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200년 전 서유구의 ‘한강팔경’은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서울이 나라의 수도가 된 지 600년, 백제 때부터 따지자면 2000년이 됐다는 얘기는, 그 사이에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의 정경을 노래하고 찬탄해 왔다는 얘기와도 통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암 박지원은 누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배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기슭에서 강 건너편 산들의 꿈결같은 모습을 슬픔 속에서 묘사하는데, 연암이 서서 망연히 떠나가던 배를 바라보던 그곳은 지금의 동호대교와 성수대교 사이쯤 됩니다.
선인들이 아꼈던 옛 한강의 경치는 과연 지금은 어떻게 돼 있을까요? 인걸은 간데 없어도 산천만은 의구한 것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가끔 지방으로 갔다가 서울로 들어와 올림픽대로를 달릴 때면, 서울은 익명의 공간에 새로 지어진 메트로폴리스일 뿐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그렇다면 다시 조선시대의 한양과 한강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은 예로부터 수많은 문인들이 소재로 삼은 아름다운 강으로 유명했습니다. ‘서강팔경(西江八景=마포팔경)’이나 ‘용산팔경(龍山八景)’처럼 한강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치들을 열거하는 말들도 생겨났습니다.
여러 해 전 서울대 국문학과 이종묵 교수가 한강을 소재로 했던 ‘팔경’의 새로운 리스트를 발굴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농학서 ‘임원경제지’의 저자로 유명한 서유구(1764~1845)가 쓴 ‘부용강집승시서(芙容江集勝詩序)’로, 그의 시문집인 ‘풍석전집(楓石全集)’에 수록돼 있다는 것이죠.

이 교수는 “이 ‘팔경’은 ‘한강팔경’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고 말했다. 서유구는 지금의 밤섬 근처인 농암(籠巖)에 살았고, 그의 ‘한강팔경’은 바로 여기서 바라본 강남과 강북의 아름다운 풍경들입니다. 200년 전 그곳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그걸 한번 지금의 지도에 겹쳐 봤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강의 모습과 정취는 크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천주타운(天柱朶雲): 관악산 봉우리에 휘늘어진 구름
“새벽에 일어나 바라보면 한 무더기 흰 구름이 아득하게 봉우리 정상에 피어 오르고, 조금 있노라면 향기로운 연기가 자욱해지고 빼곡하게 에워싸 무성해진다. 산허리에서부터 윗부분은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고 다시 조금 더 있으면 꽃송이처럼 날려 다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봉우리가 훤하게 하늘에 기대어 우뚝 솟아난 모습만 보인다.” ‘천주봉’은 관악산 정상을 일컫는 옛 이름으로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입니다.
② 검단문하(黔丹紋霞): 검단산의 무늬같은 노을
“검단산 산 빛이 깨끗하게 목욕을 한 듯 쪽빛 같다. 얼룩얼룩한 노을에 반쯤 덮인 채 위에 쪽을 짓 듯 검은 머리가 몇 점 드러난다. 막 아침햇살이 엷게 비치면 오색 비단에 무늬를 넣은 듯하다.” ‘관악산에서 서쪽으로 구불구불 치달았다 다시 솟구쳐 일어나서 산이 된 것’이라고 묘사된 ‘검단산’이란 지금 금천구 시흥동 일대에 있는 호암산입니다.
③ 율서어증(栗嶼魚증(買에서 貝대신 曾)): 밤섬의 고기잡이 그물
“강 한 가운데 느른하게 누워 섬이 된 것이 있는데 밤섬이라 한다. 온갖 소리가 고요하고 물결이 맑은데 이슬이 물을 덮고 있다. 물고기를 잡는 그물은 대부분 밤섬의 물가에 있다.”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밤섬은 여의도와 마포 사이 서강대교 아래에 남아 있습니다. 원래 ‘작은 해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었다고 합니다. 1967년까지 62세대가 살면서 고기잡이 등에 종사했지만 1968년 여의도 개발 당시 한강의 흐름을 좋게 하려는 목적으로 폭파 해체한 뒤로 섬 대부분이 사라졌죠. 이제 이곳의 고기잡이 그물은 상상으로 즐길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
④ 만천해등(蔓川蟹燈): 덩굴내의 게잡이 불빛
“밤섬을 마주하고 물길이 구불구불 돌아나가 지류가 된 것을 만천이라 한다. 게잡이 등불은 대부분 만천의 포구에 있다. 짚불이 점점이 있어 듬성듬성 별이 떠 있는 듯하다. 가는 배들의 삐걱삐걱 소리가 어부들의 노랫가락과 서로 답을 한다.” 만천은 만초천(蔓草川)이라고 하는데 ‘덩굴내’의 한자식 표기라고 알려졌습니다. 모악산(안산) 부근에서 발원해 청파(靑坡) 남쪽의 주교(舟橋·배다리)를 지나 원효대교 북단쯤에 닿는 한강의 지류였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복개돼 아스팔트 밑에 있으며 그 위에 들어선 상가가 용산전자상가입니다. 멀리서 상가의 불빛을 보고 뻘에다 등불을 켜 놓고 게를 잡던 옛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모르겠습니다.

⑤ 오탄첩장(烏灘疊檣): 까마귀 여울의 겹쳐진 돛대
“강의 아래쪽을 오탄이라 한다. 봄날 얼음이 반쯤 녹으면 조운선(화물선)이 다 몰려든다. 멀리서 바라보면 천 척의 배 돛대가 은은한 엷은 노을과 푸른 물빛 사이로 빼곡하게 소 있다.” ‘오탄’이란 지명은 현재 그 존재조차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밤섬보다 하류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양화동이나 염창동 일대가 아닌가 추측될 뿐입니다.
⑥ 노량요정(露梁遙艇): 노량진의 흔들리는 조각배
“강의 위쪽을 노량이라 한다. 때마침 장맛비가 내리면 드넓은 강물이 느릿느릿 흘러가고 조각배(편정·片艇)가 물 위에 떠 흔들흔들 가는 듯도 하고 오는 듯도 하다.” 노량진은 여전히 지명으로 남아 있지만, 이곳 나루에서 둥실둥실 떠 가던 조각배들의 모습은 간 곳 없게 됐습니다.
⑦ 곡원금곡(곡(木+角+斗)園錦곡(穀에서 禾대신 실사변)): 비단 명주같은 떡갈나무 동산
“강 북쪽 기슭이 마포다. 고개에 떡갈나무 수십 그루가 있어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이 늙어 울긋불긋한 빛이 뒤섞여 흐드러진 모습이 마치 촉(蜀)나라 땅에서 나는 비단으로 나무에 옷을 입혀놓은 듯하다.” ‘마포의 떡갈나무 고개’ 역시 지금은 확인이 어렵게 됐습니다.
⑧ 맥평옥설(麥坪玉屑): 보리 심은 들판에 떨어지는 싸락눈
“동쪽 물가를 사촌평(沙村坪)이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보리와 밀을 파종하는데 이삭이 막 패기 시작할 때 싸락눈이 갓 내리면 찬란한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옥이 이끼 위에 떨어지는 듯하다.” 옥설(玉屑)이란 ‘옥 가루’라는 뜻으로 싸락눈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입니다. ‘사평’은 동작의 동쪽에 있던 마을임이 옛 지도에서 확인되지만 오랫동안 잊혀진 지명이었는데, 지하철 9호선 ‘사평역’이 서초구 반포동에 생겨남으로써 극적으로 부활했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유석재의 돌발史전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page.stib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