에 임하겠다”고 했다. 사제가 서품 때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관례에 따른 것이지만, 순교자가 많은 지역의 교구장을 오래한 그였기에 남다르게 들렸다. 그가 주교로 관할한 대전교구는 갈매못, 공세리, 배나드리, 삽티, 서짓골, 성거산, 해미, 황새바위 등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이들을 기리는 성지가 많은 곳이다. 특히 당진의 솔뫼성지는 성(聖)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로,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면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유 주교가 교황 방문의 매개 역을 했음은 불문가지다. 그는 교구장 직을 수행하는 내내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지역의 순교 역사를 높이 드러내는 일에 힘썼다. 신리성지 조성과 성지 내 순교미술관 건립도 그의 재임 시절에 이뤄졌다.

“어떻게 거그를 알고 찾아가셨어요?” 순교미술관에 작품을 봉헌한 이종상 작가의 말처럼 신리성지는 유명한 곳은 아니다. 널따란 초지의 시원한 풍광과 독특한 미감의 건축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고 있으나 아직 방문객이 많지 않다.

당진 합덕읍에 속한 신리는 삽교천 상류에 자리한 마을이다. 주변 평야를 내포(內浦)로 일컫는 데서 알 수 있듯 조선시대엔 밀물 때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이 지역의 가톨릭 역사는 1784년 여사울(예산 신암면) 출신의 이존창이 서울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시작했다. 주민 사이에 복음이 빠르게 퍼지면서 내포 교우촌(校友村)이 형성됐다. 거기에는 신분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차별을 받던 내포 사람들의 동질성이 크게 작용했다. 수로와 육로가 연결되는 지점이어서 지역민들이 외부의 사상과 종교에 개방적이었던 것도 신앙공동체가 뿌리내린 이유였다. 1865년부터 신리에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주했고, 내포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입국하는 통로가 됐다.

 이종상 작가의 순교 기록화를 소녀들이 살펴보는 장면.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가 1845년 강경 황산포구를 통해 입국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장재선 선임기자



기록에 남아 있는 신리의 첫 순교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다.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와 인근 교우촌에 있던 오메르트, 위앵 신부와 황석두(루카) 복사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다블뤼 주교에게 주교관으로 쓰라고 생가를 내줬던 손자선(토마스)도 배교(背敎)를 거부하고 순교한다. 이후 40여 명이 꿋꿋이 같은 길을 간 것으로 순교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무명의 순교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리성지의 초지에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방한 때 시성된 다섯 성인(다블뤼·오메르트·위앵·황석두·손자선)의 야외 경당이 있다. 거기에 적힌 손자선 성인의 말은 피를 흘려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마음을 절절히 대변한다. “나는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죽는 것보다 몇천 배 더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시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지난 2017년 성지에 개관한 순교미술관은 총 6층 높이로 지어졌다. 김원 건축가의 설계작으로, 노출콘크리트 기법을 통해 내포 간척지 갯벌의 색감을 표현했다. 로마 초대교회의 카타콤(기독교인 지하무덤)을 기리기 위해 지하에 전시장을 뒀고, 계단의 벽면에 돌을 넣어서 우둘투둘한 질감을 강조했다.

전시장엔 신리의 성인 영정화 5점과 당시 신자들의 신앙과 삶을 그린 순교기록화 13점이 걸려 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이종상 작가의 작품들이다. 그림을 보면 그 규모에 우선 압도된다. 장지(壯紙)에 수묵담채로 그린 기록화가 모두 1000호(480×228㎝)짜리다. 이 대작들을 완성하기 위해 이 작가는 아내(성순득·동양화가), 아들(이도수·설치미술가 겸 목공예가)과 함께 작업했다. 제자인 이재진, 최원석 씨도 도왔다.

“다른 일은 하지 않은 채 그 작업에만 전념했는데 4년이 걸렸어요. 워낙 큰 그림인데다가 공이 많이 들어가는 전통 채색화 장지기법으로 그렸으니까요.”

그의 그림은 세상의 갖은 고난과 유혹을 떨치며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동시에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 오늘에 다다른 종교가 세상에 어떤 사랑을 전해야 하는지도 성찰하도록 이끈다.

전시장을 나와 맨 꼭대기 층의 ‘하늘 전망대’에 오르니 눈이 환해졌다.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을 재현한 초가, 미사를 보는 성당, 성인들의 경당 등 성지의 모든 것이 내려다보였다. 포구였다가 평야로 변한 내포 들녘도 한눈에 들어왔다.

미술관을 나와 회랑을 걸어가면 그 끝에 성지 사무실이 있다. 두 명의 수녀가 성지 관련 사무를 보는데, 소녀처럼 쾌활한 말투여서 듣는 이의 마음도 밝아졌다. “합덕읍에서 오는 버스가 하루 9차례 있으나,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어 택시로 이동하거나 자가용으로 와야 합니다.”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마저 성지에서 일하는 기쁨이 묻어있었다. 두 분은 모든 질문에 싹싹하게 답하면서도 “기사에 이름은 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무명으로 봉사하는 게 수녀의 바른 자세라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미술관 안내 책자를 사려는데, 지갑에서 5만 원권을 잘못 꺼냈기에 슬며시 집어넣고 5000원권을 찾아서 다시 내밀었다. 다소 민망한 상황에서 문득 5000원권의 이율곡과 5만 원권 신사임당 영정을 그린 이가 이종상 작가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 이야기를 하니 수녀 중 한 분이 “오, 그러네요”라며 고개를 끄덕거려 줬다.

수녀들의 안내에 따라 성지 내 카페에서 김동겸 주임신부를 만났다. 양곡창고를 개조해 만든 카페 ‘치타 누오바(Citta′ Nuova)’는 이탈리아어로 ‘새로운 도시’, 즉 신리(新里)를 뜻한다고 했다. 여기서 김 신부는 사제복 차림으로 직원들과 함께 쉼 없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9년 전 이곳에 부임한 그는 전임 김성태 신부와 함께 성지를 정비하고 순교미술관을 꾸리는 데 헌신했다. 40대 중반이라니 젊음의 마지막 시기를 오롯이 바친 셈이다.

그에게 성지를 찾는 이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신앙인이든 아니든, 시원한 풍경에서 편안함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공간 배치를 눈에 걸리지 않게 한 것은 도시의 삶에 지친 분들에게 평안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지난 2017년 순교미술관 개관식에서 유흥식(왼쪽) 당시 대전교구장이 이종상 작가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천주교대전교구 홈페이지



■ 이종상 화백이 체험한 ‘이적’
“딸 유골 뿌린 곳서 무지개 빛기둥… 날 신앙으로 이끌어”


이종상 작가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녔다. 산수풍경을 실제로 답사한 후 그리는 진경(眞景)을 고집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그가 신의 존재를 믿게 된 것은 이적(異蹟)을 체험해서였다. 서울대 미대에 다녔던 둘째 딸이 어린 시절 사고 후유증으로 갓 스무 살에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아내와 함께 병석을 지켰는데, 하필 제가 대학 강의를 나간 날에 아이가 떠났어요. 몸이 아파도 아버지 차를 타지 않고 제힘으로 등교하던 딸이었지요.”

결백한 딸 아이의 성정에 맞게 유골을 사람들이 없는 곳에 뿌리고 싶어 한탄강 깊은 골짜기로 갔다. 꽁꽁 언 얼음 구멍 안으로 유골 가루를 조심스레 뿌리고 돌아가다가 그곳을 돌아봤는데, 거기서 갑자기 무지개 빛기둥이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일행 중 다섯 명이 그걸 봤다. 딸이 하느님 곁으로 갔다는 확신이 든 그는 가톨릭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왔다.

신리성지의 순교미술관에 그림을 봉헌한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이적을 만난 덕분이다. “아내와 대모(代母·세례성사 후견인)께서 어느 지역으로 봉사를 함께 다닌다고 하더군요. 대모께서는 그곳 성당 건축을 후원했다고도 하고요. 그곳이 어딘지 궁금해서 한 번 가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함께 나섰는데 자꾸 제 고향 쪽으로 가더니 결국 신리가 나오더군요. 아내가 어떻게 여기를 다녔나, 하고 놀랐지요.”

그가 태어난 예산의 동네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당진의 경계 마을이 신리였다. “제가 어려서 잘못한 일이 있으면, 천주교 신자셨던 어머니께서 ‘400명이나 순교자가 있는 신리를 내려다보고 놀면서 어떻게 의젓잖은 짓을 하느냐’고 혼내셨지요.”

그런 인연이 있는 신리성지의 신부가 미술관의 그림을 요청하자, 그는 기꺼이 응했다. 평소 우리나라에 순교미술관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왔기에 온 힘을 다해 대작을 완성해 봉헌했다.

이 작가는 순교미술관 개관식에서 유흥식 당시 대전교구장이 자신을 깊게 껴안았던 것을 되돌아봤다. “갑자기 포옹하셔서 놀랐지요(웃음). 그 이후로 가끔 전화 통화를 했는데, 교황청에까지 불려가셔서 큰일을 하시니 참 좋습니다.”

올해 84세의 이 작가는 평창동 자택 근처의 화실에서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해야지요.”


■ Tip - 전통 채색화 장지기법이란

1970년대까지 한국의 미술대학은 대부분 전통 채색기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중국, 일본에 비견할 만한 우리 채색화가 없다는 시각에서였다. 고구려 벽화, 고려 불화, 조선 궁중화로 이어져 온 맥을 소홀히 여긴 탓이었다. 우리 그림의 미학을 역사적으로 탐구한 이들은 고유의 회화 양식을 찾아 한국화의 정체성을 되살려냈다. 이종상 작가가 명명한 장지기법이 대표적이다. 견고한 종이인 장지에 겹겹의 색을 칠함으로써 밑에 칠한 빛이 위로 우러나와 깊은 색감을 발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겹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겹의 미학’이고, 색층이 단절되지 않고 어우러지니 ‘통섭의 예술’이다. 신리 성지 순교미술관의 그림들에서 우리 전통 미학의 고갱이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