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정처 定處의 경계와 시뮬라시옹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9. 2. 22. 15:45

정처 定處의 경계와 시뮬라시옹

나호열

 

1.

 

어쩌다 ‘진화’ 進化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단어가 이끌고 오는 불안, 부조리, 죽음, 투쟁 등등의 별로 유쾌하지 않은 개념들이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이 아닐까 하는 슬픈 감정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 저 유인원 類人猿의 탈을 벗어 던지고 어쩌다 오늘날의 현생 인류로 진화한 위대한 인간이 이룩한 지능 知能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망과 탐구욕을 덤으로 던져 주었다. 그렇다면 주어진 환경에 대응하는 생존의 몸부림이었던 진화의 과정을 넘어서 주어진 환경, 주어진 세계의 매커니즘을 전복 顚覆 시키고 새롭게 구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는 과연 ‘창조’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절하게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남성 / 여성. 자연 / 인간, 개인 / 사회, 민주 / 반민주 등과 같은 대립적 담론들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극복되어야 하거나 소멸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당위성에 대한 면밀한 각성이 요구된다는 과제를 안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사회체제의 변혁과 의식의 변화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으로서 생존의 충분조건은 될 수 있겠지만 필요조건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와 병행해서 오늘날의 문명이 추구하는 생활의 풍요나 편리성이 반드시 삶의 질적 향상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지하철이나 KTX같은 교통수단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편리성을 준다. 이동통신망은 휴대전화로 한 편의 영화를 몇 초 만에 내려받기 할 수 있다. 범죄예방을 위해 CCTV는 거미줄처럼 숨어 있고, 과속방지를 위해 도로에는 속도감지 무인카메라가 눈을 번뜩이고 있다. 그러나 ‘빠름’이 반드시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지 않는다. 30초 걸리던 영화 내려받기가 5초 안에 끝난다는 사실이 기다리는 무료함을 줄여준다는 편리함 이상의 쾌락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방범용 CCTV나 고속도로의 무인카메라는 안전 도모라는 미명하에 감추어진 인간의 비열함과 폭력성을 그대로 반증하는 도구일 뿐이며 오히려 감시받고 있다는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유발하는 장치에 불과할 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인간이 계속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고안해 낸 제도나 도구는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무한 확대하는, ‘미국 자체가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건설되었다.’(시뮬라시옹)는 말로 요약되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이 오늘의 삶을 규명하는 적절한 언명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2.

 

아무리 세상이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달려 나가도 이 편한 세상은 더 멀리 달아나 버리고, 아무리 밝은 세상을 노래해도 여전히 음지는 존재하는 법이니 많은 시인들이 현대문명의 피로함을 인지하고 안식처를 갈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캄캄하게 옆구리를 더듬는

몽환의 섬

별들은 늦도록 지지 않고 반짝여 줄 것이다

나의 퀘렌시아

 

- 한소운,「퀘렌시아」마지막 연.

 

퀘렌시아 querencia는 스페인의 투우장에서 소가 잠시 싸움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며 기력을 회복하는 장소라고 한다. 소가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투우사도 그 영역에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퀘렌시아는 이에 덧붙여 귀소 歸巢의 뜻으로 안식처의 의미로 쓰인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시「퀘렌시아」에 적시된 몽환의 섬은 어디에 있을까?

 

김재근 의 시「혼몽」은 고단한 삶의 안식처로서의 수면 睡眠을 이야기한다. 잠은 휴식인 동시에 꿈의 산란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사 假死 상태의 잠은 편안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살아있음의 각성을 요구하는 신호를 보낸다. 말하자면

‘잠은 또 다른 실종의 기록’이고 ‘뜬 눈으로 잠든 미라처럼/ 산 채로 말린 시체처럼/ 잠 속에 영원히 멈춘? 안식처의 부재를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누구의 결핍을 듣는 자세일까

몇 번의 체위로

미라를 돌려 눕히듯

감아놓은 잠들이 풀리지 않아

뜬 눈으로 맥박을 헤아리다

깬 잠에게 흰 발을 그려주면

어느 몽유까지 걸어갈까

떠도는 심장에 닿을 수 있을까

 

- 「혼몽」앞 부분

 

자신만의 꿈을 가질 수도 없는 온전히 ‘나’ 일 수 없는, 타자에 의해서 규정되어진 ‘나’는 따라서 ‘어떤 소리가 있어야만 / 깰 수 있다는 / 다른 강박이 생겨났다 / 문을 탕탕 닫기 시작했고 / 수돗물이 텅텅 소리 나도 물을 열어두었다 / 방안 가득 물이 찼고 / 수면 아래로 내가 잠겼다’( 이상은 ,「고요한 강박」부분)는 의타적 존재가 되어 버리고 가끔씩만 숨을 쉬는 일상에 놓여진 현대인의 일상을 고백한다.

 

멈출 리 없는 하루가 가고

숨을 참고 살아있던 날도 모래 속으로 빠지고

욕조에 담긴 밤 껍질처럼 얼굴을 담근 채 내일로 이송됩니다

거기 내일은 모래만큼 튼튼합니까

여기 욕조는 오늘만큼 무사합니까

- 천수호 ,「모래 욕조」 4연

 

안식처가 되지 못하는 불편한 잠과 수면 垂面과 수면 水面 아래서 오늘날의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변화와 혁명은 ‘모래만큼, 오늘만큼 튼튼하고 무사하느냐’고 묻 는 반어적 외침에 그 누구도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변화와 혁명은 유령, 시뮬라시옹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멈출 리 없는 하루’는 휴지 休止의 시간을 가질 수 없이 ‘숨을 참고 살아있던 날’이며 그런 까닭에 사상누각 沙上樓閣, 지리멸렬한 타자화된 ‘나’만 모래로 스러지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오늘의 많은 시인들이 생명의 기쁨과 새날의 희망을 노래하는 일보다 편리하고 안락한 삶의 지층 속에 숨어 있는 위장 僞裝되거나 가장 假裝된 삶의 진상 眞相을 목도하고 반응하는 것은 끔찍하지만 시인의 걸머져야 할 거룩한(?) 사명인 까닭에 시가 노래가 되지 못하는 외침이 될지라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3.

실재 實在에 대한 철학의 해묵은 논쟁은 실재가 끝없는 이미지의 파생 派生이라는 시뮬라시옹의 관점에서 볼 때는 무의미한 다툼에 불과하다. 순식간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대사회가 맹렬하게 추구하는 빠름, 안락의 이면에는 끝없이 소비의 욕망을 부추기고 개인의 자유를 집단무의식의 궁지 窮地로 몰고 가는 자본주의의 블랙홀이 있다. 규격화된 빠름, 표준화된 안락의 이미지는 마약처럼 개인의 실재를 유목의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하나의 거대한 군상 群像으로 압축하여 버린다. 유종인의 시「까만 조약돌」은 어느덧 맹목의 그물 속에 갇힌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뙤약볕 아래 광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전에 없이 내 그림자는 마르고 길어졌다

 

저만치 솔개그늘도 스치지 않는 곳

유독 까만 조약돌이 눈길을 잡아끄는 거였다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며 생각하길

바닷가 몽돌밭에서 살다 용오름을 타고 여길 왔는가

 

드디어는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마저 꺾을 때

가만 무릎까지 마저 꺾어 들여다보았다

 

하얀 박하사탕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달라붙은 개미들, 

일용할 단맛 하나에

온몸을 바친 저 바보 같은 끌림들,

헌데 사탕발림의 말조차 없는 내 침묵은 또 뭔가

 

단맛이 개미들을 천천히 검게 굳혀가리라

옴짝달싹할 수 없는 단맛 다음에 죽을 맛이

개미들을 붙힌 사탕을 조약돌로 바꾸리라 

환상이었던 사랑도 드디어는 

쓰디쓴 까만 조약돌 하나 낳으리라  

 

- 유종인, 「까만 조약돌」전문

 

‘하얀 박하사탕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달라붙은 개미들, / 일용할 단맛 하나에/

온몸을 바친 저 바보 같은 끌림들,?이 종국에 맞이할 운명은 사탕에 들러붙어 끝내 조약돌이 되고 말기에, 실재라고 믿었던 단 맛 가득한 사랑도 환상이었다는 쓸쓸함이 맹목의 개미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속에 가득 배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얀 박하사탕’으로 비유된 풍요로 위장된 배금 拜金의 욕망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인 재앙으로 우리를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경고의 도 다른 시로 임동확의 시 「잔디 깎기」를 주목한다.

 

잔디 깎기」는 인간이 설정한 반 자연적 이데올로기의 무망함을 고발하고 나아가서 온 생명의 소중함을 증언하는 생태시로서의 의의를 보여주는 시이다.



늦여름 폭염이 끝나갈 무렵 이리 흔들, 저리 건들거리던

토끼풀, 바랭이, 여뀌풀, 닭의장풀, 흰 개망초, 분홍 유홍초가

미처 대오를 갖추기도 전에 마구 잘려 나간다

수천, 수만의 벌떼처럼 윙윙거리는 예초기의 강철 칼날 아래

때마침 교미 중이던 암수 방아깨비 한 쌍이, 술패랭이에 머리 박고

한창 꿀을 빨던 작은주홍부전나비가 갈갈이 찢긴 채 튀어오른다

철망을 타고 갓 피어난 인동덩굴이 전쟁포로처럼 끌어와 처형당하고

덜 여문 씨앗의 강아지풀 군락이 뿌리째 공중으로 휘날린다

단지 잔디 아닌 것들은 그저 영락없이 귀찮고 성가신 잡풀일 뿐인,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이라곤 솔이끼들뿐인 한낮 공원의 잔디밭

까닭 없이 죽어간 메뚜기, 각시거미 피 섞인 풀 비린내가 범벅이다

분명 세상은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다투면서 서로 기댄 채

제 영역을 지키거나 넓혀 가며 한층 더 아름다운 법인데,

창조주의 가장 큰 비밀 하나는 필시 지금껏 단 한 번도 똑같은

풀과 꽃, 나무와 구름 모양을 만들지 않았다는데 있을 터인데

그러나, 누가 일정한 크기와 질서의 잔디밭을 꿈꾸는가

아니면, 과연 누굴 위해 웃자란 잔디조차 가차 없이 쳐내며

우린 마치 군가(軍歌) 같은 일사불란한 표준과 규율에 따르고 있는가

한낮이 지나도록 며느리밥풀꽃, 넝쿨별꽃, 도꼬마리, 장구채, 별꽃들이,

그 누구의 제지도 없이 짓물린 배추흰나비, 노린재, 풀색꽃무지의 사체들이

미처 수습할 틈도 없이 흙먼지와 하늘 높이 풀풀 날아오르고 있다

 

- 임동확, 「잔디 깎기」전문

 

잔디 깎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풀이나 꽃이 잔디보다 가치가 없는 것인가?

풀이나 꽃에 기대어 살던 방아깨비, 메뚜기, 각시거미, 작은주홍부전나비, 배추흰나비, 노린재 들은 제 수명대로 살아가야할 의미가 없는 존재들일까? 매끈한 조경을 위해서 잔디는 필요하지만 잔디밭만이 아름답다는 논리는 가당치가 않다. 골프장에서 즐거운 운동을 위해 잔디는 필요하지만 골프장을 위해 잔디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인간이 구축한 문명이 인간을 제외한 생명들을 처단하는 폭거를 서슴치 않았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그와 같은 행위의 반복이 우리의 미래를 밝게 비쳐주지 않는다는 사실을「잔디 깎기」는 슬프지만 강하게 증언하고 있다. ‘잔디’로 상징되는 권력의 힘,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저지르고 있는 획일성과 분절 分切이 ‘분명 세상은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다투면서 서로 기댄 채/ 제 영역을 지키거나 넓혀 가며 한층 더 아름다운 법’ 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외면하는 한 어느 사회도 디스토피아의 늪에서 한 걸음도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계간 『문학의식』 2019년 봄호 계간평

 

* 언급된 시들

 

혼몽

김재근

 

 

누구의 결핍을 듣는 자세일까

몇 번의 체위로

미라를 돌려 눕히듯

감아놓은 잠들이 풀리지 않아

뜬 눈으로 맥박을 헤아리다

깬 잠에게 흰 발을 그려주면

어느 몽유까지 걸어갈까

떠도는 심장에 닿을 수 있을까

온종일 취한 메아리가

익숙해진 귓속 이명이듯

잠은 또 다른 실종의 기록인지

같은 체위가 오래될수록

몸은 어떤 마비를 부르는데

이대로 잠들어야 한다면

이대로 깨어나야 한다면

뜬 눈으로 잠든 미라처럼

산 채로 말린 시체처럼

잠속에 영원히 멈춘

 

* 약력

 

부산 출생

2010년 창비 등단

시집<무중력 화요일>

 

 

고요한 강박

     이상은

 

 

눈이 떠지면서

잠이 깼다

그 이후

잠에서 깨려면

눈을 떠나한다는

강박이 생겨났다

눈을 뜨기 위해

알람을 맞췄다

어떤 소리가 있어야만

깰 수 있다는

다른 강박이 생겨났다

문을 탕탕 닫기 시작했고

수돗물이 텅텅 소리 나도록

물을 열어두었다

방안 가득 물이 찼고

수면 아래로 내가 잠겼다

여기가 수면 아래인지

수면 위인지 알아보기 위해

가끔 숨을 쉬었다

고요한 하루가 거기 서있었다

 

 

이상은 :

 

2012년 『문학과의식』 등단.

시집으로 『어느 소시오패스의 수면법』이 있음.

 

 

 

 

모래 욕조

 

천수호

 

 

이 밤을 그만 데우십시오

좀 더 끓이면 이 캡슐은 폭발하고 맙니다

 

TV가 들끓고 에어컨이 돌아가고 전선이 펄떡입니다

도로에서는 육식 공룡의 울음을 내는 타이어가 멈추지 않고 속도를 냅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욕조에 몸을 담고

눈물 따위는 플라스틱 장난감에게나 줘버리지요

슬픔은 누가 흘린 지도 모르게 욕조에서 쏟아내는 눈물

달래줄 사람도 없던 모두의 그날을 흔들어 봐요

 

멈출 리 없는 하루가 가고

숨을 참고 살아있던 날도 모래 속으로 빠지고

욕조에 담긴 밤 껍질처럼 얼굴을 담근 채 내일로 이송됩니다

거기 내일은 모래만큼 튼튼합니까

여기 욕조는 오늘만큼 무사합니까

 

이 밤은 데우지 않아도 뜨겁습니다

뜨겁지 않아도 소리만 요란하게 폭죽이 터지는 밤입니다

 

우리가 빼내야할 것은 물기입니까 열기입니까

배수구로 하염없이 흘러들어가는 것은 물입니까 욕조입니까

욕조에 대한 기억이 우리 몸을 퉁퉁 불릴 즈음

젖은 몸속으로 마른 욕조가 무너져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천수호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명지대, 단국대 출강



퀘렌시아

 

한 소 운

 

찻잔에 담아둔 사람 하나 있듯

티스푼 위에 떠도는 섬 하나

 

해안절벽의 모든 길 다 지워도

가슴과 가슴으로 길을 만들며

파도의 가락 위로 달빛 무정하게 쏟아버리고

 

캄캄하게 옆구리를 더듬는

몽환의 섬

별들은 늦도록 지지 않고 반짝여 줄 것이다

나의 퀘렌시아

 

 

 한소운

경주 건천출생

시집 『그 길 위에 서면』『아직도 그대의 부재가 궁금하다』

『꿈꾸는 비단길』

예술기행집 『황홀한 명작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