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뿌리’ 쿤타 킨테의 고향, 노예·황금·상아의 대륙
또 하나의 신대륙 ‘사하라 이남’
김기협 역사학자
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오세아니아, 세 대륙은 ‘신대륙(New World)’으로 불린다. 아시아·유럽·아프리카 ‘구대륙(Old World)’과 대비된다. 아메리카가 15세기 말에, 오세아니아가 17세기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사람이 살던 곳이고 더러는 고도의 문명을 꽃피우기도 하던 곳인데, 꼭 유럽인의 눈에 들어와야만 그 존재가 시작된 것처럼 볼 수 있는가.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에 비추어서는 이들을 신대륙으로 보는 데 의미가 없지 않다. 고유의 문명과 문화가 철저하게 파괴되거나 무시되고 구대륙에서 퍼져나온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피동적인 역할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서아프리카-지중해, 예부터 교역
15세기 이후 유럽의 약탈 본격화
‘암흑대륙’은 피부보다 역사 문제노예사냥 성행하며 문화도 끊겨
80년 뒤엔 세계 인구의 40% 거주인류에 닥친 위기 함께 풀어가야
유럽 중심주의 퇴조하며 재조명
미국에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다룬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1976)는 큰 사회적 충격을 일으켰다. 소설 속 주인공 쿤타 킨테가 미국에 도착한 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에 세워진 알렉스 헤일리 기념물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16세기 이후 신대륙은 유럽인에게 막대한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서방의 흥기’를 뒷받침해 주었다. 자원 착취의 기지로 만들어진 식민지가 자라나 20세기에는 ‘서방 패권’을 연장시키며 그 주역을 맡기도 했다. ‘발견’ 이후 신대륙의 역사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중요한 축이 되었다.
서방 패권을 당연시하던 유럽중심주의가 근년 퇴조하면서 신대륙의 역사적 역할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그런데 신대륙으로 눈길을 돌리기 전에 먼저 살펴보고 싶은 곳이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Sub-Saharan Africa)’는 15세기 유럽인의 진출을 계기로 세계사 전개에 피동적 역할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 신대륙과 같은 입장에 놓였던 곳이다.
‘사하라 이남’이란 이름 자체가 외부의 인식이 빈약했던 사정을 보여준다. 이집트에서 모로코까지 지중해 연안 지역은 일찍부터 지중해문명권의 일부로 유럽인에게 잘 알려진 곳이었다. 그 남쪽은 알려진 것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사하라 이남’으로 퉁쳐서 부른 것이다.
소설 『뿌리』는 드라마로도 제작돼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사하라사막 남쪽에도 기후와 생태가 확연히 서로 다르고, 따라서 역사와 문화도 서로 크게 다른 여러 지역이 있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살펴볼 곳이 서아프리카다. 15세기 중엽 이후 유럽인의 활동이 가장 많았고, 아메리카로의 노예 반출도 가장 많았던 곳이다.
유럽인 진출 이전에도 서아프리카의 중심적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반투 팽창(Bantu Expansion)’ 가설이다. 서아프리카 지역에는 니제르-콩고어파(語派)의 여러 언어가 뒤얽혀 있는데, 그 동쪽 끝에서 출발한 반투어군(語群)이 기원전 10~5세기부터 동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가 대륙의 중·남부를 뒤덮게 되었다는 것이다. 농업 발생, 철기 사용 등 기술 발전을 발판으로 서아프리카 문화가 확장되어 나갔다는 관점을 함축하는 가설이다.
노예 대거 반출이 빚은 ‘역사의 단절’
미국 화가 윌리엄 잭슨의 ‘노예선’. [사진 위키피디아]
서아프리카의 역사는 일찍부터 지중해권과의 교섭을 축으로 진행됐다. 장거리 교역이 사하라사막을 가로질렀고, 4세기부터 낙타의 도입으로 더욱 확대됐다. 지중해권 일환으로 선진문명이 보급된 북아프리카에 대해 서아프리카는 자원을 공급하는 배후지 역할을 했다.
서아프리카 몇 개 지역에 ‘상아해안’ ‘노예해안’ ‘황금해안’의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전통적 수출품을 표시한 것이다. 상아건 노예건 황금이건 서아프리카의 자원 착취는 15세기에 유럽인이 시작한 것이 아니다. 육로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나가던 것이 해로를 통해 유럽과 아메리카로 향하게 된 것이다. 유럽인이 직접 원주민을 노예로 ‘사냥’한 일은 거의 없었다. 지역에 존재하던 노예시장에서 구매했다. 이따금 유럽인의 노예 포획 시도에 현지 권력자들이 격렬하게 저항한 것은 자기네 밥그릇이었기 때문이다.
노예선의 표준 구조. 1781년에는 노예 442명을 꽉꽉 눌러 실은 영국 배가 항로 착오로 식수 부족이 닥쳤을 때 노예 142명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일도 있었다. 노예무역 금지를 앞당긴 사건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16~18세기 아메리카로의 노예 반출이 1200만 명 전후로 추정되는 한편 10~17세기 중 이슬람 세계로의 노예 반출을 1100~1700만 명 범위 안에서 많은 학자가 추정한다. 서아프리카의 노예 수출(?)이 유럽인의 활동으로 종래보다 줄잡아 3~5배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문명권에 대해서도 배후지는 노예를 비롯한 자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후지의 문명수준 상승으로 노예의 반출이 줄어든다. 15세기 이전 수백 년 동안 서아프리카의 문명수준 상승은 이슬람화의 틀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의 출현으로 노예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슬람화 과정이 교란되고 심지어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회까지 노예사냥의 대상이 된 일이 많았다. ‘역사의 단절’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이다.
알렉스 헤일리 『뿌리』의 표절 시비
알렉스 헤일리
사하라 이남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 하나가 쿤타 킨테다. 알렉스 헤일리(1921~1992)의 소설 『뿌리』(1976)는 쿤타 킨테가 1767년에 감비아 지역에서 노예사냥꾼들에게 포획된 후 그 7대손인 작가 자신에게 이어지는 한 집안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모은 소설의 하나가 되었다.
『뿌리』의 가치는 그 예술성보다 문제의식에 있다. 미국의 노예해방 후 100여 년이 지나도록 차별이 극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노예들도 ‘뿌리를 가진 사회적 존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 이 작품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해럴드 쿨랜더
이 작품의 표절 문제가 흥미롭다. 인류학자이며 소설가 해럴드 쿨랜더(1908~1996)가 자기 소설 『아프리카인』(1967)을 표절했다며 소송을 냈다. 헤일리는 그런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우겼지만 쿨랜더의 주장을 지지하는 전문가 의견서가 나온 후 쿨랜더와 합의를 봤다. 65만 달러 보상금과 함께 “알렉스 헤일리는 해럴드 쿨랜더의 『아프리카인』의 여러 내용이 자기 작품 『뿌리』에 들어간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조건이었다. 그 후 스키드모어대학의 한 교수는 1970년에 헤일리가 학교로 찾아왔을 때 『아프리카인』 읽기를 권하고, 흥미를 보이기에 집에 가서 그 책을 가져와 주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성에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헤일리 자신 사실과 창작이 겹쳐진 ‘팩션(faction)’의 성격을 표방했고, 독자들도 『뿌리』를 소설보다 논픽션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쿤타 킨테의 출발점에 대한 증인으로 헤일리가 내세운 감비아 그리오(griot·서아프리카에서 음악과 이야기를 통해 과거의 일을 전파하는 사람)가 진짜 그리오가 아니라고 그 지역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나섰다. 헤일리가 조사하러 다니면서 조사 대상자들에게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한 내용이 그 사람들의 진술을 유도해낸 ‘순환제보(circular reporting)’의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암흑대륙’의 미래도 암흑일까?
쿨랜더의 소설을 읽기는커녕 그런 책이 있는 줄 알지도 못했다는 헤일리의 주장은 그의 인격을 의심케 한다. 그러나 쿤타 킨테의 출발점에 관한 고증 문제는 18세기 중엽의 서아프리카 상황을 밝히기 어려운 사정에 비추어 이해할 만한 것이다. ‘팩션’이라 하더라도 ‘팩트’보다 ‘픽션’에 더 많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오랫동안 통용돼 온 아프리카의 별명이 ‘암흑대륙’이다. 주민의 피부색보다 과거를 밝히기 어렵다는 문제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15세기 이전의 문자 기록이 극히 적다는 점에서 구대륙보다 신대륙으로 보이는 지역이다. (물론 ‘사하라 이남’에 한정된 이야기다.)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책을 찾다 보니 아프리카에 관한 책보다 아프리카 출신 노예에 관한 책이 훨씬 더 많다. 일반 독자를 위한 출판물 중에는 아프리카 자체보다 노예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인데, 전문적 역사 연구의 분량 자체도 노예 쪽으로 더 많이 쏠려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이뤄져 온 ‘세계화’의 진도에 비해 ‘세계사’의 인식이 크게 뒤져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3세기에 걸쳐 아메리카로 반출된 노예 1200만 명은 6000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1700년경 아프리카 인구의 5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 노예들은 지금까지 인식돼온 세계사의 전개에서 맡은 독특한 역할 때문에 집중적 관심을 받아온 것이다.
2018년도 아프리카 인구는 13억2100만 명, 세계 인구의 18.2%를 점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 2100년에는 39억2442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37.9%에 이를 전망이다. (위키피디아 ‘아프리카 인구통계’) 이 전망이 얼마나 정확할지는 모르나 인류의 미래에 아프리카의 역할이 어떤 의미로든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도 인류의 위기를 가리키는 지표가 아프리카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처를 위해 여러 면에서 인류의 협력이 필요하거니와, 아프리카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것도 하나의 과제일 것이다.
김기협 역사학자
'문화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특정 정파 스피커 된 공영방송…KBS 수신료 분리 안 무섭나 (0) | 2022.10.13 |
---|---|
200년 전 과학자가 보여주는 위기 대처법 (1) | 2022.09.30 |
‘프랑스의 예쁜 마을’ 처럼, 선진국 품격은 시골에 있다 (0) | 2022.09.19 |
朱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0) | 2022.09.16 |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소송… 할머니가 아니라 주변인이 일으켰다” (0) | 2022.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