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6. 28. 17:21

<문예감성 대표시 5> : 나호열

촉도(蜀道)

 

경비원 한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 시집 촉도(2015)

 

당신에게 말 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 시집 당신에게 말 걸기(2007)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2007)

 

매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서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피는 꽃만 꽃인 줄 알았더니

 

지는 꽃도 꽃이었으니

 

두 손 공손히 받쳐 들어

 

당신의 얼굴인 듯

 

혼자 마음 붉히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2007)

 

의자 4

사람은 의자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이라 불려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제 몸을 내어줄 때 일 것이다 의자는 오랜 시간 홀로의 시간을 견디고 자신에게 아무런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잠시 고단한 발걸음을 멈춘 이들이나 다른 일을 하기 위하여 하인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미련 없이 떠나는 그 때까지 묵묵하게 무게를 견딜 뿐이다 세월이 흐르면 의자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허물어 쓰레기가 되어 산화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마땅히 의자가 되어야 한다 나를 닮은 어떤 일들에 필요한 노역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 2019. 여름호 <표현문학 >. 시집 『안녕, 베이비 박스』(2019)

 

<시작노트>

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

나호열

 

울림시 동인으로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1980, 영학출판사)에 작품을 발표한 지 올해로 꼭40년이 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2년에 한 권꼴로 시집을 내었으니 나름대로는 열심히 시인 행세를 해 왔던 것 같다. 어느 시인은 저 광대한 우주를 향하여 시선(視線)을 돌리고 또 어느 시인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항거하며 불꽃을 태웠지만 나는 시류에 관계없이 나의 존재에 대한 탐문에 집중하면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는 나그네로 시를 택했다. 영감(靈感)이 내게로 와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찾기 위해서 무딘 촉각을 허공에 들이대었던 것. 말하자면 돈오(頓悟)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하여 점수(漸修)의 수행을 거듭했던 것. 시라는 거울은 아직도 나를 비추고 있지 않음을 두려워 할 뿐이다.

 

나호열 羅皓烈

문예감성은 새롭게 2020년 재창간된 잡지이다.

충남 서천 출생(1953),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월간문학신인상(1986),시와 시학중견시인상(1991). 시집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91)이후 안녕, 베이비 박스(2019) 까지 19. 녹색문학상, 문학의식 문학상, 충남시인협회 문학상 등.

경희대학교 교수 역임. 현재 도봉학 연구소장, 한국탁본자료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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