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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호 “청춘이 아름답다지만, 나는 일흔의 내가 좋아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2. 9. 14:00

최백호 “청춘이 아름답다지만, 나는 일흔의 내가 좋아요”

새 앨범 ‘찰나’ 펴낸 가수 최백호 인터뷰

입력 2022.12.08 03:00
 
 
 
5일 저녁, 가수 최백호(72)의 서울 여의도 원룸 아파트 작업실. 거실 책상에는 자신이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최원봉 전 국회의원)의 사진과 최백호가 그 사진을 보고 직접 그린 아버지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그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버지가 내겐 늘 신화 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학창 시절 아버지에 대한 풍문을 많이 듣고 자랐죠. 어딘가 살아서 숨은 채로 날 지켜보는 것만 같았어요. 내겐 든든했고, 자존심이었고, 자존감이었죠.”
5일 서울 여의도의 원룸 아파트 작업실에서 만난 가수 최백호. 작업실 방 안은 그의 '인생 축소판'과도 같았다. 중앙에는 요즘 그리는 유화와 화구들이, 벽쪽에는 피아노 위 작사노트와 악보가 쌓여 있었다. 가난이 없었다면 이뤘을 미술 교사의 꿈과, 우연히 택했지만 천생이 된 가수의 현실이 공존하는 방이었다. 최백호는 2009년부터 지난 7월까지 그림 전시회를 여섯 차례나 열었다. "데생 기초가 부족하다"며 요즘은 홍대 미술학원 등록을 알아보고 있다. 못 다 이룬 미술의 꿈을 한풀이 하듯 이어가고 있는 것. 그럼에도 "20대로 돌아가면 또 다시 가수, 좀 더 나은 가수가 될 것"이라 했다. "가수로 노래하는게 그만큼 매력이 있다. 다시 고르라 해도 제 직함은 '가수'"라고 했다. /양수열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최백호는 최근 기획 앨범 ‘찰나’를 펴냈다. 이 작업실에서 쓴 자작곡 ‘책’과 CJ ENM의 신인 작곡가 육성 프로그램 ‘오펜 뮤직’ 출신들이 써 준 7곡을 모았다. 그 안에는 20대(곡명 덧칠)·30대(개화)·40대(변화)·50대(그 사람)·60대(나를 떠나가는 것들) 등 나이 들며 겪는 고민과 성장이 순서대로 담겨 있다. 그는 2018년부터 이 프로그램에 멘토로 참여해 왔다. 앨범과 동명 타이틀곡 제목은 “작지만 소중한, 짧지만 영원한 찰나들이 모여 우리 삶을 지탱한다”는 뜻. 최근 비슷한 시기 조용필이 낸 신곡 제목도 똑같아 화제가 됐다. “발매 전 조용필 소속사에서 곡 제목이 같아도 괜찮냐 묻는 연락이 와서 놀랐고, 가왕의 곡과 함께 화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고 했다. “30대 때 조용필의 ‘생명’을 듣고 ‘와,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다’ 했죠. 경쟁 의식은 전혀 없어요. 오죽하면 곧 책을 낼 건데 제목을 ‘3등이 편해요’로 지을까 고민했겠어요.”

 

그에게는 어떤 노래를 불러도 “쓸쓸하게 들린다”는 반응이 많이 돌아온다. 이번 앨범도 마찬가지. 최백호는 “아무래도 타고 난 것 같다. 나는 정말 신나게 불렀는데도 자꾸 쓸쓸하다고 한다”며 웃었다. 탁월한 노래 실력과 히트곡 제목 덕분에 붙은 ‘낭만 가객’이란 별칭이 “참 싫었다”고도 했다. “칭찬을 잘 못 참아 했거든요. 낯간지러워서. 그런데 요즘에는 계속 그렇게 불리는게 참 좋다 싶어요. 나이 드니 자꾸 칭찬 받는게 좋은 모양이야.”

 

문학은 그의 음악 원천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기형도 시집에 푹 빠졌다”고 했다. “내가 못 봤던 단어가 많아서 가사가 막힐 때마다 봐요. 새 길을 알려주는 것 같거든.” 히피들의 미국 로드 트립 이야기가 담긴 작가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지금도 작업실 책장에 꽂힌 ‘인생책’. “20대 땐 금서라 친구들과 몰래 돌려봤고, 나 읽을 차례엔 뒷장 20장이 몽땅 뜯겨 있어서 결말은 정작 나이 들어 알았어요.(웃음) 군사정권 시절에 장발 단속이 있을 때였죠. 책 속 미국 문화 모습에 해방감을 얻었고, 살아가는 데 여러 영향도 받았어요.”

서울 여의도 건물 20층에 있는 최백호의 작업실. 그는“요즘 오전 6시면 이곳으로 출근해 오후 10시 SBS 라디오‘최백호의 낭만시대’를 녹음하러 가기 전까지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쓴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소문난 만화광이기도 하다. 일본 만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웹툰 ‘호랑이 형님’ 스토리를 줄줄 외웠다. “‘라이파이’는 특히 처음 화가 꿈을 품게 해준 만화. 작가 김산호의 팬클럽에도 가입했다”고 했다. “전 늘 만화책 읽는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말해요. 그만한 감성과 공감능력을 가진 이가 대통령이라면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테니깐.”

 

팬데믹 시작과 함께 70대에 접어든 그는 “60대까진 죽음을 별로 실감 못 했는데 이젠 현실이 됐다”고 했다. 70대를 목전에 두고 비결핵성 항산균 폐질환 진단을 받았고, 올 초 그토록 좋아하던 축구를 체력이 달려 그만둬야 했다. 그런데도 “청춘은 참 아름답지만, 그때로 꼭 돌아가고 싶진 않다. 지금의 현실이 더 소중하다”고 했다. “내겐 청춘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스무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듬해 입대했지만 폐병을 얻고 조기 전역해 한참을 방황했다. “누나 둘 밑에 막내아들, 게다가 장손이라 어머니가 과잉보호하다시피 예뻐하셨다. 덕분에 세상 물정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데뷔 후 처음 900만원, 지금으로 치면 1억원가량 돈을 현금으로 받아 하숙집 이불 밑에 두고 꺼내 썼죠. 은행 계좌 여는 법도 몰랐어요. 그래서 내겐 어머니의 부재가 더 애틋하고, 힘들었어요.”

최백호가 작업실에 꽂아놓은 애독서 책장. 그는 "어린 시절 시골에 살다보니 친구가 별로 없었다. 대신 분야 가리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자라서는 신문을 5종이나 구독했다"고 했다. 그래서 "결혼 후 신혼 초에 아내가 참 싫어했다"고 했다. "밥 먹으면서 아내는 쳐다도 안 보고 신문만 본다고"라며 웃었다. /양수열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1976년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해 문화방송(MBC) 가요제 신인상을 받았지만, 이후 30대에 긴 슬럼프가 왔다. 손님이 던지는 수박 껍질, 땅콩을 얼굴에 얻어맞으며 미사리 라이브 클럽을 수년간 전전했다. 당시 선배 가수 최희준이 해준 다음 조언이 “참 아렸다”고 했다. “야, 네 출연료에 (수박 맞는 값도) 다 들어 있어. 참아야지 뭘.” 이때 미사리에서 겪은 설움이 아직도 생생해 “관련 영화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화도 추진 중”이라고 했다.

 

그런 설움을 버티고 버텨 46세에 설거지하는 아내 뒷모습을 보고 운명처럼 쓴 게 바로 ‘낭만에 대하여’. 1995년 김수현 작가의 KBS 2TV 주말극 ‘목욕탕집 남자들’에 삽입돼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고, 현재는 2030 세대 사이에서도 역주행 인기를 끄는 곡이다. “젊은 층이 좋아해줘서 참 고맙긴 한데 사실 이 곡이 와 닿고, 따라 부르기 시작하면 늙기 시작하는 거거든.(웃음) 나이가 들고 인생에 대한 회한이 느껴지고, 사는 게 허무해지는 관문 같은 곡이죠.”

 

최백호는 “살면서 보니 난 70대가 된 게 참 좋다”고도 했다. “60대만 해도 가난한 옛날로 돌아갈까봐 항상 불안하고 잡다한 생각이 많았는데 이젠 정리가 되고 편해졌죠. 눈앞이 아닌 전체를 볼 줄 알게 됐어요. 덕분에 80이 되면 더 좋은 노래를 쓸 거 같아요. 그렇게 90대까지, 90대의 호흡으로 품위 있게 노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