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정말 좋다” 망각의 늪에서 건져낸 괴짜 화가 원계홍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화제
화가 원계홍을 망각에서 끌어올린 두 소장가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왼쪽)과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이 과거 원계홍의 집이었던 김 학장의 자택에서 원계홍의 그림과 함께 서있다. 최영재 기자
멋진 집이다. 크고 화려해서가 아니다. 거실 북쪽 창문을 내다보면 탁 트인 시야에 알록달록한 지붕의 집들이 내려다 보이고 그 너머로 청보라빛과 회백색으로 빛나는 수려한 북한산 산등성이가 마주 보인다. 눈을 돌려 거실 서쪽 벽을 향하면 바로 그 산등성이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볼수록 색채와 구도가 오묘하고 독특한 매력이 넘친다. 그 옆에 걸린 장미 정물화와 골목길 풍경화도 마찬가지다.
BTS RM 등 MZ세대도 호평
이 그림들은 거의 잊혀졌다가 지금 재조명 받고 있는 화가 원계홍(1923-1980)의 작품이며, 이 집은 그가 생전에 살며 그림을 그리던, 한양도성(서울성곽) 근처 부암동 집이다. 그리고 지금은, 부동산업자에게 이끌려 매물로 나온 이 집을 보러 왔다가 집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원계홍의 그림에 한눈에 반해서, 다른 큰 아파트를 살 돈으로 이 집과 그림을 한꺼번에 덥석 사 버린 컬렉터가 30여년째 거주하는 집이기도 하다.
서울 성곡미술관에서 5월 21일까지 열리고 있는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큰 화제다. “이런 화가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림이 정말 좋다.” “에드워드 호퍼의 느낌이 있는데 또 다르다.” “골목 풍경 연작으로 풍경화가 구성적일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고 무엇보다도 회색 톤의 색채가 정말 마음에 든다.” 이런 호평이 인스타그램과 네이버 블로그 등에 속속 올라오고 있다. 방탄소년단(BTS) 리더 RM도 전시장을 방문해 찍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렸다. 그 뒤로 젊은 세대를 포함한 방문객이 더욱 늘어 평일 낮에도 전시장이 북적거린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
성곡미술관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전시 중인 원계홍의 ‘회현동’ (1979) [사진 성곡미술관]
성곡미술관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전시 중인 원계홍의 '북한산'(연도 미상) [사진 성곡미술관]
성곡미술관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전시 중인 원계홍의 작품 [사진 성곡미술관]
원계홍을 망각의 늪에서 건져낸 사람들은, 그림이 좋아 그의 집까지 산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과 ‘원계홍 미술관’을 꿈꾸며 그의 그림을 모으고 그림 달력을 만들어 최초로 대중에게 알린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크라운제과 창업주의 4남)이다. 돈 될 그림을 사서 차익을 남기고 파는 ‘아트테크’와는 담을 쌓은 채, 거의 잊혀진 화가 원계홍의 그림을 순수한 팬심으로 수십년 지킨 그들이 이번 100주년 전시도 기획했다. 이 두 소장가를 중앙SUNDAY가 원계홍의 집이자 작업실이었으며 지금은 김 전 교수의 자택인 부암동 주택에서 만났다.
거실의 큰 남향 창으로는 한양도성이, 북쪽 창으로는 북한산이, 서쪽 안방 창으로는 인왕산이 보이는 명당 집. 그 안방에는 성곡미술관 전시에 65점의 그림을 내보내고 또 집 여기저기에 걸린 그림을 제외하고도 남은 원계홍의 그림들이 보관돼 있다.
화가 원계홍을 망각에서 끌어올린 두 소장가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왼쪽)과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이 과거 원계홍의 집이었던 김 학장의 자택에 함께 앉아있다. 최영재 기자
김 전 교수는 말한다. “1989년에 복덕방 주인에게 이끌려 이 집을 보러 왔을 때는 문간방에 작품이 가득 쌓여 있었지요. 몇 점을 보니 좋더라고요. ‘집보다 그림이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원 화백 부인 민 여사께서 반색을 하시며 작품 사진을 빌려줄 테니 더 보라고 노란 봉투에 가득 담아 주셨어요. 알고 보니 주명덕 선생(한국의 대표적인 사진작가)이 찍은 것이었어요. 밤새도록 사진을 보는데 볼수록 ‘이야, 한국에 이런 화가가 있었나’하는 느낌, 국전에서 본 어르신들 그림하고는 다른 거야. 결국 큰 아파트로 옮겨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 집과 그림 200여 점을 함께 샀지요.”
그런 결정에 부인이 반대하지는 않았을까. 그는 답했다. “원래 날 잘 믿어주어서 큰 반발이 없었고, 특히 그림을 보고는 ‘아, 이거 달력에서 봤던 건데 좋네’라고 하더군요. 그때는 아직 윤 회장님을 만나기 전인데 그때부터 (달력을 만드신) 윤 회장님의 덕을 봤습니다. 하하.”
성곡미술관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전시 중인 원계홍의 '수색역’(1979) [사진 성곡미술관]
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1984년 공창화랑에서 열린 원 화백 유작전에 가서 작품을 보고 며칠 연속으로 다시 가서 보며 눈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었습니다. ‘이 분 작품은 함부로 흩어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5일 만에 화백의 부인을 찾아 뵈었죠. 그때 먼저 세 점을 사고 그 뒤로 좀 더 사다가 유작전이 끝난 후에 제안을 드렸어요. 작품을 다 구입해서 원계홍 미술관을 만들고 싶다고. (당시에는 작품 정리가 끝나지 않아 오십여 점만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부인께서 부군의 흔적인 그림을 모두 떠나 보내는 것을 꺼리셔서, 찬성하셨다가 철회하셨다가를 반복하셨어요. 그러다가 서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도 대표직(크라운제과)을 맡으며 바빠져서 신경을 쓰지 못했지요. 한편 당시에 원 화백 그림으로 크라운베이커리 달력을 만들었는데, 그게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그 뒤로도 윤 회장은 화랑과 미술 경매에서 원계홍의 그림을 찾는 대로 사들였다. 이번 성곡미술관 전시에 나온 그의 소장 그림은 18점이다. 윤 회장은 언젠가 장안평 고미술상가에서 원계홍 그림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프레임도 없이 수백 점 그림이 LP판처럼 쌓여 있는데 그 사이에 원 화백 그림이 끼어 있었어요. 그때 느낌이 참 슬펐습니다.” 만약 윤·김 두 소장가가 아니었다면 원계홍의 그림들이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 뻔했다”는 이수균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의 말이 실감 나는 에피소드다.
진정한 예술 후원 컬렉팅 보여줘
성곡미술관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전시 중인 원계홍의 ‘성북동 풍경 (산동네)’ (1977) [사진 문소영]
그런데 왜 원계홍은 그토록 잊혀지고 저평가 되었을까? 지금은 두 소장가는 물론 RM 같은 MZ세대 미술애호가들이 열광할 정도로, 원계홍 그림은 동시대 젊은 작가의 작품이라 해도 믿길 만큼 생기가 있으면서 세련되었고, 그렇다고 가볍지 않다. 대부분의 풍경이 ‘회현동,’ ‘수색역,’ ‘장충동 1가 뒷골목,’ ‘청운동 산동네’ 등 1970년대 서울의 실제 풍경을 그린 것이라 역사적 가치도 있다. 게다가 그는 사진작가 주명덕,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이경성(1919-2009) 등 내로라 하는 미술계 인사들과도 친했다. 그런데도 잊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 소장가와 이 학예연구실장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다. 원계홍은 부유한 명문가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미술에 빠져 일본의 중요 화가 이노쿠마 겐이치로(1902-1993)의 사설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다. 끝없이 미술 이론과 철학 책을 탐독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데 골몰했고, 그것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남들한테 보여주기를 거부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한 번은 그동안 그렸던 작품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려 55세까지 개인전을 열지 않았고, 마침내 스스로에게 만족할 만한 개인전을 두 차례 연 후 본격적으로 대외활동을 하려던 57세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한 때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았던 것이다.
성곡미술관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전시 중인 원계홍의 '청운동 산동네' (1979) [사진 문소영]
성곡미술관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전시 중인 원계홍의 '빨간 건물'(197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품 [사진 문소영]
성곡미술관 '그 너머-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전시 중인 원계홍의 '골목(까치집)'(1979) [사진 성곡미술관]
김 전 교수는 전시 소감으로 이렇게 썼다. ‘그는 부친의 뜻에 반하여 화가의 길로 갔다. (…) 비타협적인 성격에 마지막까지도 부친이 남겨준 부천 과수원을 팔아서 살아야 했던 콘텍스트 속에서 그가 갈 곳은 오직 한 길,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인적(人跡)없는 새벽에 화구를 메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그렸다.’
또 윤 회장은 이렇게 썼다. ‘선생은 수색역(水色驛)을 그린 작품을 두 점 남겼다. (…) 선생의 대표작이라고 생각되는 두 번째 작품은 ‘여러 요소의 죽은 결합은 폐기되어’ 불필요한 것들이 사라진 적멸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 고요하나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어떻게 만나 의기투합하게 되었을까? 윤 회장은 말했다. “가끔씩 원 화백에 대한 글을 검색해 보는데 너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쯤이었나, 모처럼 그를 소개한 블로그 글을 보고 거기에 반가워서 소장자임을 밝히는 댓글을 달았죠. 그 댓글에 자신의 집에도 작품이 있다는 대댓글이 달린 거예요. 바로 김 선생 따님이었죠. 그래서 연락이 닿았고 제가 바로 이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두 소장가는 계속 교류하며 원계홍의 예술세계를 탐구하다가 이렇게 미술관 전시를 일으켜 그를 전혀 몰랐던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미술작품을 금융상품처럼 단타매매하는 ‘아트테크’의 시대에 진정한 예술 후원자로서의 컬렉팅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문소영 문화전문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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