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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서거 200주기 어떻게 신화가 됐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5. 18. 11:08

히틀러처럼 수백만명 죽였지만… 나폴레옹은 영웅으로 부활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1]
나폴레옹 서거 200주기 어떻게 신화가 됐나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5.18 03:00 | 수정 2021.05.18 03:00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21년 5월 5일, 남대서양 한복판에 위치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어 있던 나폴레옹이 사망했다. 그 소식은 두 달이 걸려서야 유럽에 전해졌다. 마지막 시기 나폴레옹은 한때 스페인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황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40일 넘게 시름시름 앓으며 자리를 보전하다가, 죽으면 배를 갈라 혹시 자신이 아버지처럼 위암에 걸린 게 아닌지 확인해 보라고 요청했다. 검시 결과 실제로 위암이었다. 독살설은 뜬소문에 불과하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한 법, 황제의 마지막은 그 어느 필부와 다를 바 없다.

후퇴하는 자는…”나폴레옹의 마지막 순간 - 1821년 5월, 40여일을 앓던 나폴레옹이 유배지인 남대서양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죽었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들은 마지막 말은“후퇴하는 자는…”“군의 선두에서…”같은 불명확한 구절들뿐이었다. 사후 그는 자유주의적 인물이자 프랑스 혁명 정신의 계승자로 묘사되고‘뻥튀기’무용담이 더해지며 낭만주의 문예 사조를 타고 극적인 영웅으로 기억됐다. 실제로는 그의 유해는 죽은 지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모국 프랑스로 송환됐고, 지금 파리 앵발리드에 있는 거대한 붉은 석관이 만들어진 것은 사후 40년 넘게 지난 뒤였다. 나폴레옹 시대에 활동했던 독일 태생의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석판화가 샤를 드 스튜벤 남작의 그림‘나폴레옹의 죽음’.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은 영웅인가 악마인가? 프랑스혁명을 계승한 투사인가, 총칼을 휘둘러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한 독재자인가? 프랑스의 법과 제도를 일신한 유능한 정치인인가, 세상을 불바다로 만든 군국주의자인가? 그 모든 면들을 다 품고 있는 모순에 찬 인물임에 틀림없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보면 히틀러 급 악당이지만 프랑스인들의 기억에는 주로 고귀한 이상을 위해 헌신한 영웅으로 남아 있다.

‘위대한 나폴레옹’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려면 재료가 필요하다. 나폴레옹은 개인 비서 자격으로 세인트헬레나 섬까지 따라온 에마뉘엘 드 라스 카즈(Emmanuel de Las Case)에게 구술하여 회고록을 남겼다. 이 원고를 정리하여 1823년에 2000페이지에 달하는 ‘세인트헬레나 회고록'을 출판하면서 라스 카즈는 나폴레옹을 자유주의적 인물이며 혁명 이상의 계승자로 그렸다. 여기에 나폴레옹을 따라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뻥튀기 무용담이 더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나폴레옹의 이미지가 미화되고, 지난 시대는 영광의 시대로 기억되었다.

1820년대는 프랑스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조가 다시 들어선 왕정복고기였다. 이 시대에는 나폴레옹을 영웅시하는 일체의 행위를 엄금했다. 언론 검열도 심했고, 나폴레옹을 찬미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체포했다. 그렇지만 당시 왕정은 전혀 인기가 없던 반면 사람들 사이에 나폴레옹 열기는 뜨거웠다. 심지어 오스트리아에 있는 나폴레옹의 아들을 모셔 와서 나폴레옹 2세로 추대하겠다는 어이없는 모의가 적발된 적도 있는데, 의외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세기 중반에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다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된 것도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극적인 영웅을 주조하려는 낭만주의 문예 사조도 한몫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을 추모하는 시를 썼고, 스탕달은 ‘적과 흑'이나 ‘파르므의 승원' 같은 소설에서 나폴레옹 열기를 고조시켰다.

첫 부인 조제핀과 두번째 부인 루이즈 - 나폴레옹의 첫 황후 조제핀(왼쪽)과, 오스트리아 프란츠 2세의 딸인 두 번째 황후 마리 루이즈. /위키피디아

 

그러는 동안 황제의 유해는 여전히 세인트헬레나 섬에 그대로 묻혀 있었다. 죽기 20일 전에 쓴 유서에서 나폴레옹은 “프랑스 땅에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인들 사이에 묻히고 싶다”고 밝혔으나 정치적 이유로 유해 송환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1830년 파리에서 ‘7월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분위기가 바뀌었다. 권력을 잡은 루이 필리프 1세는 황제 숭배 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어 했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본격적으로 재(cendre, 시신의 높임말로 ‘재’라는 표현을 썼다)를 고국으로 모셔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세인트헬레나 섬을 영유하고 있는 영국의 양해가 필요한데, 당시 프랑스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영국도 기꺼이 승인했다. 이후로도 수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끝에 1840년에 가서야 프랑스 의회가 나폴레옹 유해 송환을 가결했다.

그러면 유해를 어디에 모셔야 하는가? 나폴레옹과 관련이 있는 ‘기억의 장소들’ 중 어디가 적절한지 또 논란이 이어졌다. 개선문, 팡테옹, 바스티유 광장, 방돔 광장 등이 거론되다가 결국 앵발리드(Invalides)로 결정했다. 이곳은 현재는 군사박물관이 되었지만 원래 노병들의 휴양소였다. 이곳에 유해를 모신다는 것은 그의 지위를 황제가 아니라 군사최고지휘관으로 규정하는 의미가 된다.

 

나폴레옹 사후 20년 만에 드디어 송환 작업이 이루어졌다.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보니 죽은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원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신화에 일조했다. 장례 때 입혔던 유니폼, 레지옹도뇌르 훈장, 게다가 다리 사이에 놓아둔 그의 유명한 모자까지 온전히 남아 있었다.

파리 인근에 도착하는 유해 - 나폴레옹이 죽은 지 20년 뒤에야 비교적 온전히 보존됐던 그의 시신과 유품들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 화가 앙리 펠릭스 에마뉘엘 필리포토의 그림 ’1840년 12월 14일 쿠르브부아(파리 교외 도시)에 도착하는 나폴레옹의 유해’. /위키피디아

 

국왕의 동생 주앵빌 공이 운구 책임을 맡았다. 시신을 실은 배가 셰르부르 항에 도착했을 때 1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육로로 이송할 경우 혹시라도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인 끝에 자연스럽게 봉기로 이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강으로 이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센 강을 따라 운구용 배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교회마다 타종을 했다. 12월 15일, 시신이 파리에 도착했다. 운구 행렬은 개선문에서 시작해서 샹제리제 거리를 따라간 후 센 강을 건너 앵발리드에 도착했다. 주앵빌 공이 “전하, 나폴레옹의 시신을 전합니다” 하고 보고했고, 국왕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하고 응답했다.

현재 앵발리드에서 볼 수 있는 나폴레옹의 관은 1861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녹색 화강암 받침대 위에 놓인 길이 4미터, 높이 2미터의 거대한 관은 러시아 북부 카렐리아 지방에서 구해온 규암(硅巖)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이처럼 위풍당당한 관은 보기 드물 것이다.

나폴레옹의 역사적 의미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나폴레옹과 연관된 기념행사는 시대의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2005년은 나폴레옹의 최대 승전인 아우스터리츠 전투 200주년이었으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행사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참담하게 격파한 사건을 프랑스가 대놓고 자랑하는 일이 외교적으로 좋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워털루 전투 200주년 관련 행사들도 대개 소규모로 치렀다.

나폴레옹 서거 200주년을 맞아 마크롱 대통령은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묘에 헌화하였다. 이에 대해 비판 여론이 없지 않으나, 엘리제궁 측에서는 나폴레옹 개인을 미화하는 의도가 아니라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며, 나폴레옹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고 애써 강조했다. 위인의 죽음은 정치화를 피할 수 없다.

 

나폴레옹 2세

나폴레옹은 첫 부인 조제핀을 사랑했지만, 황제위를 물려줄 아들을 얻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1809년 이혼하고 다음 해 오스트리아 황실의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대신 조제핀에게는 저택과 많은 재산을 주어서 풍족한 삶을 살도록 배려했다. 새 부인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811년 아버지를 빼닮은 아들을 낳자 나폴레옹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쫓겨난 후 나폴레옹은 처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곤 했다. 죽기 전, 마리 루이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그렇지만 이때 부인은 나폴레옹의 라이벌이었던 아담 나이페르크 백작의 연인이 되었고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아들에 대해서는 ‘혹시 이 아이가 빈에서 오스트리아 귀족이 되면 차라리 목을 쳐버리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정말로 아들은 외가인 빈 궁정에 가서 라이히슈타트 공작이라는 작위를 얻었다. 게다가 외조부 프란츠 2세는 그의 이름에서 나폴레옹을 빼고 프란츠(Frantz)를 넣었다. 자기 아들이 ‘오스트리아 귀족 프란츠’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심정이 어땠을까.

프란츠는 1832년 폐결핵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었다.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에 프랑스 황제위에 대한 권리는 루이-나폴레옹에게 돌아갔고, 실제로 그가 나폴레옹 3세로 황제가 된다. 후일 히틀러가 프랑스를 지배했을 때 아마도 프랑스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였던지 빈에 있는 프란츠의 유해를 파리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고나 할까, 거대한 나폴레옹 관 근처에 아들의 유해도 조촐하게 자리를 잡았다.(나중에 그의 유해는 아래층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