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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조선이 망한 건 노론 때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6. 3. 15:34

“조선이 망한 건 노론 때문?” 160년 장기 집권엔 이유가 있다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정조가 오래 살아 정약용의 남인이 집권했다면…” 속설 파다하지만
서자 등용, 공노비 혁파 등 개혁 주도한 건 노론… 남인, 오히려 반대
국정 철학, 책임정치 역량 갖췄지만… 言路·정보 독점은 ‘반면교사’

박현모 여주대 교수

입력 2021.06.03 03:00

“조선은 노론(老論) 때문에 망했다.” 요즘도 종종 듣는 얘기다. 정부 요직은 물론이고 재야의 지식 권력, 심지어 외척 인맥까지 두루 장악한 기득권 세력. 그래서 어떤 개혁도 거부한 수구 세력. 이것이 노론에 대해 고착된 인식이다. 정조(正祖)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래서 정약용이 이끄는 남인(南人)이 여당이 됐으면 조선이 부강해졌을 거라는 생각이 의외로 파다하다. 나는 요즘 ‘토요일밤의 실록여행’이라는 온라인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노론이야말로 그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토크쇼 참가자들은 우선 노론이 조선 후기의 거의 절반인 160여 년간(1694~1863) 집권한 사실에 놀랐다. 정치 세력들의 부침이 엇갈리는 광경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그런데 어느 정치 세력이 진짜 국정을 이끌 능력을 갖췄는지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노론의 집권 전략은 그 분별 기준의 일단을 보여준다.

실질적 개혁 주도한 건 노론

노론은 조선을 망하게 한 반개혁 기득권 세력에 불과했을까. 양반가 서자에게도 요직 진출 기회를 열어주겠다는 정조의 서류허통(庶流許通) 방침을 가장 반대한 집단은 노론이 아닌 영남 남인들이었다. 반면 정조 22년(1798) 10월에 조선 왕조 신분 질서의 근간인 ‘노비를 영구히 혁파하자’[奴婢永罷]고 제안한 사람은 노론 신하였다. 노론의 상징적 인물인 송시열은 서류허통과 양반 부녀자의 개가 허용,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 실시를 주장했다. 1801년 1월에 6만6000여 명의 공노비가 혁파된 것 역시 노론 집권 때였다. 이 외에도 노론을 반개혁적인 퇴영 집단으로 낙인찍을 수 없는 근거는 무수하다.

/일러스트=이철원

그렇다면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한 노론 세력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노론은 “세도의 책임이 노론에 있다”[世道之責 專在老黨]며 국정을 책임지는 자세를 견지했다. 이에 비해 소론과 남인은 스스로를 ‘나그네 같은 신하’[羈旅之臣]로 자처하며 나랏일을 감당하지 않으려 했다. ‘세상 이끌어가는 정치 도리를 노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이 주장은 노론의 두 개 당론에서 도출됐다. 하나는 군주성학론이다. 훌륭한 군주가 되려면 먼저 요순임금과 주공으로부터 내려오는 성학(聖學)을 체득해야 한다는 학문정치론이다. 다른 하나는 그 심법을 깨닫고 실천하는 군자의 무리인 노론이 정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정 철학과 책임 정치가 기반

노론은 나라를 이끄는 세력이라면 뚜렷한 국정 철학으로 책임 정치를 할 역량이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노론의 세도책임론은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공세적이고 일관된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숙종 이후의 왕들은 노론의 ‘이론적 무기’와 버거운 힘겨루기를 해야 했다. 이에 비해 소론은 그런 정치론이 없었다. 남인의 경우는 좀 다르다. 가령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된 남인 계열의 윤휴는 군주성학론을 부정했다. 그보다 왕 스스로 수양해 하늘의 뜻을 묻고, 깨달은 하늘의 뜻에 따라 나랏일을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랏일은 신하들에게 위임하고 왕은 마음공부에 전념하라는 노론의 주장과는 구별된다. 하지만 숙종 6년(1680) 윤휴가 사사(賜死)된 뒤 남인에는 그를 계승할 인물이나 논리가 없었다.

언로(言路)와 정보 독점의 유혹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것은 노론이 국가의 핵심 요직을 장악하는 정치 기술이다. 노론이 특히 중시한 것은 인사권과 언권(言權), 사관(史官) 자리였다. 인사권과 언권을 좌우하는 이조전랑과, 왕 앞에서 모든 대화와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사관 자리가 그랬다.

노론은 유독 사관 역할을 하는 예문관 검열 자리를 매우 중시했다. 그들은 사관 추천 방식을 놓고 왕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정조 즉위년) 영조 때 사도세자의 사망 이유를 ‘정신병'으로 기록하기 위해 노력한 데서 보듯 유독 공식 기록에서 자신들의 조치를 정당화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 것도 노론이었다.

마지막으로 노론이 가장 중시한 것은 국혼(國婚), 즉 왕비와 왕세자빈 가문 사수(死守)였다[勿失國婚]. 숙종 때 장희빈의 왕비 승격 등으로 큰 곤경에 빠졌던 노론은 이후 왕비 및 왕세자빈 가문을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을 최우선 전략으로 삼았다. 국혼을 놓치는 것은 작게는 왕의 장인이 맡게 되어 있는 국왕 경호 업무 및 도성군사 동원 권력을 잃는 것이요, 크게는 정권 재창출 기회(왕자 출생)와 핵심 정보원 상실을 의미했다.

160년 세도를 떨친 노론의 장기 집권 전략은 어떤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가와 함께, 정치 권력이 빠지기 쉬운 유혹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