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향기와 시인의 품격
나호열(시인)
예로부터 도봉산은 수많은 시인묵객들에게 피세 避世의 휴식과 수양의 공간으로, 수려한 풍광이 빚어내는 경배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산의 정기를 가득 품은 아늑함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정주 定住했던 곳이다. 이주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요즘의 세태에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른다는 것은 그 지역의 정서를 체득하거나 동화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와 시인에게 주어지는 공간은, 그 공간이 시적인 모티브가 되거나 영감을 주는 매개체가 되거나 아니면 그 공간 속에서 오래 정주하며 물아일체의 경지에 닿으려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와 시인의 공간을 정주定住의 의미로 좁혀 들어가게 되면 곧 우리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기거나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는 몇몇의 시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반 세기 가까운 시간을 도봉산록에 거주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들로서 이생진, 2018년 4월에 영면에 든 황금찬 시인을 기억해야하는 이유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예술의 분야가 그러하지만 문학은 인격수양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근래에 이르러 작품의 수월성과 작가의 인품을 구분해야한다는 논조가 우세하지만 그럼에도 시인, 작가들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추세 또한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독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명시 名詩들이 그 시를 생산한 시인들을 흠모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일처럼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지만 종종 시의 향기와 시인의 품격이 어우러지지 않는 불쾌함을 목도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생진 시인과 황금찬 시인은 그들이 생산한 시의 길과 그들의 인생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까닭에 도봉을 빛내는 시인으로 선양宣揚해야 마땅하다. 한 마디로 두 시인에게서 발견되는 언행일치는 평생 동안 일관되게 표명해온 인간 일반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그 사랑을 구현하고자 하는 열정에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념적 편향성을 거부하고, 한결 같이 일상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노래한 두 시인이 쌍문동(황금찬), 방학동(이생진)의 가까운 이웃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09년 3월 좌로부터 나호열, 김년균(문협 이사장) , 황금찬 선생 : 동숭동 문협 이사장실에서
황금찬 시인은 1918년 8월 10일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서 2017년 4월 8일 4시 40분 강원도 횡성 자택에서 작고했다. 그러나 노환이 깊어지기 전까지 반생을 쌍문동에서 거주했다. 그는 평생 동안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을 뿐더러 험담 대신 늘 상대방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아 ‘황과찬 선생’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1953년에 ?문예?에 「경주를 지나며」가 1회 추천을 받았으나 그 후 ?문예?가 폐간되어 다시 ?현대문학?에서 박목월 과 박두진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그는 시가 양심의 소리이며 예술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선과 미의 추구, 인간에게 행복과 절대자유를 안겨줄 수 있기에, 인성의 본원, 그 뿌리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중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기독교 신앙인이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시인 자신의 양심에 근거한 휴머니즘에 철두철미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시인의 개인사는 결코 행복했다고 볼 수 없다, 사랑하는 대학생 딸을 잃고 , 아내를 떠나보내고 2009년에는 장남인 시인 황도제를 잃었다. 그는 이렇게 그 슬픔을 회고했다.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굶는 것이고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괴로움은 건강을 잃는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이 세 가지를 맛보지 않으면 그는 우선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굶는 일은 일시적인 일일 수 있고 앓는 것도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것은 그 슬픔을 형용할 수 없다.”
2009년 3월 16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한국문인협회가 주최하는 ‘황금찬 시 읽기’ 행사 전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딸애가 저 세상에 갔을 때도 집사람이 돌아갔을 때도 그렇지 않았는데 도제(큰 아들)가 세상을 떠나니 너무 그리워요’하시는 바람에 우리 모두가 숙연해져서 숟가락을 놓았던 기억 또한 가슴 아린 일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긍정적이고 온화하게 한 평생을 사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자식을 잃은 슬픔을 어쩌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는 부끄러움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생전에 39권의 시집을 펴냈다. 2004년에 그의 고향인 강원도 양양군 낙산도립공원 관광안내소 앞 잔디공원에 생전에 시인이 가장 사랑했다는 시비가 세워졌다. 계간 『시인정신』의 발행인인 양재일 시인이 모금활동을 벌여 세운 시비에 「별과 물고기」가 아로 새겨져 있다. 생전에 황금찬 시인은 이 시비 詩碑와 시 「별과 물고기」를 가장 아낀다고 술회한 바 있다.
별과 물고기
황 금 찬
밤에 눈을 뜬다.
그리고 호수 위에
내려 앉는다.
물고기 들이
입을 열고
별을 주워 먹는다.
너는 신기한 구슬
고기 배를 뚫고 나와
그 자리에 떠 있다.
별을 먹는 고기들은
영광에 취하여
구름을 보고 있다.
별이 뜨는 밤이면
밤마다 같은 자리에
내려 앉는다.
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 먹고
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
먼 하늘에 떠있다.
심장에 장미의 향기를 평생 품었던 시인 황금찬은 우리나라의 최장수 시인으로 백수를 누리고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2019년 4월 나호열, 이생진 선생님: 우이동 백란에서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1978)로 시인 이생진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을 한다
그러다가도 해가 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술을 마실 때에도 바다 옆에서 마신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 시「그리운 바다 성산포 ․ 1」부분
교사 생활을 그만 두고 우리나라 섬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서 일약 섬의 시인으로 불려지기 시작한 이생진 시인은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슬픔을 섬으로 대비하면서 고독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고독에 동화되는 낭만적 서정을 표출한다.
시가 뭔데
나는 늘 이 물음을
입에 물고 잔다
시가 뭔데
잠자리냐
매미냐
아니면 나비냐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비가 깨꽃을 입에 물고 죽었더라
맞다 맞다
그게 시다
꽃을 물고 죽은 나비
그게 시다
나도 그랬으면
- 「시가 뭔데」전문
그는 신앙적 해탈이나 영원을 꿈꾸지 않는다. 오늘의 삶, 순간의 희열에 생명을 바친다. 몇 년 전 시인은 아내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구순을 맞이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동반자
늙으면 다 그렇고 그렇다
점심 먹으러 온 노인복지회관
내가 뽑은 식권 번호가 456 이고
뒤에 줄이 남았으니 500은 되겠다
노인들만 모이니 정말 무섭다
오늘은 왜 이리 많지
아 말복이지
점심 메뉴에 닭다리가 하나씩 들어가는 날이다
그러면 그렇지
식권을 받아들고 살금살금 지하로 내려간다
지팡이도 따라온다
나도 말이 없고 지팡이도 말이 없다
지팡이도 따라다니며 많이 닮았다
친구들도 하나씩 가고
아내도 먼저 갔다
내가 간 뒤의 지팡이는
나보다 더 혼자다
혼자 식당에 오지 못한다
내가 남았을 때보다 더 쓸쓸하겠다
시도 못 쓰고
그런 생각을 하며
밥을 기다린다
지팡이도 기다린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아직도 남은 열정이 있다. 구순을 넘긴 나이에도 (1929년 10월 1일생) 매달 인사동 ‘시가연’ 에서 시낭송 퍼포먼스를 개최하고 끊임없이 자유를 염원하는 낭만적 시풍을 견지하며 왕성한 시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1960년대 [현대문학]을 통해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1996년 『먼 섬에 가고싶다』(1995)로 윤동주 문학상, 2002년 『혼자 사는 어머니』 (2001)로 상화(尙火) 시인상을 수상했고. 2001년 『그리운 바다 성산포』(1978)로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았다. 우리나라 천 개가 넘는 섬에 발자국을 남기고 스스로 섬이 되기를 갈구하는 고독을 즐기는 시인이다.
어느 봄날 시인과 함께 기타치고 노래하는 육순의 현승엽(가수) 에게- 그는 시인의 제자이다 - 이렇게 말했다.
‘어때 우리 우이도나 갈꺼나!’
시인이 닿았던 섬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섬이 우이도라고 했다. 걸어다니는 시! 이 생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도봉의 주민으로서 도봉을 빛낸 시인들을 기리는 문학관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희망을 갖는 것이 헛된 욕심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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