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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대상과 방식 - 나호열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1. 11. 17:17

그리움의 대상과 방식 - 나호열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소설가 · 전 예 숙

 

 

시가 이미지와 직관을 포착해 내는 작업의 소산이라 한다면, 그 이미지를 감성적으로 잡아내 형상화 시키는 일, 그것이 시인의 몫이 아닐지.

시인의 작업 중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 있는데, 바로 작가의 세계관·철학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사유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좋은 시라고 말하는 작품들을 생각해 보라.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함께 읽어갔을 것이다. 결국 사유를 떠난 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억지 같은 논리를 체험하게 된다. 또 어떤 문학 작품에서든 그 속에는 인간이 들어앉아 있는데, 작가는 그 인간을 여러 각도로 탐구하게 된다.

 

나호열 시인의 시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유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데, 그 인간 존재 방식이 흥미롭다. 인간의 존재방식이, 그리움 혹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 멀리 있어 지금은 다가갈 수 없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리움의 대상은 늘 ''라는 존재 사이에 갇혀 있을 수 있지만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이 세상에 없고 저 세상'에 있는 이미지를 그려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나호열 시인이 플라톤이나 한용운과 차별화 되는 것은 그리움의 대상 혹은 님을 간절히 희구하는 방식이 아니며, 그 존재가 외롭고, 그립고, 너무 멀리 있어 손에 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갈증을 가득 안은 채 사막을 건너'서 존재하며, 혹 손에 닿으면 형상이 바뀌고 만다.

먼저, 나호열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사랑, 혹은 그리움의 대상을 무작위로 뽑아 보았다.

 

·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 「밤에 쓰는 편지

 

· 갈증을 가득 안은 채 사막을 건너가는 사람 이제는 내가 귀인을 찾아 나설 차례다

― 「귀인을 기다리며

 

· 얼마나 숨차게 나에게 달려오고 있는지/ 그는 부재중이다 ―「그 겨울의 찻집

 

· 당신에게로 가는 먼 길 / 맞부딪쳐오는 바람에 / 눈 감아버리는 밤길

― 「 두메 양귀비꽃

 

·이 세상에 살아 있으나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에요 ― 「다인 이라는 사람

 

·그대를 향하여 가는 길이 어디 먼 곳에 있던가/ 문신처럼 마음 속에 또아리 틀 물의 길, 바람의 길, 하늘의 길이 아니었던가 ― 「산길을 돌다- 삼릉포석정

 

. 손길 닿으면 언제든지/ 꽃이 되는/ 손길이 닿으면 금방/ 무너져 버릴 것 같아/

이만큼 바라보던/ 사랑이 있다 ― 「742호의 촛불

 

왜 이토록 그리움의 대상이 멀리에만 있는가. 왜 두 사람 사이에는 닿지 못할 거리감이 존재해야 하는가. 손에 닿을 수 있는 공간에 혹은 시간에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이 세상에 살아 있으나 만날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리움의 폭은 한없이 넓어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그리움의 대상과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있어 시적 화자와 더불어 함께 기다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나호열 시인은 산길을 돌다- 삼릉포석정, 에서 그대에게 가는 길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멀리'라는 시어에는 거리 개념을 초월하고 있다. 그 길은 '문신처럼 속에 또아리를 튼 물의 길, 바람의 길, 하늘의 길'이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현 존재에서 찾고 있었던 님 혹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물과 바람과 하늘의 공통 분모를 놓칠 수 없는데, 그것은 바로 움직임이다. 생성과 소멸이 있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움직임. 그런 마음은 시인의 내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그리움의 대상 또한 시적 자아의 내면에서 찾아야지 현 존재를 찾아 나선다면, 시인의 의도를 놓치고 말 것이다. 자연의 이법을 따라 가는 곳에 님의 존재가 있고, 손에 닿을 수 없으며, 멀리 있고,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그 대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다음 싯귀를 주목해 보자.

 

·혼자 차 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벽에 너울대는 제 그림자를 그토록 지우려 애썼을까.

― 「내 마음의 벽화 ·4

 

·나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 그리움의 들 물길이/ 외로움의 날 물길보다

/ 깊어 ― 「가을 호수

 

·그림자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 「꽃다발을 든 사내

 

외로움이 극에 달한 것일까. 혼자서 차오르며 혼자서 비워내는 저수지와 그리움의 들 물길이 외로움의 날 물결보다 깊어서 호수가 되었으니 저수지와 호수는 동격의 의미로 놓아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이런 모습, 그리움과 외로움에 사무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대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한 묶음의 꽃다발'을 가슴에 안겨주려 온 세상을 다 헤매다녔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이쯤해서 포기하는 것이 상책인듯 싶기도 하다. 드디어는 꽃다발을 버리다라는 시가 얼굴을 비집고 나오지만, 포기하는 모습에서 그는 자신을 돌아보며 '온통 빈 벌판인/ 내 마음속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나 없이도 세상을 잘 살아낼 사람, 그런 사람을 떠나보내며 자신의 빈 벌판을 상상하는 일에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이쯤 분석하고 나니 속단(續斷)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랑하는 대상은 그 겨울의 찻집에서처럼 나에게 달려오고 있어 그는 부재중이었고, 나비나비, 환생에서처럼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어야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리움의 존재 대상을 포기한 것을 보니 서운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본다. 시인은 실존하는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의 대한 존재를 '대상'으로 두고 물고 늘어진 것은 아니었던가. 나 스스로 바로 직립하기 위해 달려가고, 집착을 버리려 했고, 나의 존재는 세상 속에서 내 마음의 벽화시리즈에서처럼 소박한 구도를 갈구한 것은 아닌가. ''를 객체로 보고 참에 가까운 나를 설정하고, 무두질해댄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시인이 원하는 자신의 존재방식은 지나치게 소박하기만 하다.

 

·내 마음의 벽화는/ 말하자면/ 거실 한 쪽 벽에/ 못 박혀있는 /동양화 액자와도 같은 것이다 /있어도 없는 듯 하다가/ 가끔 눈길이 가면/ 푸른 하늘

― 「 내 마음의 벽화·1

 

·혼자만의 아침 식탁은 시작된다 / 어디쯤에서 바라보아야 꽃은 가장 아름다울까

― 「나비, 환생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싯귀가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삶에 대한 깊은 사유에서 나오는 진솔한 자기 반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상이 제멋대로 로그 아웃되는 수가 있지만, 그는 제멋대로 삶이 로그 아웃되지 않기 위해, 살펴보았듯이 진실된 삶을 그리워했기에 누구보다도 더 시인은 외로움을 타고 있었다. 목소리를 높혀 구호화하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는 시 정신은 그대에게 가는 길은 내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순간임을, 사랑의 대상도,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방식 또한 스스로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나호열 시인의 시 정신은 만월에서 정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의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화두가 아닌가 싶다.

끝으로, 만월을 감상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마음에 등을 달아 놓으려다

그만

바람결에 끈을 묶어 놓았다

 

헤진 솔깃 기울 수 있을 만큼만

불 밝혀 놓으면

길고 모진 밤도 서럽지 않아

너울대는 그림자도 친구가 되지

 

바람 따라

날아가 버린 등은

저 혼자 차 올라서

고개 마루턱에 숨차게 걸려 있다

 

이 밤

먼 길 떠나려는 사람의 발 밑에

또르르 굴러가는 이 마음은

왜 이리 시리기만 한가

 

- 만월(滿月) -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