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탑… 삼장법사·손오공 조각돼 있죠
원각사지 10층 석탑
지난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4주년이 되는 날이에요.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들은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죠.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고요. 탑골공원이 지금처럼 불린 것은 1992년 이후의 일이고, 예전에는 탑(塔)을 뜻하는 영어 단어 '파고다(pagoda)'를 따서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어요. 지금 이곳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절의 창건(創建) 내력을 적은 비석이 남아 있죠. 원각사가 어떤 절이고, 석탑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좀 더 알아볼까요.
세조가 세운 정치적 상징물
원각사(圓覺寺)는 고려 때 흥복사(興福寺)라 불리던 절이 있던 곳으로, 조선 전기에 국왕이 주도해서 만든 유일한 사찰이에요. 1464년 세조는 한양 도심에 대규모 사찰을 세우도록 했고, 1467년에는 대리석으로 거대한 탑을 만들었어요. 조선은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배함) 정책을 추진했어요. 새로운 도성인 한양을 건설하면서 4대문 안에는 원칙적으로 불교 사원을 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죠. 하지만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재위 1455~1468)가 즉위 10년을 기념하는 정치적 상징물로 원각사와 거대한 탑을 세운 거예요.
이후 원각사는 국왕이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하는 장소였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 장마가 계속되면 비가 멎기를 빌던 기청제(祈晴祭)를 드리는 장소이기도 했어요. 또 명(明)과 일본 사신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어요. 명나라 사신들은 자주 원각사를 찾아 향을 피우며 부처에게 예를 다하고 많은 재물을 시주했어요. 일본 사신들은 원각사 석탑이 천하의 최고라고 들었다며 별도로 관람을 요청하기도 했대요.
그러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 한양 도성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원각사 석탑은 유교적 세계관이 구현된 한양의 경관을 해치는 건축물로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이었어요. 세조가 죽은 뒤 이러한 원각사의 운명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어요. 1504년 연산군은 원각사에서 모든 승려를 내쫓고, 이듬해 장악원(掌樂院·궁중의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을 이곳으로 옮겨버렸죠. 이때부터 원각사에서 사찰의 기능은 사라지게 됐어요. 더 시간이 흐르면서 원각사 석탑과 비석을 제외한 목조 건물들은 무너지거나 철거됐죠.
1919년 3·1운동 당시 원각사 석탑은 가장 상층부 세 층이 없는 상태였는데요. 여러 속설이 있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상층부 세 층을 가져가려고 내렸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죠. 현재와 같은 모습은 1946년 미군이 가장 위쪽 지붕돌을 복원하여 완성한 것이에요.
흉물에서 한양의 랜드마크로
원각사는 없어졌지만 석탑과 비석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여전히 한양 도심에 굳건하게 서 있었어요. 원각사지 석탑은 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석탑이라 '백탑(白塔)'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유학자들에게는 끝까지 유교적 이념이 구현돼야 할 한양의 경관을 해치는 '비미(非美·아름답지 못함)'한 존재로 인식됐어요.
유학자들의 부정적 인식은 1880년대 문화 개방과 함께 들어온 서양인들에 의해 완전히 바뀌어요. 그들은 인구 25만명이 거주하는 한성 도심에 백색 석탑이 홀로 솟아 있는 기이한 경관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어요. 원각사 석탑은 더는 흉물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양의 유일한 볼거리로 유명해졌어요.
서양의 이방인들은 원각사지 석탑을 카메라로 촬영하거나 그림으로 묘사했고, 자신들이 듣고 본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어요. 예를 들어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저술한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직접 촬영한 석탑 사진을 남겼고, 영국의 유명한 여류 여행가 이저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 Bishop)은 4차례나 조선을 방문해 "원각사 석탑이 원래 13층이었는데 제일 상층부 세 층이 300년 전 일본의 침략(임진왜란)으로 석탑 옆에 내려졌다"는 당시 소문을 기록으로 남겼어요.
사실 원각사지 석탑은 그보다 약 120년 전인 1348년 만들어진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대리석으로 만든 8각형 석탑으로, 층마다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장면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어요. 경천사지 석탑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받아서 만들어졌고, 원각사지 석탑은 경천사지 석탑을 본떠 만든 거예요.
그런데 원각사지 석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어요. 가장 아래쪽에 자리한 기단부에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 서유기(西遊記)의 인물들이 조각됐다는 점이죠. 원각사지 석탑의 서유기 장면은 대중에게 친숙한 이야기를 활용해서 불교라는 종교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한 사례라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원각사지 석탑은 몇 층일까요? 일반적으로 탑의 층수를 셀 때는 기단부(基壇部)와 상륜부(相輪部·원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는 탑의 꼭대기 부분)를 제외하고 몸돌과 지붕돌을 합쳐 1층으로 셉니다. 이렇게 보면 이 석탑은 탑을 받쳐주는 3층의 기단 위에 10층의 탑신부(塔身部·탑의 기단과 상륜 사이, 탑의 몸에 해당하는 부분)를 가진 10층 석탑이라 할 수 있어요. 그 때문에 보물로 지정된 이 석탑의 공식 명칭도 '원각사지 10층 석탑'이에요.
그러나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원각사 비석에는 이 탑을 13층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또 조선 시대에 이 탑의 모델이 된 경천사지 석탑을 10층이 아닌 13층으로 서술한 기록이 남아 있죠. 그래서 이 탑을 '13층'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요. 불교에서는 '13층'을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단계로 보고, 13을 매우 특별하면서도 신성한 숫자로 여기고 있죠. 현재 탑의 층수를 세는 방식처럼 10층으로 보는 것이 좋을지, 그것을 건립한 사람들 의도처럼 13층으로 보는 것이 좋을지는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