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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란 무엇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9. 8. 16. 13:10

좋은 시란 무엇인가

이재무

1. 패러다임에 대하여

    

생물학자 만하임 쿤은 패러다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패러다임이란 당시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기초된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패러다임이란 절대적 객관적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란 뜻을 내포한다. 즉 시대마다 사람들의 합의가 달라져 다르게 구성될 수 있는 것이 패러다임이란 말이다. 이를테면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그것이 하나의 과학적 패러다임으로 확정되기 이전에는 ‘천동설’이 과학에 있어 하나의 패러다임이었으나 이후 그 패러다임은 지동설에 의해 자신의 과학적 지위를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대 사회의 합의, 즉 그 시대의 과학적 보편성에 의해 그리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뉴턴으로 대변될 수 있는 근대적 과학주의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의 논리’ 즉 ‘신과학’에 의해 패러다임이 교체된 것도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에서조차 패러다임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달리 구성될진대 상대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인문학, 그 가운데에서도 예술 문학에서는 말할 나위 없이 얼마든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개념이 달리 구성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군림해온 서양의 근대 계몽 이성 담론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담론들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 역사주의 등이 들어서고 있는 것도 패러다임이 시대에 따라 달리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는데 왜 시를 논하는 자리에 앞서 패러다임에 대한 개념 규정 및 성격을 먼저 논하는가 하면 시에 있어서의 정의나 성격 나아가 좋은 시에 대한 요건과 평가 역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연대는 거대 담론 시대였다. 따라서 문학예술에서도 이러한 담론의 영향을 받아 굵직굵직한 주제와 소재를 즐겨 다루었다.

예컨대 ‘계급’이니 ‘민족’이니 ‘민중’이니 하는 문학적 담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사회주의가 붕괴함에 따라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었고 이에 대한 극복과 대안으로 많은 담론이 무성하게 전개되었는바 그러한 담론들의 영향을 받아 쓰여진 많은 문학 작품들 예컨대 시로서 한정시켜 말하면 진난 연대의 주류를 이루었던 노동시, 통일시, 농민시, 실험시 대신 도시시, 생태시 여성시, 내면 성찰시, 선시 등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 필자가 살펴볼 좋은 시의 요건도 어디까지나 주관적 상대적이지, 절대적 객관적 조건일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어느 시대이든지 좋은 시에 대한 묵시적 합의는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패러다임의 영향 때문이다. 그 어떤 작품도 이러한 시대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로 당시대의 문학인은 그 시대의 주류적 경향이나 흐름,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시란 장르만큼 취향과 기호의 스펙트럼이 넓은 장르도 없다. 그러므로 저마다 좋아하는 시편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와 대상에 대한 인식 차이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저마다의 인식 차이는 저마다의 유전적 형질, 계급, 지역, 성별, 세대, 경험의 총체 등의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차이는 문체를 결정짓기도 한다.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인식했기 때문에 문체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체의 차이는 동일한 대상을 동일하게 인식했으나 다만, 장식적 수사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인식(세계관이나 가치관 혹은 역사관의 차이)했기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문체는 곧 그 사람의 전부라 말할 수 있다.

    

 

문학(시)에 대한 취향과 기호가 다른 것은 곧 세계관이나 인생관 혹은 역사관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취향과 기호에 대한 억압은 세계나 대상에 대한 인식 즉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억압하는 것으로 야만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각기 다른 저마다의 취향과 기호의 실현과 향수도 대개는 시대가 요구하는 패러다임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아무리 스펙트럼이 넓은 시 장르라 하더라도 당시대가 요구하는 묵시적 합의가 있게 마련이고 좋은 시란 이 범주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첫째, 좋은 시는 발견의 미학이 들어있어야 한다.

 

즉 견자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발견은 감각이나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을 포착하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시를 통해 이를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천양희, 시, <뒤편>, 전문

    

 

종소리 뒤편의 기도문, 화려한 마네킹 뒤편의 시침을 보는 시인의 시선이 날카롭다.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미지와 실체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침묵 우려낸 종소리가 울려 펴진다. 공중에 파문을 내면서 꽃을 만나면 웃음을, 풀과 나무를 만나면 푸름을, 언덕을 만나면 굴렁쇠가 되는, 환하고 푸르고 둥근 종소리. 그러나 뒤편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기구가 있다는 것을 이 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결구의 잠언적 발언은 바로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을 포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심야의 고속도로

트럭 행렬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거친 사내들은 단내 나는 더운 숨

연신 토해내며 살 맞은 짐승처럼 고함

질러대고 있었다 딱딱한 밤공기가

과자부스러기가 되어 부서졌다

하늘에 핀 별꽃들이 경기 들린 아이처럼

놀라 자지러지고 있었다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

우락부락한 다혈질의, 각진 얼굴의 사내들은

힘이 세다 그들이 실어 나르지 못할

물건은 없다 조폭의 무리 같기도 한 그들이

지날 때 함부로 그들을 나무라지는 말자

그저 절로 벌어진 입 당분간 닫지 말고

사고 없이 어서 이 위기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소원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바지런을 떨어도 생의 저속을 사는

그들은 언제든지 분노로 폭발할 수 있는

슬픔 몇 됫박씩 가슴에 지니고 산다 밤의

질주에는 그런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 이재무, 시, <트럭>, 전문

    

 

얼마 전 트럭 운전사들이 물류대란을 일으켜 일시적이나마 산업을 마비시킨 적이 있다. 그런 그들을 사람들은 사회 범죄자 취급하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무조건 비난하기에 앞서 그들이 왜 그렇게 티브이 화면이나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며 원시적인 무력행사를 벌일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위 시편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그들이 왜 밤의 폭주족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과속이 정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벌인 행위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이면을 들여다보자는 뜻이다. 그들의 사보타지와 과속은 오로지 생의 저속을 면키 위함이다. 과속을 해도 저속을 면키 어려운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았을 때 문제에 대한 보다 객관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처럼 발견이란 현상적인 삶 이면의 숨겨진 진실을 들여다보는 보는 행위를 말한다. 사물과 삶의 이면에는 현상에서 놓치기 쉬운 실체와 핵심 그리고 진실이 숨어있는 것이다.

    

 

둘째, 좋은 시란 ‘낯설게 하기’가 들어있어야 한다.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주창한 것으로서 ‘비록 낯익고 진부한 대상이나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내 나름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시, <국화 옆에서>, 전문

    

주지하다시피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서정주 시인 이전에는 우리 시에서 주로 ‘절조’의 표상으로 쓰여 왔다. 하지만 서정주 시인은 국화에 대한 기왕의 오랜 통념을 버리고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낯설게 만들었다. 이 시에서 ‘국화’는 더 이상 절조를 표상하지 않고 이제는 시인이 부여한 새로운 의미 즉 ‘원숙한 생명감’을 뜻하게 된 것이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서 ‘진달래꽃’이라는 시어의 의미는 ‘이별의 정한’이지만 신동엽 시인의 시 <진달래 산천>에서 ‘진달래꽃’의 의미는 ‘혁명’을 뜻한다. 후세대 시인 신동엽은 전 시대 시인 김소월과 다르게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다르게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낯설게 하기’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낯설게 하기’는 대상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 창작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시작 행위에 속한다.

    

셋째, 시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글쓰기란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언어의 선택과 배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체 불가능한 최상급의 언어 선택으로 최선의 배열을 기하는 것이 글쓰기의 요체인 것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어와는 그 쓰임새가 다르다. 일상어는 의미 전달이나 개념을 제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성을 띠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의 교체가 불가능하다. 가령 일상어에서는 ‘연인’이라는 말 대신 ‘애인’이나 ‘님’ 혹은 ‘자기’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시언어에서는 기표마다 환기되는 정서가 다르기 때문에 교체해서 쓸 수가 없다. 서정주 시인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시 구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에서 ‘팔 할’ 대신 ‘80 %’를 쓸 수는 없는 일이다. 평론가 유종호는 그의 저서 <<시란 무엇인가>>에서 이러한 시 언어의 특성을 극도의 긴장감을 지닌 ‘글자 넣기 놀음’에 비유하고 있다.

    

 

놀이에는 특유한 긴장이 따르는 법이다. 이것이 제대로 풀릴까 하는 불확정성에서 오는 긴장은 시 쓰는 과정의 시인의 고심과 비슷하다. 한 집의 실수나 악수가 불계패를 자초할 수 있듯이 잘못 놓인 글자는 글자 넣기 놀음을 파국으로 이끌 수 있다. 시를 향수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놀이의 규칙을 알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 글자 넣기 놀음의 재미는 한 글자라도 잘못 적어 넣으면 파토가 생겨 놀이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글자라도 악수가 있으면 완벽성과 완결성을 기대할 수 없다. 전후좌우에 그것 아니고서는 채울 수 없는 유일의 적정어가 놓여야 한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시, <묵화> 전문

 

 

  위 시편에서 마지막 행의 ‘적막하다’라는 시어를 대신할 시어는 없다. 가령 ‘고요하다’ ‘고독하다’ ‘쓸쓸하다’ ‘안타깝다’ ‘외롭다’ 등등의 그 어떤 말로도 ‘적막하다’가 갖는 울림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플로베르가 주장한 ‘일물일어설’에 해당된다. “한 사물의 특성 혹은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는 ‘일물일어설’이 뜻하는 것은 글쓰기에 있어 최상의 언어, 최적의 언어, 즉 적정한 유일어를 찾으라는 것을 말한다.

    

시 장르는 무엇보다 기표 위의의 장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언어에는 형식과 기호를 뜻하는 ‘기표’와 내용과 의미를 뜻하는 ‘기의’가 있는데 이 가운데 시는 기표를 더 중시하는 장르이다. 기왕이면 정서적 밀도가 강한 기표를 쓰는 것이 시 쓰기에서는 필요하고 유리하다.

    

정서적 밀도가 강한 언어에는 무엇이 있는가? ‘꽃’ ‘곡식’ ‘강’ ‘산’ 같은 일반어보다는 ‘국화꽃’ ‘‘소양강’ ‘부소산, 같은 특수어가 더 정서적 환기력이 강하다. 또한 관념어나 추상어보다는 구체적 감각어가 정서의 밀도에 강하다. 눈으로 익힌 개념어보다는 귀로 듣는 구체적 현장언어가, 표준어보다는 부족 방언이 더욱 실감을 줄 수 있다.

 

 

내 귓속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

따각따각 걸어 들어와

어둡고 찬 바닥에 몸을 누이는 슬픈 골목이 있고,

 

 

얼어터진 배추를 녹이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태우는

새벽 농수산물시장의 장작불 소리가 있고,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첫눈의 신음소리가 있고,

좌판대 널빤지 위에서

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등어가 토해놓은

비릿한 파도소리가 있고,

갈라진 손가락 끝에

잔멸치 떼를 키우는 어머니의

짜디짠 한숨소리가 있고,

 

 

내 귓속 막다른 골목에는

소리들을 보호해주는 작고 아름다운

달팽이집이 있고,

아주 가끔

따뜻한 기도소리가 들어와 묵기도 하는

작지만 큰 세상이 있고,

- 고영, 시, <달팽이집이 있는 골목>, 전문

    

 

위 시편 속 시적 주체의 공간에는 체험을 우려낸 다양하고도 생생한 소리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소리들은 아주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다. 눈으로 익힌 언어들의 대개가 개념어들인데 반해 귀에 친근한 언어군은 체험현장과 밀접한 감각 혹은 구체어들이다. 이 감각, 구체어들이야말로 시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에서의 표현은 언어학자 야콥슨이 주장한 “일상 언어에 대한 조직적 폭력으로서의 언어”이어야 한다. 즉 일상 어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 어법에서 벗어난 일탈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언어의 사용이 필요한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 <엄마 걱정>, 전문

    

 

위 시편에서 셋째 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는 시든 지 오래”라는 시 구절은 일상 어법이 아니다. 일상 어법에서는 “날이 저물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날이 저물고

먼 곳에서 빈들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저 혼자 펄럭이고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어딜까 어딜까

마지막 남은 햇빛 하나가

도시를 끌고 간다

- 강은교, 시, <자전 . 2> 중에서

    

위 시편에서 “빈 들이 넘어진다” “사람은 저 혼자 펄럭이고”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마지막 남은 햇빛 하나가 도시를 끌고 간다”라는 구절들은 모두 일상 어법과는 다른 창조적 표현으로서의 시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적 표현은 의미가 곧바로 전달되는 일상어법이 아니라 의미가 간접적, 우회적으로 전달되는 반투명성으로서의 어법인 것이다.

    

 

 넷째, 좋은 시는 구조적 차원의 비유가 적용될 때 실현된다.

    

구조적 차원의 비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비유의 개념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비유는 시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시의 구성 요소는 시의 주요한 배경 지식으로서 시 쓰기에 있어 언제든 창조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운동 경기를 재미있고 실속 있게 관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경기에 대한 ‘룰rule'을 잘 알아야 한다. 이 룰에 대한 숙지와 인식 여하에 따라 관전의 쾌감이 다르고, 태도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관중의 태도가 이러할진대 경기의 주체인 선수가 룰을 모르고 경기장에 들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글쓰기와 글에 대한 감상과 이해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운동 경기의 주체인 선수가 룰을 모르고 운동에 참여할 수 없듯이 글쓰기 주체인 창작자가 글에 대한 기본적인 체계와 그 구성 원리를 제대로 모르다면 제대로 된 글이 나올 수 없다.

    

시에 대한 일반의 생각이 있다. ‘시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들 고등수학이나 물리학 추상 미술이나 고전 음악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유독 시가 어렵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평과 불만이 많다. 이는 분명 잘못된 태도이다. 고등수학이나 추상 미술이 그러하듯이 문학의 성취도 치열한 지적 투자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요소 즉, 주제의 구현과 제목 붙이기, 시의 구성, 어조의 역할과 어조 구성의 유의점, 역설과 아이러니, 상징, 비유, 인유와 패러디, 시점과 거리, 화자와 청자의 관계, 알레고리, 서술, 묘사 등의 배경지식은 시 창작에 있어 반드시 숙지해야 할 첫 번째 항목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무엇하나 소홀할 수 없지만 이 가운데 여기에서는 지면상 비유에 대하여만 설명하고자 한다.

    

비유는 서로 다른 사물들이나 관념들 간의 유사성에 대한 지각 행위를 말한다. 이것이 ‘차이성’에 주목하는 아이러니와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형태나 모양의 유사성과 내용이나 성질의 유사성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좀 우스운 예를 들어 전자의 경우를 설명해보자. 평생을 아이의 천진무구한 마음과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 가신 천상병 시인의 프로필 사진을 두고 일찍이 고은 시인은 “천상병 시인의 얼굴은 잘못 말린 해산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천상병 시인의 얼굴이 말린 해산물같이 많이 구겨져 보인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해산물과 시인의 얼굴 사이에서 ‘구겨졌다’는 형태의 유사성을 찾았기에 위와 같은 비유적 표현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활은 촛불이다” “내 마음은 호수다” 같은 시 구절들은 형태나 모양이 유사해서 나온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내용이 유사하기 때문에 나온 비유이다. 생활과 촛불은 ‘언제 꺼질지 모른다’ 는 점에서 마음과 호수는 ‘맑고 깨끗하다’는 점에서 서로 간 유사성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비유의 개념을 이해했을 때 구조적 차원의 비유를 시 쓰기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구조적 차원의 비유는 위에서 든 예처럼 시편 속에는 구체적 비유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체적 비유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전체 차원에서 보면 비유가 적용되는 것이 구조적 차원의 비유다.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공광규, 시, <소주병>, 전문

    

불을 품은 푸른 몸의 사내(소주병)가 있다. 그를 마시고 사람들은 피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을 누군가가 다 소비했을 때 그는 비참하게 버려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시인은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에서 아버지의 흐느낌을 듣는다. 그도 어느새 잔(자식)에다 자기를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가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위 시편은 구체적으로 시행을 통해 비유가 진술되지는 않았지만 전체적 차원에서 비유가 적용되고 있다. 즉, 아버지와 빈소주병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시인은 그것을 화두로 혹은 그것에서 직관 혹은 영감을 얻어 한 편의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 편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여 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흐느끼던 울음에는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 있었다

 

 

채식주의의 질기디 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 닿은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 손택수, 시, <소가죽북> , 전문

    

소처럼 가련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살아서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전 노동력을 바치고 죽어서는 부위별로 팔려나가고, 북이 된 가죽은 매까지 맞으며 운다. 우리들의 이전 시대 어머니들도 그랬다. 소까지는 아니지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력 이데올르기 속에서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고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었던 존재가 우리들의 보통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 시는 이질적인 두 사물 즉, ‘소가죽’과 ‘어머니’를 연결하는 유사성의 시작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다섯째 시는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진실의 구현이다.

    

진실 구현을 위해서는 경험 현실을 재구성할 때 이를 굴절시킬 줄 알아야 한다. 사실의 재현과 진실의 구현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개념을 혼동하여 사실 재현을 진실 구현으로 오인하고 있다. 더불어 과학적 사실과 문학적 진실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아비의 평생과 죽은 엄니의 생애가

고스란히 거름으로 뿌려져 있는

다섯 마지기 가쟁이 논이 팔린 지

닷새째 되는 날

품앗이에서 돌아온 둘째 동생 재식이는

한동안 잊었던 울음 쏟고 말았다

맷돌 같은 손으로 흘러넘치는 눈물 찍으며

대대손손 가난뿐인 빛 좋은 개살구의

가문의 기둥 찍고 찍었다

동생의 아이구땜으로

“정직, 성실, 근면하게 살자”

가훈이 덜컹 마루 끝으로 떨어지고

동네 허리 감싸 안은 야산도

함께 울었다 여간한 슬픔

끝 모를 절망의 늪에

온몸 빠졌을 때도, 눈물에 인색하면서

선웃음 잃지 않던 뚝심의 동생이

썩은새로 무너지며 터뜨린 눈물로

텃밭 푸성귀들을 자지러지게 흔들던 날

예순의 머슴 아비도

죽은 엄니 초상화 꺼내 들고

아끼던 눈물 한 방울

방바닥으로 굴리셨다

팔려버려 지금은 남의 논이 된

그 논에 모를 꽂고 온 동생의 하루가

내 살아온 부끄러운 나날에

비수되어 꽂히던 달도 없던 그날 밤

건너 집 흑백 TV 브라운관 뛰쳐나온

프로야구의 들끓는 함성이

허름한 담벼락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 이재무, 시, <재식이>, 전문

 

필자가 이 시를 쓸 때 우리 집은 절대적 가난을 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위 시편은 가난했다는 정황을 강조, 독자에게 울림을 주기 위하여 많은 부문에서 사실을 왜곡하였던 게 사실이다. 그것을 솔직히 고백하겠다.

    

다섯 마지기 논이 팔렸다는 것과 가훈과 지금은 팔려버려 남의 손으로 넘어간 논에 동생이 모를 심고 돌아와 울었다는 것 등 모두가 사실을 과장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가난의 정황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가상현실을 지어낸 것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그 시절 대개는 초등학교에서 낸 숙제 때문에 가훈이 임시방편으로 지어지고는 했던 게 사실이었다.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에 무슨 가훈 따위가 필요했겠는가. 그러나 가난의 정황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는 과감하게 가훈을 지어내고 또 하지도 않은 동생의 노동 행위조차 조작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위 시와 같이 고백체에 해당하는 시에서조차 보편적 감동과 울림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경험 현실을 재구성할 때 그것을 굴절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난했다는 사실 그것마저 조작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시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최근 현대시에서는 시 속의 화자와 시인이 일치하지 않은 몰개성적인 시가 더욱 많이 쓰여지기도 한다. 이 경우 시 속의 현실은 시인의 경험 현실과는 무관하게 진술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일반인과 다르게 시인의 거짓말에는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다만 그 거짓말은 독자의 밀도 높은 정서의 환기를 위해 실감 속에서 완벽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여섯째 좋은 시는 생각의 계기를 부여하여야 한다.

    

좋은 문학(시)은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해와 세계 이해를 위한 통찰의 계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먼저, 영화를 가지고 설명하겠다.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고 났을 때 우리는 감동의 후유증을 앓게 된다. 더불어 그 영화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이창동 감독이 작가 이청준의 단편 <벌레>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 <밀양>이 그렇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과연 ‘용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화두를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온 용서라는 통념을 다시 한 번 각인하여 성찰하게 만든 것이다.

    

좋은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러한 통찰이 매번 거창하거나 의미심장할 필요는 없다. 비록 사소한 것일망정 아무런 자의식 없이 자동화되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우리의 실존 안의 여러 사소하나 무시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부여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 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 떼

- 나희덕, 시, <어린 것>, 전문

 

 위 시편은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린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다람쥐를 보고도 핑그르르 젖이 도는 마음이 곧 시인의 마음이다. 굳이 거창하게 생태학이니 정령신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모든 생명 지닌 것들에 대한 각별하면서도 애뜻한 관심과 사랑을 다시 한 번 갖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박꼭질하던 어린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갔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 김광규, 시, <어린 게의 죽음>, 전문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며 자유를 살던 어린 게, 아직 생명의 꽃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비명횡사한 어린 게의 죽음. 이 시편을 대하며 필자는 몇 년 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어린 여중생 ‘미순, 효순이’의 앳된 얼굴이 ‘어린 게’와 함께 떠올랐다. 몰론 이 시편은 지난 연대에 발표된 것이지만 시차를 뛰어넘어 오늘의 문제와 의미를 떠올리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 시는 분명 문명의 폭력성을 고발한 작품이지만 ‘군용 트럭’이란 시어 때문에 정치적 알레고리로도 읽히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좋은 시란 이처럼 우리 나날의 관성적 일상에 찬 물을 끼얹는 자각을 가져다준다. 문명이 얼마나 무참하게 생명을 짓밟고 군사 파시즘이 얼마나 소외된 민중의 일상에 광폭한지를 웅변하지 않고도 시적인 장치를 통해 실감을 실어 전해주는 것이다.

 

일곱 번째 좋은 시는 배제와 선택의 원리가 적용될 때 이루어진다.

 

바다는 육지의 먼 산을 보지 않네

바다는 산 위의 흰 구름을 보지 않네

바다는 바다는, 바닷가 마을

10여 호 마을 남짓한 포구 마을에

어린아이 등에 업은 젊은 아낙이

가을 햇살 아래 그물 기우고

그 마을 언덕바지 새 무덤 하나

들국화 피어 있는 그 무덤을 보네

- 김명수, 시, <바다의 눈>, 전문

 

만약 이 시에서 ‘바다의 눈’이 ‘먼 산, 흰 구름, 바닷가 마을’ 등 모두를 보았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바다의 눈은 어린아이를 업은 젊은 아낙이 새 무덤 옆에서 그물을 기우고 있는 장면만을 주목했기 때문에 비로소 시로 성공할 수 있었다. 시를 쓸 때 너무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하나의 소재만을 집중적으로 다룰 때 성공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소재를 잘 찾아야 한다

    

시 창작에 있어 주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소재의 발굴이다. ‘그리움’이니 ‘기다림’이니 하는 추상적 주제를 시로 쓰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소재를 잘 만나면 얼마든지 좋은 시로 태어날 수 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시, <그리움>, 전문

 

    

이 시는 그리움이라는 관념적인 추상어를 주제와 제목으로 삼고 있지만 ‘파도’와 ‘뭍’의 관계를 통해 그것을 그려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벼랑은 번번이 파도를 놓친다

외롭고 고달픈,

저 유구한 천 년 만 년의 고독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철썩철썩 매번 와서는 따귀나 안기고 가는 몰인정한 사람아

희망을 놓쳐도

바보같이 바보같이 벼랑은

눈부신 고집 꺾지 않는다

마침내 시간은 그를 녹여

바다가 되게 하리라

- 이재무, 시, <벼랑>, 전문

 

유치환의 시 <그리움>을 뒤집은 발상이 이 시편을 낳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 시에는 역발상이 들어 있다. 일반적 통념을 깨고 ‘파도’ 대신 ‘벼랑’을 행위와 문장의 주체, 주어로 내세운 것이다. 이 시 역시도 소재가 주제 구현에 이바지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 놓았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 문태준, 시, <뻘 같은 그리움>, 전문

 

이 시는 그리움이란 추상어를 구체적 감각어로 한정시켜 놓았다. 또한 그리움이란 추상어를 감각적 언어를 통해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역시 적절한 소재들을 동원하여 실감나게 주제를 구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아홉 번째 좋은 시는 자기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지난 연대 문학예술의 최대 공적은 체제로부터의 검열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시인 작가들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억압적 금기와 싸우다 감옥에 가고 더러는 절필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체제로부터의 검열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검열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많다. 그것은 체제의 눈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시인이나 작가 주변에 있는 타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문학의 영토는 무한대로 확장되어야 한다. 모든 금기와의 싸움에서 지지 말아야 한다. 문학은 종교나 도덕이나 이념이나 철학 등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문학 안에 부수적으로 파편화되어 편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에 문학이 종속된다면 상상력의 영토는 형편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