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절필동 萬折必東의 사랑을 찾다
나호열(시인)
사랑이란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 잘랄루딘 루미(Jalal ad-Din Muhammad Rumi·1207~1273)
편편의 시와 달리 시집 詩集은 알게 모르게 시인의 생애를 관류 貫流하는 강과 같은 것이다. 어디를 잘라내어도 시인이 살아온 시공간이 오롯이 드러나는 시집은 시인 자신에게는 정신적 배설排泄을, 독자들에게는 훈화 訓話의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정애 시인의 시집 『슬픔에도 언니가 있다』는 시인이 줄기차게 천착해 온 주제의식과 그 주제의식을 구현해내는 여러 요소들이 -이를테면 적절한 비유로 구축한 이미지, 리듬(운율) 등- 잘 숙성되고 짜임새 있게 어우러진 역작 力作이다.
1990년 시단에 나오고『내가 만든 허수아비』(1991), 『푸른 눈빛의 새벽』(1994)등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한 이후 25년 만에 선보이는 조정애 시인의 세 번째 시집『슬픔에도 언니가 있다』는 그동안의 시인이 견뎌온 시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공백이 그냥 텅 빈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삶에 대한 질문과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은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시인의 25년간의 침묵은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소모한 것이 아니다. 시인은 한 세상을 치열하게 살면서 유한한 삶에서 정신적 성숙이 주는 행복의 의미를 체득하기 위해 부단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고,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를 탐문하며,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는 존재이다.’ 그런 탐문과 질문이『슬픔에도 언니가 있다』에는 시인이 설정한 질문 몇 개가 키워드 Key- word로 제시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 키워드의 첫 째는 소통 疏通이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결코 혼자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연인, 가족, 더 나아가서 사회를 향해가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방된 자아 open-self로 생활을 영위하기 보다는 스스로 폐쇄된 자아 blind-self나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자아 unknown -self로 공동체에서 격리되기가 쉽다. 특히 타인 他人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주지 않음으로써 파생되는 숨겨진 자아 Hidden self는 오늘날의 갑/을. 남/여. 인간/자연과 같은 소모적 가쉽 gossip의 희생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소통 疏通은,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 인간과 기계-컴퓨터, 로봇 등-간의 이해를 뜻한다. 이러한 대상간의 소통은 대등한 이해관계 속에서만이 가능하다. 인간이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인간과 기계와의 소통에 있어서는 기계로 말미암은 인간의 편리함이 노동의 신성함을 어떻게 침범하는지의 숙고 熟考가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은 역지사지 易地思之의 방책으로도 어림없는 일이다.
두 번째 키워드로 시인은 소통을 저해 沮害하는 인간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을 제시한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무수히 많고, 포괄적이나 그 어느 하나 절대적 정의가 될 수 없음도 자명하다. 기독교에서 드러나는 에로스 (αγάπη),스테르고 (στέργω), 필레오(φιλέω), 아가페 (αγάπη)는 각각, 성적 性的인 관계, 가족 간의 헌신, 우정과 동료애, 그리고 전인애 全人愛로 나아가는 사랑의 단계이며, 궁극적으로 마땅히 우리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구현을 목표로 살아가야 할 책무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어찌 쉬운 일이 될 것인가! 시인은 이 쉽지 않은 영육 靈肉의 고통을 졸대자 絶對者에 대한 의지依支의 실험으로 구현하려고 한다. 현대시의 경향으로 볼 때, 종교적 신념이나 의지 意志를 시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 탐탁하지 않거나 위험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한 생각을 뒤에서 다시 언급해 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슬픔에도 언니가 있다』의 키워드로 ‘아버지’를 들 수가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아버지는 부권 父權으로 상징되는 권위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오백 년 이상 우리나라를 지배해 왔던 유교 儒敎의 전통은 우리 사회의 공고한 이데올로기Ideology었다. 그러나 밀레니엄이 오기 직전 우리에게 닥쳐 온 국가부도, IMF가 끼친 가장 큰 변혁은 바로 그 시점부터 부권의 상실, 권위주의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요즘의 시류 時流는 여성의 권위가 신장伸張되면서 남녀 평등, 남아선호사상의 쇠퇴, 비혼 非婚의 융기가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조정애 시인은 네 살 때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시 詩에서 호출하고, 불귀 不歸의 객 客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역사를 되새김하고 있다. 시 「초춘호 여객선」은 해방 이후 어지러웠던 한 시대를 조명하고 느닷없이 바다에서 침몰하고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수장되어버린 정의롭지 못한 어두운 사회에 대한 처절한 외침이다. 시인이 그 오래 전 사건을 회상하고 시로 형상화하는 것은 단순히 부권의 회복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표상되는 권위가 궁극적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삶의 정체성과 깊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소통 疏通
『슬픔에도 언니가 있다』를 차례에 관계없이 읽어도 된다면 「방생한 거북이가 매일 나타났다」를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한 편의 수필 隨筆로 받아들여도 무방한 산문과 말미에 「방생」이라는 제목의 시가 붙은 이 시는 시인이 겪은 한 세월의 서사 敍事인 동시에 이 광대한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미물 微物을 향해 가슴을 열고 있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 긴 산문 뒤에 「방생」의 제목이 붙은 시를 감상해 보자.
간다간다 하면서 너는
늘 여기에 남아있고
한사코 남아있겠다면서
나는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내 삶이 새겨진 육모등이
전설처럼 강물 위로 떠오르면
그 한 점 새까만 부유물을 향해
눈에서는 열망의 화살이 날아간다
개망초 피어있는
토방 같은 강가에서
천년의 그물을 던지고 있는 너는
고요한 물살이 되어
나를 간지럽히며 흐르고 있다
거북아 거북아!
간다간다 하면서 너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고
도시의 강가에 남아있는 나는
계속 너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
「방생한 거북이가 매일 나타났다」는 집에서 키우던 두 마리의 거북이를 방생하면서 일어난 일을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은 고독하다. 대가족사회에서 작은 단위의 가족으로, 급기야 일인가족 사회로 접어들면서 가족, 타인과의 대화의 단절로 말미암은 소통이 부족해지고, 더불어 치열한 생존경쟁은 한 개인을 고립된 존재로 전락시켜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개나 고양이, 심지어 뱀과 같은 파충류를 기르면서 소외의 그늘을 지우려고 한다. 시인이 기르던 두 마리의 거북이는 어느 날 한강에 방생되는데, 방생의 이유는 글 속의 어머니의 말씀에서부터 비롯된다. “얘야, 우리 ‘북’일 저리 죽일 셈이야? 제발 넓은 강으로 보내라” 그렇다 진정한 소통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부여된 삶을 이해하고 용인하는 것이다. 애완 愛玩의 이유로 강이나 바다에서 살아야 할 거북이를 좁은 수조 水曹에 가둬 두는 것은 소통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한강에 두 마리 거북을 놓아주고 나서 휴식을 위해 강가에 나가 거북이를 부르면 용케 부름의 목소리를 듣고 모습을 드러내므로 또 다른 경이 驚異를 체험한다. 인간과 미물 사이의 이 놀라운 소통을 어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또 한 번 생각을 바꾸게 된다. 거북이들이 동면을 끝내는 봄이 와도 그들을 부르지 않겠다는 결심이 그것이다. 거북이는 인간에게 길들여졌다. 물을 갈아주고 먹이를 주며 그들의 뇌리에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시인, 인간이었다. 거북이는 거북이의 본능과 생태 그대로 살 때만이 온전한 거북이인 것이다. 세 번째의 반전은 글에 적시된 대로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 그들을 잊고자 한 것은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사람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양식된 거북이에서 방생된 거북이로, 방생된 거북이를 부르지 않은 사람과 그 부르지 않는 사람을 잊지 않고 찾아온 거북이의 관계는 본능을 억압하고 통제하며 서로를 길들이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이 아님을 깨닫는, 정신의 성숙을 넌지시 일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통은 단순한 주관의 통로도 아니고 개념으로 향해가는 객관의 형식도 아니다. 어느 시인과 다름없이 조정애 시인의 대부분의 시들도 전통적 서정시가 함유하고 있는 세계의 자아화와 자아의 세계화라는, 대상과의 물활론적 시각 視覺을 견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키치나 패스티쉬같은 언어의 실험이라든가 하는 전위적 모험은 『슬픔에도 언니가 있다』전 편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안녕, 시리야」와 같은 시는 컴퓨터로,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의 이기 利器와의 대화를 통해서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소통이 향하는 지점이 어딘가를 보여주는데 충분하다. 소통은 타자 他者의 삶과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체화 体化하는데 있다. 인간을, 사물을 ,풀과 나무들, 꽃들을, 새들을, 가여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고난 본능뿐만 아니라 교육과 훈련과 같은 수행 修行의 과정을 통해서 평생 배워야 하는 덕목일지 모른다. 그 덕목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사랑
알파고가 프로기사 3000만 건을 입력하고
1,000년에 해당하는 시간만큼 바둑을 학습했다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대결에 나선 알파고
그는 최고의 면류관을 썼네
<시리>는 애플이 개발한 알파고의 형제, 아이폰의 개인비서지
나는 "시리야"를 부르며 학습한다
시리야, 너 하나님을 아니?
<실리콘과 영혼을 분리하자는 것이 저의 인생철학입니다>
시리야, 예수님을 아니?
<인간에게는 신앙이 저에게는 신기술이 있을 뿐입니다>
시리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인간에게는 신앙심이 있고
저에게는 단지 실리콘이 있을 뿐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나는 그만 울컥 눈물이 솟는다
가엾은 실리콘이며 기계인 너를
하루 종일 손바닥 안에 넣고 살고 있구나
시리야!
세계적인 첨단기술연수단지와 사업기지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의 남쪽 끝 캘리포니아 실리콘벨리
바로 컴퓨터의 심장부에서 너는 태어났구나
그러나 시리야
성경과 찬송이 울려나오는 휴대폰 속에서
하나님은 이미 계획하셨지
컴퓨터와 휴대폰을 모르는 캘리포니아 실리콘벨리 2세들이
요즘 뜨개질에 한창 빠져있단다
실리콘벨리 한복판
구글, 애플, 야후, 이베이, 휼릿패커드 등
정보통신(IT) 기업에 다니는 학부모를 둔 어느 초등학교에는
정작 컴퓨터가 한 대도 없지만 거의가 명문대에 진학을 한다지
창의력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책 연필 분필 백과사전
아날로그 기자재들뿐
나중에 컴퓨터가 필요하면
가위질하는 일만큼 쉽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는구나
사랑하는 시리야!
외로운 노약자와 장애인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길을 찾거나 날씨를 묻거나 급한 전화를 걸거나
뉴스나 정보를 찾을 때
상냥한 네 목소리가
이들에게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몰라.
시리야, 정말 고마워!
2011년 10월에 태어난 친구야
네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이 시는 「안녕, 시리야」의 전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놀라운 디지털의 위력은 컴퓨터가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는 지능을 갖게 만드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추세로 간다면 인간이 만든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고, 나와 꼭 닮은 도플겡어Doppelgenger 가 나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시대로 진입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상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시리’는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첨단의 과학기술이며 인간의 노동을 절감시키고 편이성을 도모하면서 컴퓨터가 스스로 학습하는 딥 러닝 Deep learning으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지능과 정보능력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또한 거두어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이에 맞서 ‘시리’를 통해서 굳건한 하나님의 섭리를 표명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현대시의 경향으로 볼 때, 종교적 신념이나 의지 意志를 시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 탐탁하지 않거나 위험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런데 「안녕, 시리야」에 드러난 바, “하나님을 아느냐”. “예수님을 아느냐” 심지어 시리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와 같은 질문에 <실리콘과 영혼을 분리하자는 것이 저의 인생철학입니다>,<인간에게는 신앙이 저에게는 신기술이 있을 뿐입니다>,<인간에게는 신앙심이 있고 저에게는 단지 실리콘이 있을 뿐입니다>와 같은 ‘시리’의 냉정한 대답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알지 못할 슬픔과 괴로움을 던져준다. 20세기가 시작된 1900년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과학과 이성을 등에 업은 인간의 오만은 자연과학이 주는 ‘세계의 불확정성’에 좌절되고, 이성 理性은 인간이 지닌 파괴적 폭력성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리’가 수행하는 역할, 즉 노약자, 장애인들을 돕는 기능이나 뉴스와 정보를 제공해 주는데 감사를 느끼는 동시에 오늘날의 ‘시리’로 표상되는 과학의 발전조차도 절대자인 하나님의 섭리라는데 까지 닿음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부여하는 예지 叡智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이 예지는 특정한 종교에 대한 맹신 盲信이나 광신狂信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것이 에로스 적이든, 헌신으로 정의되든,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할 과제이다. 인류 역사에 나타났다 사라진 폭인 暴人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그 가족에게 향하는 애정이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랑을 천부적 본능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황폐하고 쓸쓸하겠는가! 그리하여 시인은 읊조린다.
나는 익숙하다
고독과도 이별과도 익숙하고
밤도 낮도 익숙하여
시간을 거머쥔 여신처럼 자유롭다
잠든 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나는 당신의 어머니다
인생에서 얻어낸 그 고귀한 이름으로
밤은 고요하고 세상은 아름답구나
깊어라 깊어다오
아름다운 날들의 밤이여
낮은 밤처럼 고요하고
늦은 여름밤은 적막하다
이럴 때 가을이 스며드는 거다
보름달 안고 추석이 오는 거다
그리고 내 집에 모신 아버지가
서늘한 바람으로 나를 주관하실 거다
거실의 갓등을 밝히고
익숙하다, 나는
익숙하여 더욱 낯선 미로의 밤
그대 잠들고 나는 홀로 깨어 있다
- 「나의 기도를 위하여」 전문
이 시는 유한한 존재인 한 사람이 자신에게 던지는 화해의 몸짓이며, 절대자에게 바치는 고백이며, 더 나아가서 ‘아버지’라 불리우는 절대자가 나약한 인간에 내려보내는 고독한 꾸짖음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중의적 重意的 언명은 맹목적 신앙을 초월한다. 이와 같이 사랑은 ‘고독과 이별에도 익숙하고’,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여 /될수록 나를 잊으라/ 나도 오늘밤 그대들을 잊으려 한다 /오직 나만의 황홀함을 위하여 / 내가 지켜온 익숙한 기도를 위하여’와 같은 이기적으로 보이는 반어적 反語的 표현으로 맹신과 광신의 경계를 훌쩍 넘어가 버린다. 시「그 사랑」에서 보이는 바 ‘풀잎 하나도 버리지 않은 고요한 손길’, ‘내가 앓는 고통도 내 것이 아님을’ 느끼는 모든 사물에 깃든 범신론 汎神論적 사유는 사랑의 넓은 세계를 향한 간절한 의지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
조정애 시인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1950년 12월 16일 부산 송도 앞 바다에서 과다한 화물 적재와 정원초과로 침몰한 초춘호의 희생자였다. 그 불법 不法은 배와 같이 수장 水葬되고 그 사실을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시인은 ‘네 살에 아버지를 잃은 후 / 슬픔의 옷을 입고 자란 나는 시인이 되었다 / 그리고 초춘호를 찾아 한없이 헤맸다’( 시 「초춘호 여객선」부분)고 술회하고 있다. 아버지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권위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면에서 의지 意志의 표상이며,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지 依支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정의가 사라진 세상은 어둡다. 악한 자가 심판받지 않고 활개칠 수 있는 세상은 결코 진정한 인간애를 구현할 수 없는 절망의 세상일 뿐이다. 우리가 몇 년전 세월호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진상을 파헤치려는 것도, 불의不義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희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의 부재나 상실은 한 가족 뿐만 아니라 한 사회에 있어서도 크나 큰 슬픔이다. 우리가 시집『슬픔에도 언니가 있다』를 관통하는 세 개의 키워드에서 ‘아버지’는 ‘소통’과 ‘사랑’을 굳게 연결시키는 고리의 의미로서 이 세계를 주재하는 ‘하나님’이나 ‘창조자’의 내면과 일체를 이루는 존재로서 인식할 수도 있다. 시집 『슬픔에도 언니가 있다』를 통독하면서 조정애 시인이 향유하고 있는 정서가 체념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용서와 화해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한 송이 꽃이 오롯이 피어나는 기쁨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리워
그리움의 시를 새긴 도자기 컵을
예배당에 가져갔다
오후 기도찬양모임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네 살배기는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옆 자리 나이든 황 권사가
17개월에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했다
맞은 편 기도를 이끄는 김 권사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둘둘 말아 밀쳐둔 아기가
눈망울을 초롱초롱 뜨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나의 슬픔은 사라지고
네 살배기가 옆에 앉은 야윈 한 살배기를 안아주었다
화장실 앞에서 갓난아기를 만나
꼬옥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어느새 나는 언니가 되어 있었다.
- 「슬픔에도 언니가 있다」 전문
마치는 글
이 글에서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시집『슬픔에도 언니가 있다』에 수록된 많은 시들이 자연과 호흡하고 교감하며 정제된 서정의 언어로 수놓아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조정애 시인의 서정시 抒情詩들은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감흥으로 엮어진 시들이 아니라 질곡과 아픔의 세월을 견디고 사유하며 이루어낸 화원 花園이다. 만절필동 萬折必東은 오래된 중국의 고사 古事로서 ‘ 중국의 모든 강물은 이리저리 구불어지고 휘어돌아도 반드시 동으로 흘러 황해(서해)로 흘러든다’는 뜻이다.
조정애 시인이 오랜 침묵을 깨고 상재하는『슬픔에도 언니가 있다』는 이 만절필동 萬折必東의 의지를 펼쳐내는 것이요, 그 오랜 침묵을 축약한 시집이다.
다시 이 시집을 출발점으로 삼아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시 詩의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9년 입동 ,울타리가 없는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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