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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한많은 세월을 살다 간 숱하게 많은 여인의 원이 담긴 나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1. 18. 13:31

[나무를 찾아서]

한많은 세월을 살다 간 숱하게 많은 여인의 원이 담긴 나무

사람의 마을에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던 큰 나무는 사람들의 소원을 한데 모아 하늘에 전했고, 하늘은 어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었어요. 세월 흐르면서 사람들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나무를 향해 홀로 가슴 깊이 묻어둔 소원까지 빌게 되었습니다. 소원은 제가끔 달랐습니다. 하지만 세상살이의 흐름 속에서 일정하게 사람들이 가지는 소원이 비슷할 때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 특별한 유형의 소원을 잘 들어주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소원’이었고, 나무 가운데에는 특별히 그 소원을 잘 들어주는 나무가 있습니다.

○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함을 가진 느티나무 ○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답사하는 중에 그런 나무를 여러 그루 만났습니다. 조금은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이 지역의 큰 나무 가운데에는 그런 믿음이 담긴 나무가 많았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에서 소개하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도 그런 나무입니다. 위쪽의 다섯 장의 사진은 〈의성 화신리 느티나무〉이고, 아래쪽 넉 장의 사진은 〈의성 의중리 느티나무〉입니다. 두 그루 모두 보호수로 지정한 큰 나무인데, 수령이나 규모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그루 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마을의 상징인 나무입니다. 생김새가 아주 근사해서 지나는 길가에서도 훤히 바라다보여서 한눈에 마을 지킴이 나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습니다.

두 그루 모두 오래 전부터 나무에 정성껏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영험한 나무입니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의성 화신리 느티나무〉가 서 있는 의성군 비안면 화신리는 의성군의 중심인 의성읍에서 가까운 마을입니다. 도시화의 물결에서 자유롭지 않은 마을이라는 거죠. 실제로 마을을 찾아가보니, 스무 가구 정도로 이루어진 이 작은 마을에는 ‘외지’에서 들어오신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뒤에 도시에 나가 살다가 은퇴하신 뒤에 고향으로 찾아오신 분도 있고, 아예 이 마을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전원 생활을 염두에 두고 오신 분도 있었습니다.

○ 오래도록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믿음을 간직한 나무 ○

나무에 전해오는 ‘아들을 낳게 해 주는 나무’라는 전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긴 그런 전설을 알고 있다 해도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전처럼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게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이 아닌 상황이잖아요. 사람살이에 별무소용인 전설은 사라질 수밖에요. 전설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성 화신리 느티나무〉는 마을의 소중한 나무입니다. 500년 된 이 나무는 언덕 위에 서 있어서 단박에 눈에 띄지만,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높이가 낮은 편이었습니다. 곧게 올라야 할 줄기가 5미터 쯤 높이에서 땅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줄기가 굽으면서 햇살이 환히 내리쪼인 자리에서 가지가 돋아나면서 솟아올라 높이를 키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나무의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5미터 쯤 되는데, 높이는 11미터밖에 안 됩니다.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또 한 그루의 나무인 〈의성 위중리 느티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느티나무에게 정성껏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소원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믿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원을 빌었고, 그들은 아들을 얻었습니다. 소문은 퍼졌습니다. 마을 사람은 물론이고, 멀리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바람 찬 한밤중에 홀로 나무 앞에 나와 정성껏 제물을 차려놓고 절을 올리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정성 들여 소원을 빌고 돌아간 아낙네들 가운데 누구는 아들을 낳았겠지요. 나무가 소원을 들어준 것인지, 때가 맞아 아들을 낳은 것인지는 가름할 수 없지만, 아들을 얻은 사람들은 나무의 영험함 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아들을 낳지 못해 힘겹게 살아야 했던 우리네 여인들 ○

하지만 나무에 정성을 다하고서도 아들을 낳는 데에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를 탓했지, 나무를 탓한다거나 하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낙들은 자신에게 극복할 수 없는 나쁜 기운이 들어있는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때로는 나무에 들인 정성이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다시 나무를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먼저의 경우보다 더 많은 제물을 더 정성껏 준비하고 몸가짐 마음가짐도 단단히 했겠지요. 그리고 다시 또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어떻게든 아들을 낳아야만 했던 그때의 여인들이 감당했어야 할 삶의 무게가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래도…… 그래도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낙네들은 많았을 겁니다. 〈의성 화신리 느티나무〉나 〈의성 위중리 느티나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이유가 결국은 자신에게 있다고만 생각한 그때 그 시절 우리의 여인들은 나무에 들인 정성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무의 영험함이 모자라다고 나무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정성을 들였어도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건 스스로가 ‘죄 많은 여인’으로 낙인찍힐 이유가 된다는 생각이 앞섰을 수 있습니다. 하릴없이 아들을 낳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의 옛 여인들은 온갖 비난을 받으며 한많은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 한많은 여인들의 고단한 세월의 여정이 그대로 담겨 ○

마침내 나무에는 오로지 아들을 낳은 여인들의 이야기만 남아, 더 널리 퍼졌습니다. 〈의성 위중리 느티나무〉 〈의성 화신리 느티나무〉 모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무에는 지금까지 ‘나무에 정성을 들이면 아들을 낳게 해 주는 나무’라는 이야기가 남아 전해옵니다. 나무에 정성을 들이고 아들을 낳은 여인들은 오로지 나무의 덕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이야기했고, 그 소문을 들은 또 다른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가 정성을 들여 소원을 빌었습니다.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나무 앞에 서서 나무를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나무에서 내가 바라다본 것은 아들을 낳은 여인들의 기쁨과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나무 앞에서 끊임없이 치솟아오르는 한많은 세월을 끌어안고 슬프게 살다 간 이 땅의 숱하게 많은 아낙네들의 원한의 세월이 하나 둘 솟아나왔습니다. 나무가 바라본 건 나무를 찾아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소원을 빌던 여인의 한이었습니다. 나무를 바라본다는 건 그래서 옛 사람들의 사람살이를 바라본다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무 답사 이야기였습니다.

아침에 드려야 할 《나무편지》를 이제야 드립니다. 어제 밤눈에 이어 낮에도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입니다. 오후까지 눈이 계속 된다고 합니다. 오가는 길 조심하시고, 아름다운 겨울 풍경 평안히 즐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한 그루의 나무에 담긴 옛 사람들의 어지러운 사람살이를 생각하며
2021년 1월 18일 한낮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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