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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다툼 시끄럽던 마을, 욕설·비방 땅에 묻은 사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9. 30. 14:58

말다툼 시끄럽던 마을, 욕설·비방 땅에 묻은 사연

중앙일보

입력 2022.09.30 00:49

경북 예천 말무덤〈言塚〉

김정탁 노장사상가

경상북도 도청에서 멀지 않은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 입구에 말 무덤이 있다. 말(馬) 무덤이 아니고 말(言) 무덤, 즉 언총(言塚)이라 생소하다. 이 무덤은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990년에 비석을 세우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50여 년 전쯤만 해도 여기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한대마을 사람들이 이 무덤의 존재를 소중히 여긴 듯하다. 그러면서 말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으면 말 무덤이 생겨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개가 짖어대는 형상, 주둥개산

 

이 마을에는 김녕 김씨, 김해 김씨, 진주 유씨, 밀양 박씨, 인천 채씨, 경주 최씨 등이 살았는데 이들 문중 간에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 선생도 이 마을 출신이다. 400~500년 전인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던 한 과객이 산의 형세를 보고는 “좌청룡은 곧게 뻗어 개의 아래턱 모습이고, 우백호는 구부러져서 길게 뻗어 위턱 모습이어서 개가 짖어대는 형상이니 마을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대죽리를 둘러싼 야산의 모습은 개가 입을 벌리는 듯해 ‘주둥개산’으로 불려왔다.

500년 전 문중 싸움 뜨겁던 고을
서로 헐뜯는 마음 무덤 속에 넣어

“내가 옳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
입은 재앙이, 혀는 칼날이 될지니…

역지사지 정신 희미해진 오늘날
과잉언어는 개인·사회 무너뜨려

경북 예천군 지보면 한대마을 입구에 있는 말 무덤(言塚). 입을 조심하라는 내용의 조형물도 세워 놓았다. [사진 김정탁, 예천군청]

 

그 과객은 말싸움을 그칠 처방도 함께 제시했다. 개의 송곳니 위치인 논 한가운데에 뾰족한 바위를 세우고, 개의 앞니 위치인 마을 길 입구에 재갈 바위를 세워서 개가 짖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주둥개산에 큰 구덩이를 파고서 사람들에게 사발을 가져오도록 해 서로에게 던졌던 비방과 욕설, 서로에게 지녔던 원망과 미움의 마음을 사발에 모두 뱉으라고 한 뒤 이것들을 묻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실제로 말싸움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화가 나 욱하다가도 말 무덤을 보며 참았기 때문인 듯싶다.

 

말 무덤을 만들 정도로 말싸움이 심한 건 각자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해서다. 장자는 이를 두고 ‘성심(成心), 즉 각자 이룬 마음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는 일’로 표현한다. 그리고 성심을 스승으로 삼지 않는데도 시비가 생겨나면 오늘 월나라로 떠나는데 어제 도착한 것에 비유한다. 오늘 월나라로 떠나는데 어제 도착한 건 있지 않은 걸 있다고 우기는 일이다. 그러니 성심을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시비를 다툴 일이 없다. 이렇게 보면 시비는 생각, 사상, 이념과 같은 성심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는 데서 비롯된다.

 

소통과 통합 노력했던 오바마

말 무덤 입구에 만든 비석들. 말과 관련된 속담을 새겼다. [사진 김정탁, 예천군청]

성심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을 보면 어머니로부터 받은 가장 큰 가르침으로 역지사지를 든다. 그래서 그의 연설은 시비를 가리는 일보다 통합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 민주당에는 두 그룹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라크전을 찬성했던 애국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전을 반대했던 애국자입니다”라는 연설이 단적인 예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소통을 가장 잘했던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것도 이런 연설 탓이다.

창덕궁 안에 있는 옥당. [사진 김정탁]

조선의 대간(臺諫), 즉 언관 제도에도 이런 역지사지의 정신이 있었다. 조선의 정치체제는 의정부, 육조, 삼사로 구성되는데 의정부가 정책조정 기관으로서 결정을 내리면 육조는 행정 실무를 담당하고, 홍문관·사헌부·사간원으로 구성된 삼사(三司)는 왕의 눈귀 역할을 담당하면서 이들을 감시했다. 그래서 삼사에 소속된 언관은 조정 관리 누구라도 탄핵할 수 있었다. 삼사의 이런 위세는 청사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홍문관은 특별히 궁 안에 있어 옥당(玉堂)이라 불렸다. 또 사헌부는 광화문을 나가자마자 오른쪽에, 사간원은 경복궁과 이웃한 왼쪽에 있어 육조보다 궁에 더 가까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주둥개산 정경. 위턱 모습을 한 우백호를 닮았다고 한다. [사진 김정탁, 예천군청]

 

삼사의 권한이 막강한 만큼 책임도 함께 지녀서 언관이 누군가를 탄핵할 때는 반드시 만장일치제를 따랐다. 그래서 만장일치가 되지 않으면 사간원 간관은 대기하면서 사헌부 판결을 기다려야 했다. 이때 사헌부 판결과 일치하지 않은 주장을 편 사간원 간관은 사표가 자동으로 수리되었다. 그런데 사헌부에서도 만장일치가 되지 않으면 사헌부 대관도 사간원 간관처럼 대기하면서 홍문관 판결을 기다려야 했다. 이때 홍문관 판결과 일치하지 않은 주장을 편 사간원 간관과 사헌부 대관은 모두 물러났다. 한편 사헌부에서 탄핵작업이 먼저 시작되면 사간원이 재심을 담당하면서 똑같은 절차로 진행되었다.

 

조선 대간제도는 성공했나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남쪽에 있는 사헌부 유적. [사진 김정탁]

 

이처럼 관리의 탄핵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도 책임을 함께 져야 했음으로 언관은 역지사지의 정신을 늘 염두에 둬야 했다. 그런데 실제 운영 과정에서 이런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탄핵 효과를 높이려 해서인지 몰라도 관리의 잘못을 들춰내는 과정에서 은유적 표현보다는 직설적 표현을 선호하고, 명사와 동사로서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형용사와 부사로 꾸미려 해서다. 이 과정에서 맵고 독한 언어를 쏟아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선비들 사이의 논쟁은 죽기 살기 식 싸움으로 비화하곤 했다. 그러니 제도만 좋으면 뭐하겠는가.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함량이 모자라는데.

경복궁 건춘문 앞에 있는 사간원 터. [사진 김정탁]

 

맵거나 독한 언어를 가리켜서 커뮤니케이션학 용어로 과잉언어라고 말한다. 의미를 실제보다 과장되게 전달해서다. 그래서 인공감미료가 듬뿍 뿌려진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에 인공감미료가 듬뿍 뿌려지면 같은 의견을 지닌 사람에게는 사탕발림 말처럼 달콤하게 들려도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에게는 비수가 되어 흉기로 변한다. 언관이 이런 과잉언어에 익숙해지면 권력의 견제자로서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없다. 그 결과 삼사도 왕의 눈귀 역할이 아니라 성심을 확대재생산 하는 기관으로 전락해 정치투쟁의 선봉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음식에 인공감미료를 넣으면 몸이 상하지만 언어에 인공감미료를 섞으면 마음이 상한다. 폭언과 욕설도 인공감미료를 듬뿍 뿌린 언어이다. 인공감미료가 진동하는 언어로 상대에게 모욕을 준 사람은 결국은 자신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2015년 세계커뮤니케이션(WCA) 학회에서 최우수논문상을 받았던 필자의 ‘암과 커뮤니케이션’ 논문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암 환자의 스트레스는 상당 부분 잘못된 커뮤니케이션에서 비롯되는데 구체적으로 의미를 ‘네/아니오’ 식으로 엄격히 나누고, 그 의미 나눔도 불필요하게 많이 해서다. 폭언과 욕설도 따지고 보면 과도한 이분법적 의미 나눔에서 생겨난 언어이다.

 

노자 『도덕경』 첫 장에 담긴 뜻

 

『구약성서』 잠언에서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한다”라고 경고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인공감미료가 점점 더 많이 뿌려진다. 말이 최고의 자산인 정치인조차 이런 오염된 언어를 여과 없이 마구 사용한다. 옛말에 ‘한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고 했는데 오늘날 정치인은 거꾸로 그의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고,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 되고 있다. 그러니 화는 입에서 나오고, 병은 입으로 들어가지 않겠는가.

 

『도덕경』의 시작과 끝도 모두 언어와 관련한 내용이다. 첫 장은 ‘도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런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늘 그런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인데 이는 의미를 나눈 뒤 이에 부합하는 정교한 언어를 동원해도 도는 물론이고, 대상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과잉언어를 사용해도 우리 속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마지막 장은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못하고,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다(美言不信 信言不美)’인데 여기서 아름다운 말도 일종의 과잉언어에 속한다.

 

과잉언어일수록 말의 진실성이 떨어진다. 반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언어일수록 진실성이 높아진다. 노자의 이런 지적은 말은 편리하고 유용한 수단이지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오용하는 경우 원자폭탄보다 더 무서운 폐해를 가져다준다는 일종의 경고이다. 그런데도 언어에 인공감미료를 마구 뿌려대니 인간 세상에 말싸움이 어찌 그칠 리 있겠는가. 인격이 곧 언격(言格)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사람들은 어째서 깨닫지 못할까.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