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학 속에 나타난 도봉

고전 문학 속에 나타난 도봉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4. 15. 15:39

고전 문학 속에 나타난 도봉

나호열(도봉학연구소장)

 

 

 

 

■ 도봉산의 봉우리(사진 : 도봉문화원)


1. 도봉의 명칭 유래와 지리적 특성

 

도봉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쳐 내리다가 강원도 철원에서 한북정맥으로 갈라진 끝 부분에 위치한다. 도봉은 자운봉(740m), 만장봉(718m), 선인봉(708m), 주봉(675m), 오봉(660m), 여성봉(504m), 사패산(552m) 등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들의 통칭이며, 언제부터 도봉이라 불리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문헌에 나타난 바로는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 비문에 ‘도봉원(道峯院)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 초 이전부터 도봉의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
그러나 도봉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이 건국할 즈음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을 정할 때 자주 이곳을 찾아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여 도봉이라 하였다든지, 바위 산마루가 길을 이루어 도봉이라 하였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그러하지만 형세가 높고 깎아지른 봉우리들이 도(道)를 터득한 듯하여 도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또한 도봉의 위상이 가볍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도봉산은 북한산과 더불어 서울의 진산으로 방어의 기능을 담당하는 동시에 수려한 풍광으로 수도(修道)와 유람(遊覽)의 명소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도봉산이 품고 있는 천축사(天竺寺), 망월사, 도봉서원과 도봉서원에 앞서 그 터에 자리 잡았던 영국사 등에 둥지를 틀고 뜻을 품었던 선인(先人)들의 발자취가 글로서 남아 있게 되었다. 이 글들은 당시의 생활상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오늘의 삶을 되비쳐보는 거울로 그 의미를 더한다.

 


2. 문학의 의미 설정과 도봉

 

문학(文學)은 언어를 통하여 사상(思想)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입혀 작가의 의도를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전통에서 문학의 범위는 이보다 더 넓어서 개인의 수신(修身)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여졌음도 인지하여야 한다. 오랜 기간 동안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 글들을 남긴 학자이며 관료였던 이들이 남긴 글들은 오늘날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와 같이 전업(專業) 문학인은 아니었던 까닭에 그들의 글을 향수(享受)하는 독자층은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도봉과 관련된 시(詩)나, 기(記)는 당시의 생활상이나 풍습을 이해하는 통로로서의 기능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도봉을 언급한 많은 작품은 고려 초부터 번성했던 영국사와 영국사가 폐찰된 이후 양주목사 남언경이 정암 조광조를 추모하고자 1579년 건립한 도봉서원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이 남긴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통해서 현존하지 않은 영국사와 도봉서원의 건물 배치와 풍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도봉서원 앞 계곡 각석군(刻石群)을 통해서 유학에 경도된 당시의 시류를 짐작해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사상적 포부와 식견을 드러내는 글들은 가려내고 가급적 문학이 지니고 있는 예술적 정치를 드러내는 글들을 수록하고자 하였다.


3. 문학 자료편

 

1) 영국사 관련 시편

 

영국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 비문에 고려 광종 22년 조칙을 내려 고달원(高達院), 희양원(曦陽院), 도봉원을 부동사원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그중 도봉원이 영국사라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영국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고려시대 혜거국사비를 통해 구산 산문중 하나인 사자산문의 초기선사인 신정선사-혜거국사-적연국사의 행적을 알 수 있었으며 고려 광종이 3대 부동사원 중 하나로 지정한 고려 초기 불교사 중 법안종 중심지임을 알 수 있었다”2 또 영국사가 언제 폐찰되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까지 중창을 거듭하다가 도봉서원이 세워진 1573년(조선 선조 6년) 이전에 폐사되었음은 분명하다.


(1) 김수온(金守溫, 1410~1481)

 

寧國寺 영국사

 

澗水潺湲瀉路隅, 간수잔원사로우
行人指點是僧區. 행인지점시승구
披蓁客到欲秋暮, 피진객도욕추모
面壁禪趺斜日晡. 면벽선부사일포
翠石半天高可仰, 취석반천고가앙
大江連海遠堪旴. 대강연해원감우
三生事杳無人識, 삼생사묘무인식
佛殿重營尙記無. 불전중영상기무


영국사

길옆 골짜기에 시냇물 졸졸 흐르고
행인이 가리키는 곳은 스님들이 머무는 곳이네.
우거진 수풀 헤치고 나그네가 가을 저녁에 닿으려 할 때,
가부좌 틀고 면벽 수행하는 스님에게 햇살이 비껴 내려앉네.
옥빛 바위가 하늘 반만큼이나 높으니 우러를 만하고,
큰 강은 바다로 이어져 멀리 보일 듯 말 듯하니
전생, 현생, 후생의 일을 아는 사람 없으니,
불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 기억할 수 있겠는가

 


(2) 서거정(徐居正, 1420~1488)

 

道峰山 寧國寺 도봉산 영국사

 

山下何年佛刹開, 산하하년불찰개
客來終日足徘徊. 객래종일족배회
開窓雲氣排簷入, 개창운기배첨입
欹枕溪聲捲地來. 의침계성권지래
古塔有層空白立, 고탑유층공백립
斷碑無字半靑堆. 단비무자빈청퇴
殘年盡棄人間事, 잔년진기인간사
結社香山擬不回. 결사향산의불회

 


도봉산 영국사
산 밑 저 절은 언제 문을 열었나.
어느 사람 찾아와 종일토록 거니네.
창을 여니 구름인 듯 안개인 듯 처마 아래로 들어오고,
베개를 베고 누우니 시냇물 소리 땅에 스며 들려오네.
옛날에 세운 높은 탑은 하얗게 서 있고,
부서진 비석엔 글자도 없이 풀섶에 묻혔네.
남은 삶 동안 사람 사는 일 모두 버리고,
그 옛날 백거이와 여만 스님이 함께 향산에 머물듯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려네.


2) 도봉서원 관련 시편

 

도봉서원은 영국사가 폐찰되고 난 후 그 터에 1573년(선조 6년) 양주목사 남언경이 발의하여 이듬해인 1574년 여름 완공되었다. 3 이후 많은 유학자가 도봉서원을 찾아와 강학(講學)과 유람(遊覽)의 정취를 시문(詩文)으로 남겼다.

 

 


(1) 유희경(劉希慶, 1545~1636)

 

宿道峰書院 숙도봉서원

 

暫借東齋宿, 잠차동재숙
殘燈夜二更. 잔등야이경
雲深祠宇靜, 운심사우정
水遶石欄鳴. 수효석란명
道起峰彎合, 도기봉만합
靈光洞壑明. 영광동학명
斯文曾有意, 사문증유의
歲暮又山行. 세모우산행


도봉서원에 머물다.
잠시 동재4에 머물러 잠을 자는데,
남은 등불 사위어가는 깊은 밤이네.
구름이 깊숙이 선현의 영정을 모신 사우에 고요히 내려앉고,
물은 돌난간을 돌아 흐르며 소리를 내네.
참된 도는 산봉우리와 합쳐지고,
신령의 빛은 계곡에서 빛나네.
글에 뜻을 두었으니,
저무는 한 해 끝자락 다시 산길을 걷네.

 

 


(2) 이항복(李恒福, 1556~1618)

 

宿道峰書院三絶 숙도봉서원삼절

 

道峰霜色隱寒林, 도봉상색은한림
深磵響空生薄音. 심간향공생박음
石老荒怠人去遠, 석로황태인거원
峨洋誰和絶絃琴. 아양수화절현금

 

朝廷未肯用虛名, 조정미긍용허명
野外無田可耦耕. 야외무전가우경
進退卽今難着脚, 진퇴즉금난착각
乞爲留院老書生. 걸위유원노서생

 

山中一夜笑聲和, 산중일야소성화
山外紛紛誶語多. 산외분분수어다
今日吾儕幸無事, 금일오제행무사
枕流堂裏一長歌. 침류당리일장가

 

聖徽同宿. 夜半. 使子歌之. 성휘동숙 야반 사자가지


도봉서원에 묵으며 세 수를 짓다.
도봉의 흰 빛이 찬 숲에 숨고
깊은 계곡 물소리 하늘에 울려 엷디엷은 구름이 피어오르네.
돌도 늙어 이끼가 무성하여 사람들 멀리 떠나니,
누가 줄 끊어진 거문고에 높고 넓은 도를 화답하리오.

 

조정에서는 헛된 명성에 등용하지 않고,
들판에는 쟁기로 밭갈이할 농토도 없어.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발붙일 곳 없으니,
서원에 빌붙어 머무는 서생이나 되길 바랄 뿐.

 

산속의 하룻밤에 웃음소리가 조화로운데,
산 밖에서는 이말 저말 꾸짖는 말도 많구나.
오늘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아무 일 없으니,
침류당 5안에서 길게 노래 한 곡 부른다.

 

성휘와 함께 잠을 자는데 밤중에 그의 아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3) 최립(崔岦, 1539~1612)

次韻題道峰書院道峰之名. 初以刱刹而得云
차운제도봉서원도봉지명. 초이창찰이득운

 

榮辱新規與舊基, 영욕신규여규기
道峰終覺設名奇. 도봉종각설명기
巖巖秀色當空聳, 암암수색당공용
活活寒流不蹔衰. 활활한류불잠쇠
揭妥前賢森陟降, 게타전현삼척강
藏脩後學謹微危. 장수후학근미위
幔亭異迹輸精舍, 만정이적수정사
今見吾東一武夷. 금견오동일무이


차운하여 도봉서원에 붙이다.
도봉의 명칭은 옛날에 이곳에 절이 처음 창건될 때부터 쓰였다.
절터가 있던 곳에 서원이 들어서니 영광과 치욕이 함께하니,
도봉이란 이름이 기이한 인연임을 깨닫게 하네.
봉우리마다 수려한 빛이 하늘로 향해 솟아오르고,
힘차게 흐르는 찬 냇물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른다.
선현을 받들어 모신 이곳으로 혼령이 오르내리니,
학문을 닦는 후학들은 위태로운 힘을 다하여 위태로운 인심과 드러나지 않는 도를 세심히 살펴라.
만정7의 이적보다는 정사8가 나은 것이니,
오늘 우리는 동방의 무이9정사를 보게 되는구나.

 

過道峯書院有感 과도봉서원유감

 

二十年前負笈遊, 이십년전부급유
一笻曾踏亂峯秋. 일공증답란봉추
驚心廟宇蓬蒿慘, 경심묘우봉호참
揩眼煙霞水石幽. 개안연하수석유
佳境祗今煩鬼護, 가경지금번귀호
斯文從古係人修. 사문종고계인수
沙邊坐久重瞻仰, 사변좌구중첨앙
剛喜新堂已枕流. 강희신당이침류

 

 

(4) 이정귀(李廷龜, 1564~1635)

도봉서원을 지나며 느끼는 감정
이십 년 전 이곳에 와 두루 노닐 때,
지팡이 짚고 가을이 물든 산들을 이곳저곳 다녔었지.
사당 터에 쑥대만 무성하여 마음 슬프고,
자욱한 안개 가운데 그윽하게 수석을 눈 부비고 본다.
이 아름다웠던 곳 지금은 귀신이 지키게 있으니,
사문은 예로부터 사람 하기에 달려 있지.
모래 개울가에 오래 앉았다가 다시 쳐다보니
흐르는 물 베고 새 집이 들어서 몹시 기뻐라.

 

(5) 이식(李植, 1584~1647)

 

同錦山沈使君詻 劉老人 希慶遊道峯宿書院. 翌日. 宗弟主簿 梣追到. 共飮溪石上口號. 二首.
동금산심사군 액 유노인 희경 유도봉숙서원 익일 종제주부 침 추도 공음계석상구호 이수

 

老罷眞無賴, 노파진무뢰
春來却有情. 춘래각유정
偶尋村叟約, 우심촌수약
得與使君行. 득여사군행
壁色團花影, 벽색단화영
松風合澗聲. 송풍합간성
書樓登最好, 서루등최호
山月又生明. 산월우생명

 

 


금산의 사군10 심액11과 유희경12과 노닐다가 도봉서원에 묵었다. 다음 날 종제 주부13 침이 따라와서 함께 바위에 앉아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하릴없이 늙어가면서 무료한 차에
봄이 되니 슬슬 흥취가 일어나
촌노인네와 했던 약속이 우연히 떠올라
사군을 함께 가자 이끌었네.
바위벽에는 꽃무늬 아롱지고
솔바람은 개울물과 어우러지네.
서재 다락에 올라보니 얼마나 좋은지
산마루 걸린 달이 또 차오르기 시작하네.

(6) 송시열(宋時烈, 1607~1689)

題道峰書院 제도봉서원

 

蒼崖削立洞門開, 창애삭립동문개
澗水潺湲幾曲廻. 간수잔원기곡회
堯舜君民當世志, 요순군민당세지
廟前空有後人來. 묘전공유후인래

 

 

 

도봉서원을 읊다.
푸른 절벽 깎아 세우듯 동구가 열렸으니
잔잔한 계곡 물은 몇 구비를 돌아왔나.
요순임금 때 태평성대 이루려는 그 뜻을
후대 사람들 사우를 찾아와 기리고 있네.

 


(7) 박세당(朴世堂, 1629~1703)

 

路聞趙司藝汝吉, 在道峯書院. 往尋留宿. 仍次其韻.
노문조사예여길 재도봉서원 왕심유숙 잉차기운

 

駐馬逢人說, 주마봉인설
知君作出城. 지군작출성
方將過溪去, 방장과계거
却復入林行. 각복입림행
眼底靑山在, 안저청산재
頭邊白髮生. 두변백발생
鷄窓十年事, 계창십년사
睡醒問殘更. 수성문진경


길을 가다 사예 14조여길15이 도봉서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 도봉서원으로 찾아가서 시에 차운하였다.
말을 세어놓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 들어보니
그대가 도성을 나왔음을 알았네.
마침 계곡 시내를 지나가다가
숲속 길로 들어서버렸네.
눈 아래에 푸른 산이 펼쳐져 있고
머리엔 흰머리가 돋아나는구나.
계창(서재)16에 앉아 십 년의 일을 나누니
졸다 깨다 사경 지나 새벽을 묻는다.

 

(8) 김창협(金昌協, 1651~1708)

枕流堂夜座, 共賦深字. 침류당야좌 공부심자

 

微雪空山歲載陰, 미설공산세재음
高樓木落聽蕭森. 고루목락청소삼
連峰爽氣無昏曉, 도봉상기무혼효
錦石流湍自古今. 금석유단자고금
春服憶遊三月暮, 춘복억유삼월모
夜燈如坐百原深. 야등여좌백원심
白雲興滅君應見, 백운흥멸군응견
休遣浮名罫素襟. 휴견부명괘소금

 

 

밤에 침류당17에 여럿이 앉아 심자를 운으로 시를 짓다.
빈 산 희끗한 눈발이 겨울을 몰고 오네.
높은 누각에 낙엽이 지고 바람 소리 맑네.
잇닿은 산봉우리 상쾌한 기운 아침저녁 한결같네.
비단 같은 바위를 돌아 흐르는 물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
삼월에 놀던 추억이 새롭고
등불은 백원산 깊은 곳에 앉아 있는 듯하네.
그대는 흰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보았나.
마음에 자리 잡은 헛된 명예에 사로잡히지 말게나.

 

(9) 정조(正祖, 생몰 1752~1800, 재위 1776~1800)

 

道峯書院致祭文 도봉서원 치제문18

 

是歲壬子之重陽翌朝. 爲謁光陵. 路出先正文正公趙光祖宋時烈祠前. 還途遣近侍. 侑祭兩賢. 其文曰.
시세임지지중양익조. 위알광릉. 로출선정문정공조광조송시열사전. 환도견근시. 유제양현. 기문왈.

 

壁立之峰, 벽립지봉
如覿靜尤. 여적정우
志在堯舜, 지재요순
義炳陽秋. 의병양추
地與人遭, 지여인조
兩賢一院. 양현일원
曠世之想, 광세지상
殽觴是蕆. 효상시천

 

도봉서원 치제문
1792년 정조 16년 중양절19 다음 날 아침에 세종의 능 광릉에 가던 길에 선대에 추앙받던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한 도봉서원 앞을 지났는데 돌아오는 길에 신하를 보내어 두 현인의 제사에 다음 글을 내려 기리노라.
절벽같이 우뚝 서 있는 봉우리
정암과 우암20을 보는 듯하네.
그들이 품은 뜻은 요순21에 있고
의로움은 춘추22에 밝았네.
땅과 사람이 더불어 만나
두 분을 도봉서원에 모시니.
밝은 세상을 떠올리게 되어
술과 안주를 바치는 것이리.

 


3) 도봉산의 풍광을 그린 시편

 

(1) 김시습(金時習, 1435~1493)

 

道峯尖岫 도봉첨수

 

峯勢嵯牙如劍鋩, 봉세차아여검망
瘦藤老栢凌風霜. 수등로백릉풍상
幡幢杳藹列梵刹, 번당묘애열범찰
雷電閃爍摩靑蒼. 뇌전섬삭마청창
湛湛霜楓惱客眼, 담담상풍뇌객안
霏霏巖溜漱人腸. 비비암류수인장
望中不盡眉宇寒, 망중부진미우한
木落天高回雁行. 목락천고회안행

 


도봉의 뾰족한 봉우리
봉우리의 날카로운 모양이 잘 벼린 칼과 같은데,
시든 등나무와 오래된 잣나무가 바람과 서리를 견디고 있다.
높은 깃발이 여기저기 서 있으니 절들이 많고,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가며 하늘을 스치는구나.
서리 맞아 짙어가는 단풍을 보니 나그네 눈이 괴롭고,
흩날리며 바위를 타고 내리는 물이 사람 속을 씻어주네.
바라봄이 끊임없어 미간이 차갑고,
나뭇잎 떨어지고 하늘 높이 기러기떼는 돌아가는구나.

 

 

(2) 남효온(南孝溫, 1454~1492)

 

馬上口占 마상구점

 

 

二童一馬一蓑笠, 이동일마일사립
藤蔓漫漫路險難. 등만만만로험난
蕎麥離披松峴院, 교맥리피송현원
蒼雲歷落道峯山. 창운력락도봉산
靑囊紅綻木綿白, 청낭홍탄목면백
翠壁黃誇山菊寒. 취벽황과산국한
白日闐闐驚雷過, 백일전전경뢰과
迅風溪雨宿禽還. 신풍계우숙금환

 

 


말 위에서 즉흥으로 읊다
어린 종 둘과 말 한 필 도롱이와 삿갓 쓴 이 한 명
등나무 무성하게 엉켜 가는 길이 험난하구나.
송현원23에는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도봉산에는 푸른 구름이 흩어져 떠 있네.
푸른 자루에 붉은빛 터지고 목면나무는 희어
푸른 절벽에 노란 국화 차게 피어 있네.
대낮 천둥이 소리치며 지나가고
재빠르게 지나가는 바람과 계곡에 내리는 비에
짐승들 집으로 돌아오네.

 


(3) 이행(李荇, 1478~1534)

 

道峯晴雲 도봉청운

 

雲從虛處生, 운종허처생
峰向空中橫. 봉향공중횡
邂逅作媚嫵, 해후작미무
朝日弄新晴. 조일농신청
宴坐自娛翫, 연좌자오완
主人亦忘情. 주인역망정

 


도봉산 맑은 구름
구름은 빈 곳을 따라 생겨나고
산봉우리는 공중을 향해 옆으로 이어져 있네.
구름과 산이 만나 아름다움을 만든다.
아침 해는 맑게 갠 하늘을 비추고
편안하게 앉아 이 풍경을 즐기는
주인 또한 세상의 감정을 잊겠네.

 


(4) 홍언필(洪彦弼, 1476~1549)

 

道峯飛泉 도봉비천

 

百仞懸崖立, 백인현애립
飛泉一道斜. 비천일도사
霆奔風伯馭, 정분풍백어
雷發阿香車. 뇌발아향거
亂沫霑雲衲, 난말점운납
餘流濺岸花. 여류천안화
憑誰問木客, 빙수문목객
何處長仙葩. 하처장선파

 


도봉산의 쏟아지는 샘물
백 길 되는 벼랑이 서 있고,
기울어진 채로 샘물이 날아가네.
풍백24이 말을 몰고 가듯 번개가 차고,
아향25이 수레를 끌 듯 천둥이 소리치네.
흩어지는 물방울이 승려의 옷26을 적시고,
하류로 내려가 물가의 꽃에 흩뿌릴 텐데.
누구에게 나무꾼27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아,
어디에 선파28가 자라고 있는지 알 수 있겠나.

 


(5) 양사언(楊士彦, 1517~1584)

 

道峯暮雪 도봉모설

 

不夕峯雲黑, 불설봉운혹
瑤華滿飛嶂. 요화만비장
今夜駕白鸞, 금야가백란
千尋過仙掌. 천심과선장


도봉의 저녁 눈
저녁이 아니어도 산봉우리 구름이 검어지고
날아갈 듯한 봉우리에 흰 눈이29 가득 얹히네.
오늘 밤은 상상 속의 흰 새를30 타고,
천 길 아득한 선장31을 넘어가겠네.

 


(6) 김상헌(金尙憲, 1570~1652)

 

祝石嶺望道峯 축석령망도봉

淸曉歸程凍雪晴, 청효귀정동설청
道峯高出玉峥嶸. 도봉고출옥쟁영
二年關塞經心處, 이년관세경심처
今日還疑夢裏行. 금일황의몽리행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
푸른 새벽 돌아오는 길 눈은 얼어 맑게 빛나고,
높이 솟은 도봉산은 옥이 솟아오르듯 아름답구나.
이 년 동안 변방에서 늘 그리던 곳이라,
꿈속에서 가는 길인가 오늘 다시 되짚어보네.

 


舍弟仲靜送我至道峯. 臨別書贈. 二首
사제중정송아지도봉. 임별서증. 이수

 

靑門行色惜分携, 청문행색차분휴
相逐征鞍至日西. 상축정안지일서
到處恨聲偏入耳, 도처한성편입이
夾溪乾葉馬飜蹄. 협계건엽마번제

 

君馬蕭蕭我馬悲, 군마소소아마비
路岐分處更躕踟. 노기분처편주지
秋山慘憺寒泉咽, 추산참담한천열
邂逅離人去住時. 해후이인거주시

 


친동생32 중정33이 나를 전송하며 도봉에 닿아 이별이 다가옴에 시 두 수를 써서 주다
도성을 나와 길 떠나니 이별이 아쉬워,
말 뒤를 따라오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네.
이곳저곳에서 한 맺힌 소리 귀에 들어오는데,
계곡엔 마른 낙엽이 지고 말을 뒷굽을 차는구나.

 

자네의 말은 쓸쓸히 울고 나의 말은 슬피 울어,
길 나뉘는 곳에서 또 머뭇거리네.
가을 산은 괴롭고 판 시냇물은 목이 메니,
헤어졌다 만난 이 다시 이별을 해야 하네.

 

(7) 이안눌(李安訥, 1571~1637)

 

憶海村田庄 억해촌전장

 

望長安, 망장안
長安城北雲木攢. 장안성북운목찬
石峯三角高巑岏, 석봉삼각고찬완
下有蝸廬天下寬, 하유와려천하관
蔬一般飯一簞, 소일반반일단
詩書可讀琴可彈, 시서가독금가탄
生死不豊心自歡. 생사불풍심자환
心自歡, 심자환
能不望長安. 능불망장안

 

해촌34 전장35을 기억하다
도성을 바라보자니
도성 북쪽 구름과 나무가 모여 있네.
바위 우뚝한 삼각산36은 가파르게 높아
그 아래 달팽이집같이 누추한 집에 살아도 세상은 넓어
채소 반찬 밥 한 그릇 단출해도
시와 경전을 읽고 거문고도 연주할 수 있으니
살림살이 넉넉하지 않아도 마음은 스스로 기쁘네.
마음이 절로 기쁘니
한양 도성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네.


舟次斗尾, 望道峯山, 喜而有賦.
주차두미 망도봉산 희이유부

 

斗峽舟中望漢城, 두협주중망한성
雲頭一抹道峯橫. 운두일말도봉횡
二年炎海思歸意, 이년염해사귀의
纔見鄕山眼便明. 재견향산안경명

 


배가 두미포37에 닿아 도봉산을 바라보니 기뻐 시를 짓다
두미포 배 안에서 한양 도성을 바라보니,
구름이 도봉산을 가로질러 걸려 있네.
이 년 동안 더운 곳에서 지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이제 고향 산을 바라보니 눈이 더 밝아지네.

 


還東谷新庄 환동곡38신장

 

種瓜裁栗自成村, 종과재율자성촌
田父相過夜打門. 전부상과야타문
聖代一廛甘送老, 성대일전감송노
百年榮落不須論. 백년영락불수론


동곡 새 집에 돌아오다.
오이를 심고 밤을 재배하니 마을이 생기고,
농부는 지나가다 밤에 문을 두드리니
태평한 세상 집 한 채면 노년을 보낼 만하니
한평생 영예와 몰락을 이야기할 것이 있겠는가.

 


(8) 이민구(李敏求, 1589~1670)

 

道峯山歌 寄韓五相. 도봉산가 기한오상39

京城東北道峯山, 경성동북도봉산,
山下一壑溪流潺. 산하일학계류잔.
溪流繚繞靈谷彎, 계류료요령곡만,
轉林觸石鳴玦環. 전림촉석명결환.
中有儒宮白日閒, 중유유궁백일한,
春秋俎豆毛血殷. 춘추조두모혈은.
景仰百代賢士關, 경앙백대현사관,
彼美之子氷雪顏. 피미지자빙설안.
讀書攻苦於其間, 독서공고어기간
丈夫立志繼述刪. 장부립지계술산
豈爲靑紫趨朝班? 기위청자추조반
惜哉古道墜榛菅. 석재고도추진관
翦刈棘茨方秉蕳, 전예극자방병난
力追作者治險艱. 력추작자치험간
欲與濁世鋤姦頑, 욕여탁세서간완
手挽誥盤元氣還. 수만고반원기환
燈火永夜燒香斑, 등화영야소향반
分陰過隙心所慳. 분음과극심소간
男呻女吟隔塵寰, 남신녀음격진환
君肯屑屑來闠闤? 군긍설설래궤환
芳春草生時鳥?, 방춘초생시조관
對酒不見我涕潸. 대주불견아체산
高標未許俗人攀, 고표미허속인반
蒼翠突兀撑雲鬟. 창취돌올탱운환

 


도봉산의 노래, 한오상에게 주다
경성 동북쪽의 도봉산,
그 아래 한 골짝에 시냇물 흐르지.
시냇물이 골짝을 휘감아 굽이지니,
숲 돌며 바위에 부딪혀 옥소리 울리는 듯.
중간에 서원 있어 밝은 해 한가로우니,
봄가을 제사에 희생이 성하지.
영원히 우러러 존모하는 현사의 집에,
저 아름다운 이의 결백한 얼굴이네.
그 사이에서 부지런히 독서하니,
장부가 뜻 세워 선대의 일 이어가네.
어찌 관리로 조정에 나가기 위해서랴
옛 도가 덤불에 떨어짐을 애석해한다네.
가시덤불 잘라 내고 바야흐로 난초 잡고서,
작자를 열심히 따라 험난함 헤쳐 가며,
혼탁한 세상에 간사하고 완악한 이들 없애고자
손수 고반 당겨 원기 돌이킨다.
등불을 밤새 향기롭게 태우시게
눈 깜박할 새에 지나가는 시간을 마음으로 아껴야지.
사람들 신음하는 속세와 떨어졌으니
그대가 어찌 구구하게 저자에 오겠는가.
봄날 풀은 자라고 새들은 지저귀는데
술 마주해도 내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
높은 풍모 속인들이 오를 수 없으니
푸른 봉우리 우뚝하게 구름에 닿았네.

 

 


(9) 박세당(朴世堂, 1629~1703)

 

道峯 도봉

 

不識溪西山幾重, 부식계서산기중
森森倚疊玉芙蓉. 삼삼의첩옥부용
我家住在東岡下, 아가주재동강하
門對當頭第一峯. 문대당두제일봉

 


도봉산
시내 건너 서쪽 산들이 몇 겹인지 모르겠네,
마치 눈부신 흰 연꽃이 빼곡하게 들어찬 듯,
나의 집은 동쪽 언덕 아래,
문을 열면 도봉이 정면으로 보이네.

 


道峯 도봉

 

六六嵩岑低筆格, 육육승잠저필격
三三廬阜小屛風. 삼삼려부소병풍
參差重疊雲霞外, 참치중첩윤하외
碧玉芙蓉揷滿空. 벽옥부용삽만공

 


도봉산
서른여섯40 봉우리 붓을 걸어놓는 기구보다 낮고,
아홉 봉우리41는 작은 병풍에 지나지 않네.
구름과 안개 위로 들쭉날쭉 겹겹이 솟아,
옥같이 맑은 연꽃을 하늘에 심어놓은 듯하네.

 


望道峯作 망도봉작

 

奇巧心偏怪化翁, 기교심편괴화옹
幾般摶弄妙難窮. 기반단롱묘난궁
萬形掩翳黃塵下, 만형엄예황진하
一骨嵯峨碧落中. 일골차아벽락중
看月不妨人界黑, 간월불방인계흑
散花長得佛天紅. 산화장득불천홍
半崖松老危巢倒, 반애송로위소도
數片雲隨鶴背風. 수편운수학배풍

 


도봉산을 바라보고 짓다
이상하구나 조물주가 제멋대로 조화를 부려
마음대로 오밀조밀하게 꾸밈이 끝이 없다.
모든 형상이 땅 밑에 가려 있었는데
오롯이 뼈 하나처럼 공중에 솟아오르니
달을 보면 인간사 어두운 일 부질없고
꽃을 뿌리며 부처님 공덕을 기리면 극락이 붉어
바위 중턱 소나무가 홀로 늙어 넘어질 듯
학 등 뒤로 부는 바람이 조각구름이 뒤따르네.

 


天柱峯 천주봉

 

 

道峯. 拔地干霄. 劍立千嶂. 造化奇巧. 獨偏於此
도봉. 발지간소. 검립천장. 조화기교. 독편어차
(…)
舊云萬丈是峯名, 구운만장시봉명
要與新名更稱情. 요여신명경칭정
却遣天無柱亦得, 각견천무주역득
擎高誰與此峯爭. 경고수여차봉쟁
(…)

 


천주봉43
도봉산은 땅에서 솟구쳐 올라 칼끝처럼 뾰족하게 우뚝하니 조물주가 이곳에만 솜씨를 보였다.
(…)
예전에 천주봉은 만장봉이라 불리었는데
새 이름을 지는 것이 실정에 맞을 것 같다.
하늘에 기둥이 없어도 될 만큼 우뚝하니
누가 이 봉우리보다 높은 산이 있다 하겠는가.
(…)

 

 


將之岳麓村居. 早春雨中. 望道峯諸山.
장지악록촌거. 조춘우중. 망도봉제산

 

 

春雲底拂澗水流, 춘운저불간수류
點點遙山雨外浮. 점점요산우외부
細草欲生纔戴甲, 세초욕생재대갑
幽花未發己苞頭. 유화미발기포두
荒園水畝無人種, 황원수무무인종
老屋三間借客留. 노옥삼간차객유
獨去獨來還自愧, 독고독래환자괴
十年蹤迹漫悠悠. 십년종적만유유

 


비 오는 이른 봄 산 중턱 집으로 가다가 도봉의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다
봄바람 계곡 물에 내려 스쳐 지나가고
빗줄기 너머로 산봉우리는 점점이 떠 있네.
가느다란 풀들은 돋으려 껍질을 만들고
그윽하게 꽃 피우기 위해 망울로 맺히네.
황량한 정원을 가꾸는 사람 없어
세 칸 되는 낡은 집 나그네에게 주었네.
홀로 오고 홀로 가는 일 부끄러우니
십 년의 행적이 다만 멀기만 할 뿐.

 


(10) 윤증(尹拯, 1629~1714)

 

寄朴季肯世堂 기박계긍세당

 

道峯曾有約, 도봉증유약
牛浦遽回驂. 우포거회참
跡蟄煩還怕, 적칩번환파
名浮驟更慙. 명부취경참
心期言不盡, 심기언부진
睽闊悵難堪. 규활창난감
冉冉時將暮, 염염시장모
棲棲又向南. 서서우향남


박세당에게 주다
도봉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우포44에서 갑자기 말을 돌리게 되었네.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살아 번잡한 것이 두려운데
허명에 뜬 내가 부끄러워지네.
마음속 말을 다하기 어려운데
만나기가 어려워 슬프기만 하네.
느릿느릿 한 해가 저물어가는데
나는 또 종종걸음 남으로 향하고 있네.

 


(11) 김수항(金壽恒, 1629~1689)

 

偶吟寄道峯諸友 우음기도봉제우

群明星散各風煙. 군명성산각풍연
獨閉衛門守太玄. 독폐위문수태현
落葉滿庭人跡斷. 낙엽만정인적단
道峯秋色夕陽變. 도봉추색석양변


우연히 도봉의 여러 친구에게 시를 보내다
별무리처럼 친구들 흩어져 모두 바람과 연기가 되었네.
홀로 문 닫아걸고 큰 뜻을 지키고 있네.
뜰에 가득 낙엽이 쌓이고 인적은 끊겨
석양빛 비껴가는 도봉산의 가을빛이네.

 


(12) 권상하(權尙夏, 1641~1721)

 

仲春與李啓以 光夏 同遊道峯 己酉
중춘여이계이 광하 동유도봉 기유

步屧尋山逕, 보섭심산경
層巖面面奇. 층암면면기
水聲移席聽, 수석이석청
禽語隔林知. 금어격림지
地到孤菴盡, 지도고암진
峯臨絶壑危, 봉임절학위
前溪花意懶, 전계화의라
重賞暮春期. 중상모춘기

 


기유년(1669) 음력 이월 45이광하46와 함께 도봉에 놀러 가다
나막신 신고 산길을 찾아 가니
층층으로 쌓인 바위 기이하구나.
자리를 옮겨도 물소리 들리고
숲에서 우는 새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겠다.
길 끝나는 곳 외로운 암자
골짜기 끝 봉우리는 험하여
시내 앞 꽃은 아직도 피지 않아
다시 늦봄에 구경하려고 하네.

 


(13) 김창협(金昌協, 1651~1708)

 

入道峯 입도봉

 

桃花三萬樹 도화삼만수
似入武陵行 사입무릉행
流水何時有 유수하시유
荒塗自古橫 황도자고횡
日斜羸馬緩 일사리마완
風暖裌衣輕 풍난겹의경
十六年前面 십육년전면
蒼峯刮眼明 창봉괄안명

 


도봉산에 들어서다
삼만 그루의 복사꽃
마치 무릉도원에 가는 듯
시냇물은 언제부터 흘렀나
거친 길은 오래전부터 가로질러 있었지.
해 저물어 지친 말은 걸음이 늦고
따스한 바람 겹옷이 가벼워
십육 년 전에 왔던 산을 다시 만나니
푸르고 푸른 산봉우리 눈이 밝아지네.

 


余之在道峯也. 子益與士敬諸人. 爲三角之遊. 約自妙峰庵來會. 是日雨作不果. 至凝佇之久, 悵然有作, 壬戌.
여지도도봉야. 자익여 사경제인. 위삼각지유. 약자묘봉암래회. 시일우작불과. 지응우지구, 창연유작, 임술.

 

萬丈峯頭西日照, 만장봉두서일조
冥冥運氣散猶遲. 명명운기산유지
好雨不應愁客意, 호우불응수객의
春山無那有佳期. 춘산무나유가기
隔林黃鳥空千囀, 격림황조공천전
近水桃花亦一時, 근수도화역일시
把酒吟時唯爾待, 파주음시유이대
攀蘿跂石摠想思. 반라기석총상사

 


임술년 (1682년) 내가 도봉산에 있을 때 자익47과 사경48 등 여러 사람이 삼각산을 유람하기 위해 묘봉암49에서 와서 모이기로 하였다. 마침 이날 비가 와서 그들이 오지 못하였다. 우두커니 그들을 오래 기다리다가 섭섭한 마음을 시로 짓다.
만장봉 산꼭대기 저녁 햇살 비치고
짙은 먹구름은 어찌 저리 더디게 흩어지는가.
봄비는 수심 가득한 객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봄 산이 우리의 만남을 어찌 알겠는가.
숲 사이로 꾀꼬리는 울어대고
물가의 복사꽃도 한철인데
그대들과 술잔 들고 시 읊으며
오로지 넝쿨을 잡고 바위를 오르는 생각일 뿐이네.


翼日子益與諸人至 익일자익여제인지

 

迢迢妙峰庵, 초초묘봉암
肅肅道峯祠. 숙숙도봉사
山行各異路, 산행각이로
中谷會有期. 중곡회유기
冥冥昨日雨, 명명작일우
雲霧東西迷. 운무동서미
山蹊兩阻絶, 산혜양조절
去來不可知. 거래불가지
悵望日向夕, 창망일향석
徙倚空想思. 사의공상사

 


다음 날 자익이 여러 사람과 왔다.
묘봉암이 높은 곳에 솟은 듯
도봉서원은 엄숙해
산행 길이 저마다 달라
골짜기에서 만나기로 하였네.
어제는 어두운 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동서를 가눌 수 없어.
산길이 서로 막히고 끊겨
오는지 가는지 알 수가 없어.
지는 해 참담하게 바라보면서
서성대며 그대들 생각했었네.


待友 대우

 

洞裏仙家住白雲, 동리선가주백운
桃花紅落雨紛紛. 도화홍락우분분
佳期悵望知何許, 가기창망지하허
萬丈峯西日已曛. 만장봉서일이훈


친구를 기다리며
골짜기 안 신선의 집 흰 구름
복사꽃 비처럼 우수수 떨어지네.
이 좋은 계절 친구는 언제 오나 서글퍼
만장봉 저녁 해는 어두워지는데.

 


川上夜飮. 得霄字共賦 천상야음 득소자공부50

 

春山暝色曖微霄, 춘산명색애미소
白石傳杯坐夜遙. 백석전배좌야요
天外數峯搖酒緣, 천외수봉요주연
月華先著最高標. 월화선저최고표

 


시냇가에서 밤에 술을 마시다가 문득 소(霄, 하늘) 자 운을 얻어 같이 시를 지었다.
봄 산 어두워지고 하늘은 흐릿해
흰 바위에 앉아 술잔 돌리며 노네.
하늘 끝 여러 봉우리 술잔에 흔들리고
달빛은 맨 처음 제일 높은 봉우리 비추이네.

 

(14) 김창업(金昌業, 1658~1721)

 

道峯紀遊 도봉기유

 

我居在東皐. 아거재동고
朝夕望道峯. 조석망도봉
佳遊偶有詩. 가유우유시
今日理我筇. 금일리아공
微雨濕春服. 미우습춘복
濛濛自遠松. 몽몽자원송
良鷹在馬前. 양응재마전
二子俱願從. 이자구원종
行行近谷口. 행행근곡구
碧澗來淙淙. 벽간래종종
下馬入紅門. 하마입홍문
緣岸草芳茸. 연안초방이
隱隱鷄犬聲. 은은계견성
春林信幾種. 춘림신기종
人家在深處. 인가재심처
高下桃花穠. 고하도화농
籬落儼相映. 이락엄상영
田疇橫復從. 전주횡복종
同行相顧喜. 동행상고희
異境於焉逢. 이경어언봉
拂石開我壺. 불석개아호
遊興頗從容. 유흥파종용
仰觀萬丈峯. 앙관만장봉
亭亭揷芙蓉. 정정삽부용
下有靜庵祠. 하유정암사
肅穆森檜棕. 숙목임창종
俎豆餘百年. 조두여백년
儒林所同宗. 유림소동종
整衣詣中庭. 정의예중정
再拜前敬恭. 재배전경공
小憩枕流堂. 소게침류당
水石相撞舂. 수석상당용
西崖華陽筆. 서애화양필
挐若虯龍蹤. 여약규용종
伯父八分古. 백부팔분고
相對森劍鋒. 상대삼검봉
丹彩煥一谷. 단채환일곡
難爲苔蘚封. 난위태선봉
氣像有可想. 기상유가상
悚然起我慵. 송연기아용
憶昔遊此日. 억석유차일
氣溢紅顔丰. 기일홍안봉
走馬遺玉簪. 주마유옥잠
回首笑凡庸. 회수소범용
往事不足道. 왕사부족도
俛仰成龍鍾. 면앙성룡종
諸生出相揖. 제생출상읍
靑衿衣肅雍. 청금의숙옹
家姪善已至. 가질선이지
爲我具朝饔. 위아구조옹
亭午霽景美. 정오재경미
相携向回龍. 상휴향회룡
佳朋如期至. 가붕여기지
好事惬幽悰. 호사협유종
緩步入心蘿. 완보입심라
視見綠潭溶. 시견록담용
兩崖若丹靑. 양애약단청
中峯空翠濃. 중봉공취농
懸流界壁脉. 현류계벽맥
異卉綴巖縫. 이훼철암봉
繫馬一古松. 계마일고송
遙心精舍鐘. 요심정사종
山僧迎客坐. 산승영객좌
澗菜烹以供. 간채팽이공
鳴鳩繞古塔. 명구요고탑
洛花積頹埇. 낙화적퇴용
春物自加愛. 춘물자가애
何須際秋凍. 하수제추동
嗟我多盡勞. 차아다진로
半世事佃傭. 반세사전용
慈遊始蕭山. 자유시숙산
雲霞盪煩胸. 운하탕번흉
傲然玩天地. 오연완천지
安知物非儂. 안지물비농
隨喜慕何顒. 수희모가옹
願言永栖遲. 원언영서지
爲我謝老農. 위아사노농

 


도봉산을 유람하다.51
내가 동고에 살 때
매일 도봉산을 바라보았네.
아름다운 유람에 우연하게 다가오는 시도 있을 터
오늘 나는 짐을 꾸렸네.
가랑비는 내려 봄옷을 적시우고
자욱하게 저 먼 곳 소나무를 덮네.
날쌘 매를 말 앞에 두고
두 사람이 함께 가기를 원하니
계곡 가까이 걸어 닿아
푸른 계곡 물이 흘러 내려오네.
말에서 내려 홍살문52을 지나니
푸른 언덕에 풀들이 파릇파릇하다.
은은하게 들리는 닭 우는 소리
봄 숲은 참으로 깊어 몇 겹인지
인가는 깊은 곳에 있어
높은 그곳에 도화가 한창 피었네.
울타리 아래 밝게 서로를 비추며
밭이랑에 가로세로로 얽혀 있네.
함께 가는 이들 모두 서로 돌아보며 기뻐하니
아름다운 풍경을 여기서 만나네.
돌을 털어내고 술동이를 여니
유람하는 즐거움이 즐겁기만 하구나.
만장봉을 우러러보니
우뚝한 것이 마치 연꽃이 꽂혀 있는 듯하네.
저 아래 정암53 선생을 모신 서원이 있으니
숙연하게 전나무숲이 울울하네.
조광조 선생을 도봉서원에 모신 지 백 년인데
유학을 받드는 이들이 그 뜻을 따르네.
옷을 정갈히 하고 뜰로 나아가
공경함을 두 번 절로 표하네.
침류당에서 잠시 쉬고
계곡 물과 바위가 서로 부딪치네.
양쪽 벼랑에 새긴 우암54의 글씨는
굳고 힘찬 것이 어린 용이 꿈틀대는 것 같고
백부55 곡운56의 필체도 고색이 가득하니
서로 그 글씨들이 마주하는 모습이 칼끝처럼 첨예하다.
계곡에 단청과 채색이 어우러지니
이끼로 다 덮을 수가 없네.
그 선인들의 기상을 상상하면
마음 조아려 나의 게으름을 일깨우게 되네.
오래전 이곳에서 놀던 생각을 떠올리니
그때는 기운이 넘치고 맑은 얼굴은 아름다웠는데
달리는 말은 옥비녀를 남기고
머리를 돌려 떳떳지 못한 내 마음을 비웃네.
지난 일 말해 무엇하리
잠깐 사이에 늙고 병들었네.
여러 서생이 나와 절을 하니
선비들의 뜻이 숙연하다.
집안 조카가 먼저 와서
내 아침 밥상을 차려주었다.
정오가 되자 개인 경치가 아름다워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룡을 향해 갔다.
약속한 대로 벗들은 도착하고
그윽한 정에 흡족하니 좋은 일이네.
천천히 걸어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초록으로 빛나는 못의 풍경을 보네.
계곡 양쪽의 벼랑은 단청을 두른 듯하고
가운데 봉우리 짙은 푸름이네.
바위에 핀 꽃들은 바위를 바느질로 깁는 듯
말을 소나무에 묶어두고
종소리를 좇아 절을 찾아 들어가니
스님은 손님을 자리에 앉히고
산나물은 삶아 차려주네.
비둘기는 울며 오래된 탑을 돌고
무너진 담에 꽃잎이 쌓이네.
봄은 저리 스스로 사랑스러워
어찌 가을 겨울을 기다리겠는가.
세상살이에 수고로웠으니
반평생을 일에 끌려다녔구나.
기행을 하다 보니 이제야 마음이 쓸쓸해
구름과 지는 노을이 답답한 심사를 씻어주는구나.
흠칫 여유롭게 이 천지를 즐기니
어찌 남이 내가 아님을 알겠느냐.
산수시의 대가 사강락57처럼
엄숙하게 그를 따라 기뻐할 것이니
바라기를 그 길에 깃들기를
나를 위하여 늙은 농부에게 사례하게나.

 


(15) 김창집(金昌緝, 1662~1713)

 

道峯得林字 도봉득림자

 

昨得道峯信. 작득도봉신
桃花正滿林. 도화정만립
欣然起衰病. 흔연기쇠병
不覺造幽深. 불각조유심
雨後冷冷澗. 우후령령간
雲中落落岑. 운중락락잠
虛樓爲俯仰. 허루위부앙
相見古人心. 상견고인심

 


도봉산에서 임(林) 자를 얻었다.
어제 도봉산 소식을 듣고 보니
복사꽃이 숲에 가득히 피었다 하여
기쁜 마음으로 늙은 몸을 일으켜
깨달을 새도 없이 깊고 깊은 곳으로 갔네.
비 오고 난후 계곡 물은 맑게 흐르고
구름 속에 봉우리들은 우뚝하다.
비어 있는 누에 올라 올려보고 굽어보면서
옛 선인들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16) 정조(正祖, 생몰 1752~1800, 재위 1776~1800)

 

萬丈峯 만장봉

 

大龍抽正榦 대룡추정간
千里勢蜿蜒 천리세원연
劍佩趨環闕 검패추환궐
珪璋斂拱天 규장렴공천
基宏於萬世 기굉어만세
功博屢豊年 공박루풍년
過路聞絃誦 과로문현송
剩敎一壑專 잉교일학전


만장봉
큰 용이 곧은 줄기를 뽑아
그 모습이 천 리나 뻗쳤다.
마치 칼을 차고 궁궐을 호위하듯
예식의 귀한 옥처럼 의연히 하늘을 우러르는 듯
만대에 이르는 공적이 크고
해마다 풍년이 드니 공적이 넓네.
지나가는 길에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이 골짜기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네.

 


(17) 정약용(丁若鏞, 1762~1836)

 

耽津村謠 탐진촌요

 

樓犁嶺上石漸漸. 누리령상석점점
長得行人淚灑沾. 장득행인루쇄점
莫向越南瞻月出. 막향월남첨월출
峯峯都以道峯尖. 봉봉도이도봉첨
山茶接葉冷童童. 산다접엽냉동동
雪裏花開鶴頂紅. 서리화개학정홍

 


탐진58촌요
누리령59 마루턱에 바위가 점점이 솟았는데
오가는 길손이 뿌린 눈물로 늘 젖어 있구나.
남쪽을 향하여 월출산을 보지 말아라
봉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도봉산의 모습이니
산다화 잎이 얼어도 무성하게 파릇
눈 속에 꽃이 필 때의 모습은 그 붉음이 학의 이마 같다.


到山亭 도산정

 

病骨支離著一床. 병골지리착일상
筍輿伊軋到山堂. 순여이알도산당
路傍荒塚秋花壁. 노방황총추화벽
籬下回塘早稻香. 이하회당조도향
筋力只堪具穩寢. 근력지감구온침
狂癡每欲逐歡場. 광치매욕축환장
道峯水落多蘭若. 도봉수락다란야
一夢西風引興長. 일몽서풍인흥장

 


산에 오르다.
병이 낫지 않아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삐걱대는 대나무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니
길가의 이름 모를 무덤가에 가을꽃이 푸르고
울타리 아래 못에는 이른 벼 향기
힘이 없어 편히 누울 수 있으면 기쁜데
어리석고 미친 마음은 놀기 좋은 곳으로 달려가네.
도봉산 수락산엔 수행하기 좋은 곳60이 많아
한바탕 서쪽 바람 꿈에 흥이 돋아 오르네.


4) 도봉각석군(道峯刻石群)

 

각석(刻石)은 바위에 글씨나 그림을 새긴 것을 말한다. 각석은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나타나는데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봉산 계곡의 각석군은 도봉서원이 세워지면서 이곳을 찾은 유학자들이 도봉산의 풍광을 보고 감회를 남기거나 유학(儒學)의 전거(典據)를 새긴 것들로, 도봉서원 터를 중심으로 계곡 700m 내에 산재해 있다. 주로 17~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대 유학자의 사상적 숨결이 오롯이 각자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더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11개로 도봉산 초입의 도봉동문 이외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 도봉산 바위글씨(출처 : 한성백제박물관)

 

(1) 도봉동문(道峯洞門)

 

도봉산 초입 도봉서원 가는 길에 있다. 송시열의 친필로, 동문(洞門)은 마을의 입구를 뜻하는 것으로 도봉서원으로 들어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도봉동문(사진 : 도봉문화원)

 

 

 

(2) 용주담(舂珠潭)

도봉동문에서 계곡 상류 150m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작자는 알 수 없다. 계곡의 맑은 물이 구슬처럼 떨어지며 못을 이룬 풍경을 이른 것이라 보인다.


■ 용주담(사진 : 도봉문화원)

 

(3) 필동암(必東岩)

 

필자는 알 수 없다.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글자이다. 만절필동은 강물이 만 번 이상 굽이쳐 흘러도 결국 동쪽으로 가 바다에 닿는다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明)나라에 대해 사의를 표한 선조(宣祖)의 글이 있다. 만절필동은 어떤 일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고사성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 필동암(사진 : 도봉문화원)

 

(4) 제일동천(第一洞天)·동중즉선경(洞中卽仙境)·연하농처동문개(煙霞籠處洞門開)

 

동천은 아름다운 장소를 말한다. 제일동천은 도봉서원이 있는 이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동천의 선경이(동중즉선경) 연기와 같은 안개가 자욱한 언덕에 도봉서원이 개창되었음을 뜻한다(연하농처동문개).

 


■ 제일동천·동중즉선경·연하농처동문개(사진 : 도봉문화원)

 

(5) 연단굴(鍊丹窟)

 

필동암의 서쪽 측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연단은 도교(道敎)에서 불로장생의 약을 만드는 일로서 유학에서는 깊은 수학(修學)을 통해 도(道)에 이르는 경지를 뜻한다.

■ 연단굴(사진 : 도봉문화원)

 

 

(6) 만석대(萬石臺)

 

연단굴 각석 북쪽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필자는 미상이다. 도봉산의 우뚝한 봉우리들을 표현한 글귀다.

 

■ 만석대 각석 전경(사진 : 도봉문화원)

■ 만석대(사진 : 도봉문화원)

 

(7) 무우대(舞雩臺)

 

도봉서원 터 남쪽 계곡에 있다. 타원형 바위에 세로로 무우대(舞雩臺), 가로로 제월광풍갱별전(霽月光風更別傳), 요장현송답잔원(聊將現送答潺湲)이 새겨져 있다.
무우대는 중국 노나라 때 기수(沂水)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논어> 선진(先進) 편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말하라 하였을 때,(반점) 증점(曾點)이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늦봄에 옷이 만들어지면 갓 쓰는 대여섯과 어린아이 여성이나 일곱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무우에 가서 바람 쐬며 흥얼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무우대 글씨는 조선 후기 문신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썼다. 제월광풍갱별전(霽月光風更別傳), 요장현송답잔원(聊將現送答潺湲)는 송시열이 썼다. 이 글귀는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가 백록강회에서 백록강회자복장운(白鹿講會次卜丈韻) 제자들에게 공명에 치우치지 않는 공부를 당부하며 쓴 시에서 두 구절을 따온 것이다. 송시열 또한 도봉서원에서 제자들에게 주희의 강론을 받들면서 이 시귀를 밝히고 각(刻)하였다.

 

▶霽月光風更別傳. 제월광풍갱별전
聊將絃誦答潺湲. 요장현송답잔원

 

날 개어 달 밝은 바람 특별히 전하라.
오로지 거문고 뜯고 노래하며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화답하네.▶

■ 무우대(사진 : 도봉문화원)

 

(8) 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洙泗眞源)

무우대 인근 서쪽 바위에 새겨져 있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필적(筆跡)이다. 염락은 지명(地名)으로 중국의 염계(濂溪)와 낙양(洛陽)을 말하며 유학자 주돈이와 그의 제자 정호, 정이 형제가 공부하던 곳이다. 수사(洙泗) 공자의 학문을 말한다. 따라서 이 글귀는 송나라 유학의 부흥의 근원이 공자의 유학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염락정파 수사진원(사진 : 도봉문화원)

 

(9) 광풍제월(光風霽月)

 

▶舂陵周茂叔, 용릉주무숙
其人品甚高, 기인품심고
胸懷灑落, 흉회쇄락
如光風霽月. 여광풍제월▶

 

용릉의 주무숙은 그 인품이 광하기가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과 같다. 주무숙은 송나라의 유학을 열었고 태극도설을 통하여 우주의 본체를 규명하는 학문에 힘썼다, 북송(北宋)시대 황정견(黃庭堅)의 <예장집(豫章集)> ‘염계시서(濂溪詩序)’에 나온다. 이 각은 이재(李縡, 1680~1746)가 썼다.

■광풍제월(사진 : 도봉문화원)

 

(10) 고산앙지(高山仰止)

 

광풍제월 각자 서쪽 작은 돌에 새겨져 있다.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썼고,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의 구절에서 따왔다.

 

▶高山仰止, 고산앙지
景行行止. 경행행지
雖不能至, 수부능지
心向往至. 심향왕지

 

높은 산 우러르며
큰길을 가네.(마침표)
끝내 다다를 수 없을지라도
마음은 항상 그곳을 향하네.(마침표)▶

 


■ 고산앙지(사진 : 도봉문화원)

 

(11) 복호동천(伏虎洞天)

 

도봉계곡 가장 상류의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고 엎드린 호랑이(복호)처럼 학문에 뜻을 두는 것은 세속적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동천은 도봉서원을 뜻한다.


■ 복호동천(사진 : 도봉문화원)


4. 결어

 

도봉산을 중심으로 하는 시문학은 조선 건국 전 자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도봉산은 이미 저 멀리 신라 때부터 산세의 수려함과 유현한 심처로서 천축사, 영국사 같은 사찰의 건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개창되고 난 후 도성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수려한 경광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도봉서원이 건립되면서 수많은 유학자가 도봉서원을 드나들면서 남긴 작품들이 상당하고 특히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각석군이 남아 있어 오늘날에 삶의 귀감으로 삼을 수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한문으로 만들어진 시들이 현대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정취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해독(解讀)의 어려움이 있는 점을 감안하여 가급적 현대의 어법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의역을 병행하였고, 용어나 인물 등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간단한 주석을 붙여놓았다. 이 글의 말미에는 언급된 인물의 간략한 설명을 달아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한 독자들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이다. 앞으로 더 많은 사료가 발굴되고 또 이 글에 언급되지 않은 현대 시인들의 시편이 다수 생산될 것으로 예상되는 바, 앞으로도 수정 보완을 수행해나갈 것을 약속드린다.

 

♧인명 색인(人名 索引)

 

1. 영국사 관련 시편

 

1) 혜거국사(慧炬國師)

 

생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 광종 때 활동한 승려로 도봉산 영국사에 주석한 것으로 <혜거국사비> 탁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시대의 승려로 혜거(惠居)가 있는데 여러 연구 결과로 보아 동일인임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김수온(金守溫), 1410(태종 9)~1481(성종 12)

 

조선의 문신, 학자.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서거정, 강희맹 등과 쌍벽을 이루었다.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불경의 번역에도 큰 업적을 이루었다. 저서로는 <식우집(拭疣集)>이 있다.

 

3)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1488(성종 10)

 

조선의 문신, 학자. 문장과 글씨가 훌륭했고,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대구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가정집(四佳亭集)>이 있다.

 

4) 남언경(南彦經), 1528(중종 23)~1594(선조 27)

 

1573년 양주목사로 임용되어 도봉서원 건립에 힘을 쏟았다. 후에 유희경(劉希慶)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2. 도봉서원 관련 시편

 

1) 조광조(趙光祖), 1482(성종 13)~1519(중종 14)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김종직의 학풍을 이어받은 사림파. 유학을 통한 정치와 교화(敎化)를 실현하고자 하는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인 성향으로 훈구파(勳舊派)의 공격을 받아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도봉서원에 제향되었다.

 

2) 유희경(劉希慶), 1545(인종 1)~1636(인조 14)

 

호는 촌은(村隱).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을 내었고, 예(禮)에 밝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부안의 명기 매창과의 교유가 있었고, 말년에는 도봉산에서 은거하였다고 하나 자취를 찾을 수는 없다. 저서로 <촌은집(村隱集)>이 있다.

 

3)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호는 백사(白沙).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전란의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청백리(淸白吏)로서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사집(白沙集)>이 있다.

 

4) 최립(崔岦),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자(字)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 동고(東皐). 시재(詩才)가 출중하였으나 교만하였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간이집(簡易集)>이 있다.

 

5) 이정구(李廷龜), 1564(명종 19)~1635(인조 13)

 

문신, 학자. 자주 중국의 사신으로 나가 명나라 문사들의 청을 받아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했다. 한문학의 대가로 글씨가 특히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월사집(月沙集)>이 있다.

 

6) 이식(李植), 1584(선조 17)~1647(인조 25)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이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金尙憲)과 더불어 척화론(斥和論)을 폈다. 조선 중기 한문학의 대가로, 저서로 <택당집(澤堂集)>이 있다.

 

7)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노론의 영수(領袖)이다. 기호학파인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았다. 강상윤리(綱常倫理)를 강조하고 청나라를 배격하는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호는 우암(尤庵)이다. 저서로는 <송자대전>이 있다.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8) 조가석(趙嘉錫), 1634(인조 12)~1681(숙종 7)

 

자는 여길(汝吉), 호는 태촌(苔村).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이다.

 

9) 박세당(朴世堂), 1629(인조 7)~1703(숙종 29)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 서계초수(西溪樵叟), 서계. 병란으로 말미암은 곤궁한 삶과 현실정치의 혼란은 주자학에 대한 회의와 반론으로 이어졌고 송시열과 같은 노론들의 공격을 받아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노장(老莊)에도 깊은 사유를 가졌고 개혁적인 실학의 실천에 힘써 농촌생활을 토대로 한 지식이 남달랐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이 있다.

 

10)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문장가, 문신. 김상헌의 증손자이며, 아버지 수항과 형 창집(昌集)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육창으로 불리는 여섯 형제 중에 특히 창협의 문장이 뛰어났고, 동생 창흡(昌翕)의 시 또한 출중한 경지를 보였다. 저서로는 <농암집(聾巖集)>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이 있다. 양주의 석실서원, 영암의 녹동서원에 제향되었다.

 

11) 정조(正祖), 1752년(영조 28)~1800년(정조 24)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이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이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면서도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기만 하면 당파에 상관없이 중용하였다. 화성 천도 등 강력한 개혁정치를 계획하였으나 1800년 49세에 급서함으로써 그 꿈은 무산되었다.

 


3. 도봉산의 풍광을 그린 시편

 

1) 김시습(金時習), 1435년(세종 17)~1493년(성종 24)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조선 전기의 문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자 중이 되었고, 1481년 환속하였다. 불교와 유교에 두루 능통하였다. 저서로 <매월당집(梅月堂集)>, <금오신화(金鰲新話)>,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반점추가) 등이 있다.

 

2)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1492(성종 23)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행우(杏雨), 최락당(最樂堂), 벽사(碧沙).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사육신의 의절을 기린 <육신전(六臣傳)>을 간행했다. 저서로는 <추강집(秋江集)>,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귀신론(鬼神論)>(반점추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 이행(李荇), 1478(성종 9)~1534(중종 29)

 

조선 전기의 문신.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펴내는 데 참여했고 1531년 유배지에서 죽었다. 문장이 뛰어나 자유롭고 신선한 시상과 기교가 돋보이는 작품을 남겼다,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용재집(墉齋集)>이 있다.

 

4) 홍언필(洪彦弼), 1476(성종 7)~1549(명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자미(子美), 호는 묵재(默齋)이다.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났다. 저서로 <묵재집(默齋集)>이 있다.

 

5) 양사언(楊士彦),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의 문신.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 그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오늘날에도 애송되고 있다. 저서로 <봉래집(蓬萊集)>이 있다.

 

6)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청나라를 배격한 척화론자이다.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 <청음집(淸陰集)>이 있다.

 

7) 이안눌(李安訥), 1571(선조 4)~1637(인조 15)

 

학자, 문신.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좌의정 이행(李荇)의 증손이다. <동악집(東岳集)> 26권이 있다.

 

8) 한오상(韓五相), 1606(선조 39)~1672(현종 13)

 

효자로 이름이 났다.

 

9) 이민구(李敏求), 1589(선조 22)~1670(현종 11)

 

문신이며 시부에 능했다. 자는 자시, 호는 동주, 관해(觀海). 저서로 <동주집(東州集)> <독사수필(讀史隨筆)> 등이 있다.

 

10) 윤증(尹拯), 1629(인조 7)~1714(숙종 40)

 

문신, 학자. 자는 인경(仁卿),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유봉(酉峰). 소론의 영수로 송시열의 노론과 대립하였다. 저서로 <명재유고(明齋遺稿)>, <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반점추가) 등이 있다. 홍주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1) 김수항(金壽恒), 1629(인조 7)~1689(숙종 15)

 

문신.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문충(文忠)이다. 송시열과 함께 노론(老論)을 이끌었다. 김상헌의 손자이며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진도(珍島)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저서로는 <문곡집(文谷集)>이 있다.

 

12) 권상하(權尙夏), 1641(인조 19)~1721(경종 1)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 한수재(寒水齋), 문순(文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전통을 이어받은 문신이다. 저서로 <한수재집(寒水齋集)>이 있다.

 

13) 김창업(金昌業), 1658(효종 9)~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노가재(老稼齋). 영의정 수항(壽恒)의 4남이며,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의 동생으로 시재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다. 저서로 <노가재(老稼齋)집>이 있다.

 

14) 김창즙(金昌緝), 1662(현종 3)~1713(숙종 39)

 

자는 경명(敬明), 호는 포음(圃陰)이다. 김수항의 아들로 1710년 왕자의 사부(師溥)를 지냈다. 저서로 <포음집(圃陰集)>이 있다.

 

15) 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문신.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 탁옹(籜翁), 태수(苔叟),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다산(茶山), 시호는 문도(文度). 유형원(柳馨遠)으로 시작하여 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실학사상을 계승하여 실학을 집대성했다. 신유사옥 때 유배되어 18년의 유배 기간 동안 저술에 힘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생존 당시 민중의 어려운 삶을 목도하면서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의지는 정조의 급서로 좌절되었지만 그가 남긴 사상은 오늘날에도 꿋꿋한 지표가 되고 있다.

 

16) 송준길(宋浚吉), 1606(선조 39)~1672(현종 13)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문정(文正).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아 송시열과 함께 활동하였다. 예학(禮學)에 밝았고 문장에도 능통하였다. 저서로는 <동춘당집(同春堂集)>, <어해록(語解錄)>(반점추가) 등이 있다.

 

17) 이재(李縡), 1680(숙종 6)~1746(영조 22)

 

학자이자 문신.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 한천(寒泉), 문정(文正). 김창협의 문인으로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이다. 이이의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산정했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반점추가) 등이 있다.

 

주석

 

1)서기 971년 고려 광종 22년 임금이 조칙을 내려 국내의 사원 중 세 곳은 문하의 제자들이 주지를 상속하여 대대로 법통이 끊기지 않도록 규율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그 세 곳은 고달원(高達院), 희양원(曦陽院), 도봉원(道峯院)이다. “乾德九年 歲次辛未 十月 二十一日 於元和殿, 開讀, 大藏經時, 皇帝陛下, 詔曰, 國內寺院, 唯有三處, 只留不動, 門下弟子相續, 住持代代不絶, 以此爲矩, 所謂, 高達院, 曦陽院, 道峯院.”

 

2)박진재. “영국사와 도봉서원의 보존계획과 활용방안.” 도봉서원 발굴조사 성과와 의의, 불교문화재연구소, 2019. 164.

 

3)이이. 율곡전서[栗谷全書] 13, <道峰書院記>. 참조.

 

4)서원에서 학생들이 기숙하는 곳. 동재와 서재.

5)침류당은 유희경이 도봉서원 남쪽 암반에 세운 정자다.

6)차운은 남의 시운(詩韻)을 써서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7)만정은 무이만정의 고사에서 나온다. 중국 진시황 때 무이산의 산신인 무이군(武夷君)이 무이산에서 사람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8)정사는 성리학을 펼친 주희가 무이산에 들어가 강학을 한 곳의 이름이다.

9)무이는 중국 복건성에 있는 산 이름이다.

10)使君(사군)은 지방 군현의 수령을 높이 칭하는 말이다.

11)심액(1571~1654): 조선 중기의 문신.

12)유희경(1545~1636): 조선 중기의 문인.

13)主簿(주부)는 문서를 다루는 종 6품의 관직이다.

14)사예(司藝) : 성균관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정사품 벼슬.

15)조여길(趙汝吉, 1634~1681) : 조선 중기의 문신.

16)계창(鷄窓) : 서재.

17)침류당은 서원의 바깥쪽, 개울가에 위치했던 작은 정자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18)치제문(致祭) : 금이 죽은 아랫사람을 추모하거나 공을 치하하는 글로써 제()를 행하는 데에할 때 직접 갈 수 없을 때 내리는 글이다.

19)중양절(重陽) : 99, 홀수 9가 겹쳐 있어 복이 겹으로 온다고 하여 국화꽃 잎을 따서 전을 부쳐 먹는 풍습이 있다.

20)정우(靜尤) : 광조와 우암(尤菴) 송시열을 줄임.

21)요순() : 대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룬 요임금과 순임금.

22)춘추() : 국의 역사서.

23)송현: 재 경기도 의정부시 송현동에 위치 했었던 여숙(旅宿)으로 추정된다.

24)풍백() : 람의 신.

25)아향() : 둥의 여신.

26)운납() : 려가 입는 옷(僧服).

27)목객() : 에 사는 사람. 땔감을 구하거니 나무를 하는 사람. 나무꾼.

28)선파() : 선이 사는 세계에 피는 아름답고 기이한 화초.

29)요화() : , 옥처럼 신선세계의 꽃을 말한다.

30)백란() : 봉황새의 일종으로 붉은색에 오색이 깃든 모양이다.

31)선장() : 선이 손바닥으로 소반을 받들고 감로(甘露)를 받는 형상을 구리[]로 만든 그릇.

32)사제() : 신의 친동생을 겸손하게 부르는 이름.

33)중정() : 상복(金尙宓). 김상헌과 김상용의 동생.

34)해촌() : 재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혜화동 묘지 인근으로 추정됨.

35)전장() : 이 딸린 농가. 별서(別墅).

36)삼각산(三角) : 운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의 높은 세 봉우리가 뿔처럼 높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37)두미() : 두미포, 현재 팔당 인근의 배알머리. 현재 동호대교 근방. 이 시에서의 두미는 의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8)동곡(東谷)은 도봉산 아래 방학동 인근 마을이다.

39)한오상(韓五相, 1606~1672) : 당시의 이름난 효자.

40)중국의 숭산(嵩山), 1491m의 산

41)중국의 여산(廬山), 1474m의 산

42)학배(鶴背): 도가 높아 신선이 된 사람의 자리.

43)천주봉: 도봉산의 한 봉우리. 만장봉(萬丈峯)(718m).

44)우포() : 재 경기도 파주 늘노리.

45)중춘() : 음력 이월

46)이광하(1643~1701) : 조선 후기 문인.

47)자익(子益): 김창흡(金昌翕), 김창협의 동생.

48)사경(士敬): 김시보(金時保, 16581734), 조선 후기 문신.

49)묘봉암(妙峰庵)은 도봉산에 있던 절이다.

50)() : 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한문 문체이다.

51)정확히 언제 쓴 시인지는 알 수 없으나 1689년 기사사화(己巳士禍) 이후로 추정된다. 도봉기유는 총 78구로 구성된 오언 배율시로 도봉산에 오르는 여정, 즉 김창업의 우거지(寓居地)였던 동장(東庄, 현재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에서 출발하여 만장봉(萬丈峰)에 이르렀다가 도봉서원까지 길을 따라 저자가 목격한 풍경을 주로 읊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참고.

52)홍문() : 살문이라고도 한다. 궁궐, 관아, , 묘나 서원 등의 정문으로, 엄숙한 장소로 들어가는 경의의 표시를 의미한다. 이 글에서는 도봉서원의 입구를 말한다.

53)정암() : 광조(趙光祖, 1482~1519) 도학정치를 꿈꾸던 문신. 도봉서원에 배향되었다.

54)화양() : 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

55)백부(伯父)는 김창업의 큰아버지이자 영의정을 지낸 김수흥(金壽興)이다.

56)팔분() : 예 기법의 한 종류, 팔분체(八分體).

57)사강락(謝康) : 국 산수시(山水詩)의 대가

58耽津() : 라남도 강진군. 탐진촌요는 조선 후기 관리들에게 수탈당하는 농민의 긍휼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7언 절구의 한시다.

 

59)전라남도 영암군의 월출산 봉우리.

60)난야() : 행하기 좋은 한적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