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화는 행실을 그르치나니…” 조선조 ‘금수저’의 최후
울진 월송정과 무신 박원종
김정탁 노장사상가
조선에서 가장 팔자 좋은 삶을 산 사람은 누구일까. 세속적 기준에서 보면 성종과 연산군 시대를 거쳐 중종 시대를 살다간 박원종(朴元宗)에 필적할만한 사람은 없다. 그는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부와 권력이 그의 곁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은 그야말로 축복받은 삶을 누리고 갔다.
박원종은 성희안·유순정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킨 세 대장으로 유명하다. 반정 당시 무력을 책임졌기에 공신 중에서도 으뜸을 차지했는데 그때 나이 39살이었다. 그리고 세 대장 중에 가장 먼저 정승에 올라 우의정이 됐고, 곧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42살에는 영의정에 올랐는데 병조판서도 겸했다. 이때 성희안은 좌의정, 유순정은 우의정이 돼서 반정 세 대장이 의정부를 모두 장악했다.
집안에 뇌물 가득, 기생용 별실까지
그래서 이들의 권력은 사실상 왕과 다름이 없었다. 중종도 이들의 눈치를 봐 조회가 끝나고 물러갈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들이 문을 나간 후 자리에 앉았다. 왕의 이런 처신은 왕조 국가에서 상상할 수 없다. 또 이들의 집에는 뇌물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는데 박원종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그는 연산군이 키운 흥청을 인계받아 이들을 위해 별실까지 지었다. 음식은 물론이고, 집도 신하의 도를 크게 넘어 궁중 못지않게 호화로웠다. 그래서 반정에 기대를 품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았지만, 연산군을 무너뜨린 명분 때문에 누구도 문제 삼지 못했다.
연산군 끌어내린 ‘중종반정’ 주역
가족과 궁중의 연결고리 든든해
부와 권력 주무르며 시대를 호령
왕도 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
영의정 된 뒤 43세에 갑자기 숨져
동해안 정자에 남은 영욕의 흔적
동해에서 바라본 경북 울진 월솔정 정경.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무신 박원종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월송 정은 1만여 그루의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사진 김정탁, 한국학중앙연구원]
물론 박원종보다 이른 나이에 영의정이 된 사람은 있다. 27살에 영의정이 된 귀성군 이준도 그중 하나다. 그는 세종의 넷째인 임영대군 아들로 이시애 난을 진압한 공로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런 그도 한명회·신숙주 등 세조를 왕으로 만든 계유정난 공신들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월송정에서 내려다본 동해 모습. [사진 김정탁,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도 남이 장군의 옥사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종친에 무인이라는 이유로 경상도 영해로 귀양 갔다가 10년 후 그곳에서 쓸쓸히 죽었다. 또 한강변 압구정의 주인공인 한명회도 박원종에 버금가는 영화를 누렸어도 계유정난 전까진 힘든 삶을 살았다.
성종 때부터 왕의 측근으로 군림
월송정에서 바라본 소나무숲. [사진 김정탁,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에 비해 박원종은 완벽한 금수저 출신이다. 친할머니가 세종비 소헌왕후 여동생이고, 아버지는 이시애 난을 진압한 공신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무인이다. 그의 큰누이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 부인이고, 다섯째 누이는 예종의 외아들인 제안대군 부인이고, 넷째 누이는 인수대비 조카 한익의 부인이다. 조선조에 궁중과 이처럼 긴밀히 연결된 인물은 흔치 않다. 한명회도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각각 시집 보내 두 왕의 장인이 됐어도 두 딸 모두 일찍 죽은 데다 후사마저 없어 장인으로서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박원종은 부친에 이어 무과에 급제하면서 곧바로 성종의 측근이 됐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정3품 당상관에 올라 지금의 국방부 차관보인 병조참지에 임명됐다. 그는 성종으로부터 어째서 이런 특별한 배려를 받았을까. 성종은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이 됐기에 형에 대해 늘 미안해하면서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덕수궁이 옛날 월산대군 집터였던 것만 해도 성종의 이런 신경 씀에 대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박원종은 이런 월산대군과 처남 매부지간이었다.
월송정에 걸려 있는 이산해의‘월송정기’. [사진 김정탁,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는 연산군이 즉위하고도 잘 나갔다. 연산군 특명으로 승정원에서 우승지·좌승지를 지내며 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다. 35살에는 평성군에 봉해지고, 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해 무인으로서 최고직에 올랐다. 갑자사화 이후에는 연산군 결정에 이견을 제시한 유일한 인물이었어도 파직당하지 않고 오히려 직급이 올랐다.
그후 강원도와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다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해직됐지만 곧이어 반정에 성공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했다. 그리고 중종 부인 신씨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자신의 둘째 누이 딸을 중종의 새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박원종의 누이들이 왕가에 이렇게 많이 출가한 데는 미모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연산군이 자신의 큰어머니이자 박원종의 누이, 즉 월산대군 부인을 범한 게 반정을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원종은 영의정에 임명되고 1년쯤 되어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나이 43살이었으니 얼마나 아쉬움이 많았을까. 그에게 죽음이 이처럼 빨리 찾아온 건 부와 권력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이를 주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소나무 1만 그루가 있는 월송정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박원종 일가의 묘역. [사진 김정탁, 한국학중앙연구원]
한 시대를 떵떵거리며 살았던 박원종도 지금은 그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최근 경북 울진에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황천호씨(62)의 도움을 받아 월송정(越松亭)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했다. 월송은 ‘도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이 정자는 박원종이 강원도 관찰사였을 때 세웠다. 지금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과 함께 울진을 대표하는 정자다.
월송정이 자리한 지명이 평해(平海), 즉 평평한 바다인데 이 정자가 진해(鎭海), 즉 바다를 누르는 모습이어서 더욱 평평하게 느껴진다. 무신 출신이어도 문장을 즐기고 서화를 좋아했기에 여기를 지나치지 못하고서 정자를 지었다고 본다.
월송정이 유명해진 건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 숲 때문이다. 이 숲에는 소나무가 만 그루 넘게 자란다. 여기에 어째서 이렇게 큰 소나무 단지가 자리할까. 소나무는 공기 중에 습도가 높아야 잘 자란다. 그래서 바닷가에는 방풍을 위해 조성한 소나무 숲이 늘 있게 마련이다. 나아가 이곳의 지역적 특성도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된 데 한몫을 담당한다. 동해의 바닷물로 생겨난 많은 습기가 태백산맥을 넘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러서다. 참고로 평해와 인접한 곳이 금강송 단지로 유명한 금강송면이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 이산해는 월송정 숲을 두고 ‘월송정기’를 지었다. ‘푸른 덮개 흰 비늘의
소나무가 우뚝 치솟아 몇만 그루가 해안을 둘러싸는지 모르는데 그 빽빽함은 참빗과 같고 곧기는 먹줄과 같다’라며 숲의 울창함을 노래했다. ‘밤이 깊고 인적이 끊겨서 만뢰(萬籟·자연의 온갖 소리)가 잠들면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을 부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은은히 들린다’라며 숲의 신비로움을 읊었다.
또 월송정에 앉아 들리는 소리를 해풍이 불면 송뢰(松籟·소나무 소리)가 파도와 뒤섞여 만드는 소리라며 천상의 음악인 균천광악(勻天廣樂)에 비유했다. 월송정을 세운 박원종도 같은 느낌을 받았을 거다.
오색·오음·오미 탐닉 뒤에 남는 것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각각 연산군과 박원종으로 나온 배우 김지석(위)과 최대철.
노자 『도덕경』은 “오색은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귀를 막히게 하고, 오미는 입을 마비시킨다. 또 얻기 어려운 재화는 행실을 그르친다”라고 말한다. 박원종도 반정 성공 후에는 부와 권력에 탐닉하다 오색·오음·오미에 빠져서 월송정에서의 경험과는 먼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어서 『도덕경』은 “성인은 배를 채울 뿐 눈요기에 힘쓰지 않는다. 고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저것’은 오색·오음·오미의 감각 활동이고, ‘이것’은 생명 활동이다. 박원종도 감각 활동에 정신이 팔려 행실을 그르치면서 생명 활동을 등한시하다 빨리 죽었다고 본다.
장자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천수(天壽)를 다하는 게 최고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축복받은 삶이란 박원종처럼 부와 권력을 원 없이 누리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하늘이 준 생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래서 삶을 뜀박질에 비유하면 부와 권력을 좇는 건 100m를 빨리 달리는 일이고, 천수를 다하는 건 마라톤을 완주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축복 된 삶은 100m를 빨리 달려서 좋은 기록을 세우는 게 아니라 천천히 달려도 완주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장자는 “기름은 한 번 활활 타 없어지고, 불씨는 작아도 끊임없이 이어진다”라고 말한다. 부와 권력에 탐닉하다 한 번으로 활활 타 없어지는 기름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씨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어쩐지 월송정과 압구정도 박원종과 한명회에겐 불씨가 아니라 기름처럼 보일 뿐이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월송정기 : 이산해(李山海, 1539년 7월 20일 ~ 1609년 음력 8월 23일
월송정은 군청(郡廳) 소재지의 동쪽 6, 7리 거리에 있다. 그 이름은, 어떤 이는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고, 어떤 이는 “월(月) 자를 월(越) 자로 쓴 것으로 성음(聲音)이 같은 데서 생긴 착오이다.” 하니, 두 설(說)은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월(月) 자를 버리고 월(越) 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
푸른 덮개 흰 비늘의 솔이 우뚝우뚝 높이 치솟아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몇만 그루나 되는지 모르는데, 그 빽빽함이 참빗과 같고 그 곧기가 먹줄과 같아, 고개를 젖히면 하늘에 해가 보이지 않고, 다만 보이느니 나무 아래 곱게 깔려 있는 은부스러기 옥가루와 같은 모래뿐이다. 그리하여 까마귀나 솔개가 깃들지 못하고 개미나 땅강아지가 다니지 못하며, 온갖 풀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왕왕 진달래와 철쭉이 백사장 곁에 떨기를 이루고 자라지만 가지와 잎이 짧고 성글며 땅 위로 나왔다 하면 이내 시들해지고 만다. 그런데 때로 혹 밤이 깊고 인적이 끊기어 만뢰(萬籟)가 모두 잠들 때면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을 부는 듯한 소리가 은은히 공중으로부터 내려오곤 하니, 이는 필시 몰래 이곳을 지키러 오는 귀신이나 이물(異物)이 있는 것일 터이다.
솔숲 동쪽에는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산이 둘 있는데, 위의 것을 상수정(上水亭)이라 하고 아래 것을 하수정(下水亭)이라 하니, 지긋이 물을 누르는 형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자 아래에는 한 줄기 물이 가로 흘러 바다 어귀와 통하며, 물을 사이로 동쪽에는 모래 언덕이 휘감아 돌아 마치 묏부리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언덕에는 모두 해당화와 동청초(冬靑草 겨우살이)뿐이며, 그 밖은 바다이다. 솔숲 서쪽은 화오촌(花塢村)으로 민가가 근 수십 호이며, 솔숲 남쪽은 곧 만호포(萬戶浦)의 성루(城樓)로 누각이 분곡(粉鵠)과 마주하여 있다. 솔숲 북쪽에는 바위가 불쑥 솟아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이름은 굴산(堀山)이다. 이 고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신령하다고 믿어 무릇 구원을 바랄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 빌곤 한다. 이 정자에는, 매양 해풍이 불어오면 송뢰(松籟)가 파도 소리와 뒤섞여 마치 균천광악(勻天廣樂)을 반공에서 번갈아 연주하는 듯,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쭈뼛하고 정신이 상쾌하게 한다.
내가 일찍이 화오촌에 우거(寓居)하면서 기이한 경관을 실컷 차지하였다. 따스한 봄날 새들이 다투어 지저귈 때면 두건을 젖혀 쓴 채 지팡이를 끌면서 붉은 꽃 푸른 솔 사이를 배회하였고, 태양이 불덩이 같은 여름날 땀이 비오듯 흐를 때면 솔에 기대어 한가로이 졸면서 울릉도 저편으로 정신이 노닐곤 하였다. 그리고 서리가 차갑게 내려 솔방울이 어지러이 떨어지면 성긴 솔가지 그림자가 땅에 비치고 희미한 솔바람의 운율을 들을 수 있었으며, 대지가 온통 눈으로 덮이어 솔숲이 만 마리 흰빛 용으로 변하면 구불텅 얽힌 줄기 사이로 구슬 가지 옥잎이 은은히 어리었다. 게다가 솔비늘이 아침 비에 함초롬히 젖고 안개와 이내가 달밤에 가로둘러 있는 경치로 말하자면, 비록 용면거사(龍眠居士)를 시켜 그리게 하더라도 어찌 만분의 일이나 방불할 수 있으리요.
아아, 이 정자가 세워진 이래로 이곳을 왕래한 길손이 그 얼마이며 이곳을 유람한 문사(文士)가 그 얼마였으랴. 그중에는 기생을 끼고 가무를 즐기면서 술에 취했던 이들도 있고, 붓을 잡고 먹을 놀려 경물(景物)을 대하고 비장하게 시를 읊조리며 떠날 줄을 몰랐던 이들도 있을 것이며, 호산(湖山)의 즐거움에 자적(自適)했던 이들도 있고, 강호(江湖)의 근심에 애태웠던 이들도 있을 것이니, 즐거워한 이도 한둘이 아니요 근심한 이도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나 같은 자는 이들 중 어디에 속하는가. 왕래하고 유람하는 길손도 문사도 아니며, 바로 한 정자의 운연(雲煙)와 풍월(風月)을 독차지하여 주인이 된 자이다. 나를 주인으로 임명해 준 이는 누구인가. 하늘이며 조물주이다.
천지간에 만물은 크든 작든 저마다 분수(分數)가 있어 생겼다 사라지고 찼다가 기우니, 이는 일월과 귀신도 면할 수가 없는 법인데, 하물며 산천이며, 하물며 식물이며, 하물며 사람일까 보냐. 이 정자가 서 있는 곳이 당초에는 못이었는지 골짜기였는지 바다였는지 뭍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종내에는 또 어떠한 곳이 될까. 또한 솔을 심은 이는 누구며 솔을 기른 이는 누구며, 그리고 훗날 솔에 도끼를 댈 이는 누구일까. 아니면 솔이 도끼를 맞기 전에 이 일대의 모래 언덕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인가. 내 작디작은 일신(一身)은 흡사 천지 사이의 하루살이요 창해에 떠 있는 좁쌀 한 톨 격이니, 이 정자를 좋아하고 아끼어 손이 되고 주인이 되는 날이 그 얼마일는지 알 수 없거니와, 정자의 시종과 성쇠는 마땅히 조물주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越松亭記 이산해, 아계유고 제 3권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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