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몽골의 고려 침략 때 500개 만들어 적 물리치길 기원했죠
고려·조선의 나한상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이달 26일까지 "깨달은 수행자, 나한(羅漢): 전라도와 강원도 나한의 만남" 특별전을 열고 있어요. '나한'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을 다해 수행하여, 마침내 아무 괴로움도 없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부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근엄한 표정이나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한 부처나 보살과 달리, 나한상들은 훨씬 더 인간적이고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줘요.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어떤 재미난 나한상들이 발견됐는지 좀 더 알아볼까요.
참된 수행으로 최고 경지에 오른 나한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까요, 아니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강인한 존재일까요? 인간은 신에게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수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나한에서 찾고 있어요. 나한은 인간이 수행을 통해 오를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 중 가장 높은 곳까지 이른 성자(聖者)들로, 일찍부터 선망의 대상이자 숭배의 대상이었어요.
나한은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 '아르핫(Arhat)'에서 온 말이에요. 존경할 만한 자 또는 번뇌를 없애는 자를 뜻하는 '아르핫'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한자어가 '아라한(阿羅漢)'이며, 그 줄인 말이 '나한'이에요. 불교에서는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고 나한의 경지에 오르면 보통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갖가지 신통력을 가진다고 믿었어요.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은 하늘을 날거나 변신술을 쓸 수 있고, 수명을 연장하거나 천지를 움직일 수 있죠.
나한은 주로 십육나한, 십팔나한, 오백나한처럼 무리를 지어 함께 숭배됐어요. 십육나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16명의 뛰어난 제자를 가리키며, 십팔나한으로 확장되기도 했어요. 오백나한은 말 그대로 500명의 아라한을 뜻해요. '500'이라는 숫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오백나한은 나한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을 총망라하여 그 힘을 극대화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백나한 신앙은 중국 당나라 말기인 9~10세기 무렵부터 성행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유행했어요.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나한 신앙과 나한상에 관심이 컸어요. 국가가 나서서 외침이나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자주 나한재(羅漢齋·나한을 신앙 대상으로 한 불교 의식의 하나)를 열었으며, 오백나한의 조각상과 불화를 제작했어요. 특히 몽골이 고려를 침입한 무렵에는 오백나한 신앙이 절정에 달했는데요. 팔만대장경을 제작하여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처럼, 오백나한도를 만들어 그 신통력으로 적을 물리쳐서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했어요.
500가지 표정을 가진 창령사터 오백나한
나한을 표현한 조각상이나 그림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부처나 보살과 달리 작가의 의도나 개성이 훨씬 더 잘 드러나는 특징이 있어요. 특히 영월 창령사터에서 발견된 오백나한상은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것이 공존하며 때론 그 경계를 넘나드는 나한의 속성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조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어요.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깊은 산속에 자리한 창령사터는 2001년 5월, 작은 암자를 지으려고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나한상 파편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어요. 당시 발굴에서는 형태가 온전한 나한상 64점과 나한상의 머리 118점, 나한상의 신체 일부 135점 등 총 317점이 발견됐는데요. 한곳에서 이처럼 많은 불교 조각상이 발견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에요.
이듬해 발굴에서는 '창령(蒼嶺)'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을 찾아내 이곳이 창령사터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문헌에 따르면 창령사(蒼嶺寺)는 조선 초기까지 남아 있다가 조선 중기 이전에 없어진 절이라고 해요. 창령사터 발굴에서 출토된 나한상 대부분은 목과 신체가 떨어진 채 발견됐는데 누군가 일부러 훼손하고서 한곳에 갖다 버렸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힘이 세지고, 숭유억불(崇儒抑佛·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함) 정책이 강화되면서 불상이나 불교 시설을 파괴한 흔적이라 할 수 있어요.
창령사터에서 발견된 317점이나 되는 이 조각상들은 원래 오백나한을 표현한 것이에요. 나한상 대부분은 높이 30㎝ 내외의 단단한 화강암을 이용해서 만들었으며, 앞면 위주로 조각하고 뒷면이나 옆면은 거의 다듬지 않았어요. 그러나 미완성처럼 보이는 창령사터 나한상들은 울퉁불퉁한 화강암의 거친 표면에 스며 있는 따뜻한 미소와 다양한 표정이 큰 매력이에요. 근엄하고 위엄 있는 절대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남녀노소의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창령사터 나한상들은 정면을 바라보는 상이 대부분이지만 대화를 나누듯 옆을 보거나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기도 하고, 지그시 눈을 감은 것도 있어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한 것도 있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도 있으며, 바위 뒤에서 살짝 고개만 내미는 모습을 한 나한상도 있어요. 창령사터 나한상은 500명의 각기 다른 인간의 모습을 개성 넘치게 표현하고 있답니다.
전라도 일대에서도 많은 나한상이 제작됐어요. 1994년 전남 나주의 불회사(佛會寺) 근처에서는 영월 창령사터처럼 수백 점의 불상과 나한상 파편이 한곳에서 발굴됐는데요. 그중 얼굴 조각만 243점이 확인돼 불회사에도 오백나한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죠.
불회사 나한상들은 회색이나 밝은 연회색이 주를 이루는 돌로 만들어졌는데 과학적 분석을 해보니 응회암으로 제작된 것이 확인됐어요. 응회암은 화강암보다 훨씬 무른 성질을 지니고 있어 조각이 비교적 쉬운 편이에요. 그래서인지 불회사 나한상들은 턱을 괴고 생각하는 모습이나 눈을 감은 모습, 명상에 잠긴 모습 등 다양한 표정들이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어요. 다만 불회사 나한과 불상들은 상체가 짧고 손이 작은 점, 옷 주름 모양 등을 고려할 때 조선시대인 15세기 중반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돼요.
이처럼 나한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속세의 인간들이 현재의 삶을 사는 동안 무병장수하면서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숙한 존재로 여겨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