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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200년 전 과학자가 보여주는 위기 대처법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9. 30. 14:37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200년 전 과학자가 보여주는 위기 대처법

코로나에 이어 태풍·폭우 등 기상이변까지
기후변화와 에너지·식량 위기 한꺼번에 닥쳐
감자 수프와 조리 기구 개발해 식량난 해결한
18세기 과학자 벤저민 톰슨의 실용적 연구
현재 복합 위기 해결책 찾아갈 방향 보여줘

입력 2022.09.30 03:00
 
 
 
 
 

최근 수도권 집중호우와 태풍 힌남노는 기상이변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탄소 중립으로 기후 위기를 막겠다는 시나리오는 오히려 어려워졌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세계 각국이 전쟁과 인플레까지 겹치며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처럼 기후변화로 에너지와 식량 위기가 눈앞에 닥친 현실에서 18세기의 에너지와 식량 문제에 맞선 어느 과학자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어로 ‘수프 키친(soup kitchen)’은 무료 급식소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수프를 개발하고, 유럽인들이 꺼리던 감자를 식단에 올린 한 인물에게서 유래한다. 식민지 미 대륙에서 태어난 벤저민 톰슨(Benjamin Thomson)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을 지지하는 왕당파로 활동하다 독립파 폭도들에게 집을 약탈당한다. 부인과 딸을 버리고 영국으로 도주한 그는 독일에서 기회를 잡았다. 당시 독일에서는 빈민들의 기아 문제가 심각했다.

/그래픽=김현국

벤저민 톰슨이 낸 아이디어가 수프 키친이다. 그때까지 요리법이란 왕족이나 귀족을 위한 것으로, 끼니 걱정을 하는 평민들은 요리는커녕 식재료를 살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비싸지 않은 재료로 어떻게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지 고민했다. 무료 급식이라도 맛있어야 했고, 영양에도 손색이 없어야 했다. 순간 유럽인들이 잘 먹지 않던 감자가 떠올랐다. 그는 감자를 재료로 수프를 개발한다. 이 수프가 크게 인기를 끌며 수프 키친이 무료 급식소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 그는 이 공로로 작위를 받아 럼퍼드(Rumford) 백작이 되었고, 이 감자 수프는 럼퍼드 수프라고 불린다. 이 시점부터 감자를 주식으로 받아들인 유럽은 식량 문제에 실마리를 찾게 된다.

 

럼퍼드 백작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우선 가난한 사람들이 왜 끼니를 거르는지 과학적으로 분석해 그 배경에 땔감, 즉 에너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18세기까지 유럽은 모닥불처럼 개방된 화로에서 음식을 조리했다. 우리는 아궁이의 닫힌 구조에 익숙하지만, 서양에서는 대부분 열이 대기 중으로 낭비되어 땔감 소모량이 엄청났다. 게다가 연기도 심해 요리란 땔감 걱정 없는 귀족들이 하인들에게 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평민들이 매 끼니 요리를 해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해결책은 에너지 효율이었다. 그는 ‘키친 레인지(Kitchen Range)’라는 구조를 만든다. 닫힌 형태의 스토브로 주방 기기의 바닥만 가열하고 연기는 뒤쪽으로 빠져나가며 집 안을 데우게 했다. 이렇게 하면 열 손실도 막고 주방도 쾌적해졌다. 그런데 주방 구조만 바뀌어서 되는 건 아니다. 바닥만 가열되는 냄비는 높이가 낮아야 했다. 여기서 프라이팬이 등장한다. 또한 스토브의 열로 요리가 추가로 가능한 오븐을 레인지에 배치해,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혁신으로 서양인들은 비로소 집에서 제대로 된 요리를 하게 된다. 이후 럼퍼드 백작이 고안한 레인지는 현대적인 입식 주방의 표준이 되었고,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그는 늘 거대한 담론보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대안을 찾았다. 키친 레인지가 널리 쓰이려면 주방 기구가 저렴해야 했다. 당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으로 싼 가격의 주철이 대량생산되고 있었다. 그는 주철로 조리 기구를 만들어 귀족들이 사용하던 구리보다 훨씬 저렴한 주방 기구들을 제안했다. 문제는 더 있었다. 바닥만 가열하는 프라이팬과 간접 열을 이용하는 오븐으로 만든 요리가 과연 맛있을지. 럼퍼드 백작은 이를 보여주려고 과학적인 요리법까지 개발한다. 이렇게 주철 팬을 이용한 ‘팬 쿡(pan cook)’과 저온 조리법인 ‘수비드(sous vide)’ 요리가 탄생한다. 과학을 미식과 결합한 이러한 시도는 현재까지 이어져 럼퍼드 백작은 ‘분자요리(molecular gastronomy)’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

 

식량과 에너지에 대한 럼퍼드의 연구는 현대식 벽난로와 열과 일에 대한 동일성 실험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그의 과학 탐구는 맞닥뜨린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었고, 그 연장선에서 과학의 대중화를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1799년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를 설립하고, 일종의 과학 콘서트인 대중 과학 강연을 이끌었다. 여기서 토머스 영, 험프리 데이비, 마이클 패러데이와 같은 대학자들이 탄생한다. 1800년 럼퍼드 백작은 뉴턴을 배출한 런던 왕립학회에 거금을 기부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럼퍼드 메달’을 만들었다. 역대 수상자는 파스퇴르, 맥스웰, 키르히호프, 옹스트룀, 헤르츠, 뢴트겐, 러더퍼드, 로렌츠, 레일리 등으로 100년 뒤 노벨상이 탄생하기 전까지 학계 최고의 영예였다.

 

2017년 UN은 지난 20년간 기후 관련 재해 비용이 그 전보다 2.5배 늘어난 무려 2.25조 달러(약 3150조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상황은 나빠지고 있다. 올해 초, 미국 정부는 수십년 뒤 기후변화로 인한 예산 부담이 미국에서만 연간 2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탄소 중립을 통한 장기적인 대응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장 눈앞에 다가온 위협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제 다가올 어려움을 경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뉴욕시는 해수면 상승에 따른 피해를 막기 위해 2025년 완공을 목표로 14억5000만 달러(약 2조 원)의 예산으로 맨해튼의 둑을 올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과학은 예측하기보다 위험에 대비할 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기후 위기를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상되는 피해를 줄이려는 현실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