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산업시대 현대시의 향방(向方)
나호열
Ⅰ.문학의 위기와 전망
문학의 위기가 소문이 아니라 이제는 당연하게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대형 서점의 시집 코너는 구석으로 쫓겨 가고 있고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수 백 개가 넘는 문학잡지가 발행되고 있고 어림잡아 만 명이 넘을 듯한 시인들이 오늘도 시를 쓰고 시집을 낸다.
속된 말로 자본력을 갖춘 메이저 출판 잡지사들은 그들의 홍보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그들의 상품(문학작품)을 유통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지만 그 그룹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의 시인들은 유통의 통로가 막혀 있어 독자와의 소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문학의 위기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까닭이 학교 현장에서의 문학 교육의 부실로 인한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하지 못했다는데서 찾아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원인 (遠因)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원인 (原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활자문화의 시대에서 영상문화의 시대로 변화해가는 양상이 문학의 쇠퇴를 가져오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면 현대문화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양상을 되짚어 보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본다.
첫 번째로 가치의 다양한 분화(分化)를 근간으로 하는 탈 이성주의 (脫 理性主義:포스트모더니즘)가 두드러지고 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경계의 해체와 이종 (異種)간의 결합이 지속적으로 변동하는 사회에서 의식의 흐름은 정해진 방향성을 갖지 못한다.
두 번째로 강력한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아날로그적 사고방식을 디지털의식으로 바꾸고 가상현실과 같은 새로운 세계(현상)로 감각을 인도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의사소통(意思疏通)은 속도의 가치를 지향하면서 아날로그적 사고를 지양한다.
세 번째로 세대 간의 불통을 야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로 곧바로 뛰어넘은 우리 사회에서 SNS는 세대 간의 공유할 수 있는 가치의 영역을 격절시켜 버렸다.
네 번째로 우리 사회는 -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소비를 추종하는 시대에 진입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식이 팽배한 사회로 들어섰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효용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문학은 대중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위에 열거한 현대사회를 특정하는 네 가지 요소가 모두 문학의 위기를 몰고 온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언급한 탈 이성적 사고와 SNS의 대두가 문학의 위기를 몰고 오는 근인 (近因)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수 천 년 동안 문학은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정서를 계몽과 교훈, 그리고 정서의 표현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골동품화된 자연과 과학의 경이로운 발전은 인간의 고유한 감성(感性)을 약화시키고 노래로 출발했던 시의 고향을 상실하게 만드는 까닭에 현대인들은 은유 (隱喩)의 시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위기는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프로슈머(prosummer)로서 시인을 각성시키고 분발하게 만든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문학은 소수의 애호자들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기꺼이 그들의 작품이 화석(化石)으로 남아 있기를 희망하면서!
Ⅱ. 화석이 되는 시를 찾아서
『月刊文學』은 우리나라 최대의 문학단체인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의 기관지이다. 또한 장장 반 세기를 넘어서서 해방 이후 한국문학의 선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온 포용력을 갖춘 종합문학지이기도 하다. 특정한 시류 (詩流)나 경향에 얽매이지 않고 2018년 11월호( 597호)부터 2019년 4월호(602호)까지 게제된 총146편의 시를 일별하면서 50년대 등단시인부터 2010년대 등단 시인까지 망라된 시의 다양한 면모 속에 한국 현대시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짚어보는 계기가 되었다면 다행한 일이다. 오늘의 삶을 증언하고 문장의 아름다움 속에 인간다움에 대한 고뇌가 스민 작품들을 언급하는데 중점을 두다보니 1. 오늘날의 문명을 비판하는 시 2. 인간의 내면을 고찰하는 시 3. 생명의 고귀함을 사유하는 시들로 나누어 보는 일이 앞으로 우리 현대시의 향방을 가늠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1.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시
앞에서 현대사회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눠 보았지만 현대문명은 자연을 자본 (資本)의 종속물로 유폐시키면서 의사(擬似) 그리움의 대상으로 대체하는 특징을 가진다. 다른 측면에서 현대사회는 공동체 사회를 와해시키고 단독자로서의 개인의 권리를 신장(伸張)하고자 하는 모순에 빠져 있기도 하다. 「줌인 갈라파고스」(정숙자),「춘천」(한소운),「줄다리기」(이서화),「설탕 유리창」(마경덕)의 시들이 이러한 현대문명의 속살을 아프게 그려낸 작품들이다.
「줌인 갈라파고스」(2019년 2월호)는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는 포식자로서의 인간을 고발한다. 갈라파고스는 찰스 다윈이 같은 종(種)이라 하더라도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는 적자생존 (適者生存) 의 진화론을 설명하는 페루 앞 태평양의 고도 (孤島)이다. 줌인 zoon in , 인간의 탐욕이 결국 이 아름다운 지구를 지옥으로 만들고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할 지 모른다는 신랄하고 섬찟한 예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춘천」(2019년 3월호)은 낭만 속에 감추어진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지금의 애인이 아니고 옛 애인을 만나 봄내로 찾아 들어가서 정답게 온갖 닭 요리를 먹는다. 어두운 시대의 희망 같았던 새벽닭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두 달 안에 죽기 위해 태어난 - 닭도 10년 이상 너끈히 살 수 있다고 한다- 닭을 보면서 어쩌면 부재(不在)하는 옛애인의 올골찬 목소리를 듣고 싶은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줄다리기」(2018년 11월호)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공동체 의식 (儀式)의 하나인 줄다리기 풍경을 묘사한다. 줄다리기는 마을과 마을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힘을 모아 공동의 단결을 염원하는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패배의 멍에를 씌우지 않는 평화의 경쟁이다. 오늘날과 같이 무한경쟁 속에서 제로 섬 게임에 함몰된 개인의 슬픔을 되짚어보는 시로 읽힌다.
「설탕 유리창」(2018년 11월호)은 폭력이 일상의 오락이 되어버린 비루함을 주먹으로 깨버리는 유리창, 머리를 향해 달려드는 맥주병이 식용 설탕으로 만든 가짜라는 사실을, 어쩌면 우리의 삶이 가짜로 가득 찬 행복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과도소비의 현실을 드러내는데 성공한 페이소스로 다가오는 작품인 것이다.
2.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
모든 인간은 외롭다. 아프고 늙어가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가 없다. 스핑크스가 물었었나? 발이 네 개이기도 하고 2개이기도 하고 3개이기도 한 것은? 정답은 사람!
그저 옛날에는 노망 들었다고 약도 없어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떴던 그 병이 치매라는 사실을 알아도 약이 좋아 오래오래 살면서 마음이 아픈 것...... 김점용 시인의「황혼」(2018년 12월호)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 올 미래를 슬프게 다독인다. ‘어머니가 난데 없이 숙제를 낸다 /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봐도 안 보인다’(마지막 행).
김상미 시인의 산문시「그리운 아버지」( 2019년 1월호)는 아버지 시대의 종말을 그리워하는 시이다. ‘아버지’로 통칭되는 권위주의가 사라진 시대가 되었는데 오히려 의지할 데 없는 가녀린 마음의 풍경을 되짚어 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과연 권력은 우리가 절멸시켜야 할 악의 꽃인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힘 센 자와 힘 없는 자 모두에게 권력은 불필요한 욕망인가?
신 새벽 시인의「푸른 모과가 있는 풍경」(2018년 3월호)은 함께 늙어가는 노부부와 오래되어 낡은 집을 오버랩 시키면서 희망도, 욕망도 사라져버린 미라와 푸른 모과의 대비를 통해 소멸해가는 존재의 슬픔을 묘사해내고 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이 감내해야 할 세월이 주는 질문에 무수한 오답을 적어내며 살아가는 우리가 오늘 예비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가만히 입술을 깨물어 보게 하는 시다.
3. 생명의 고귀함과 영원성을 노래하는 시
소멸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은 의식(意識)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자연으로부터 받았다. 그 선물은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자연의 유연하고 유장한 변화 속에서 생명의 힘이 죽음으로부터 돋아오른다는 성찰을 기꺼이 내주기도 한다. 박찬선 시인의「물의 집」( 2018년 12월호)은 노자 (老子)의 상선약수 (上善若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에너지인 물은 스스로 소유하는 법이 없다. 모든 생명을 품고 모든 생명의 집이다. 물처럼 그렇게 살면 좋으련만 웬만한 내공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공광규 시인의「꽃사막」(2019년 4월호)은 칠레 아타카마사막에 핀 꽃에 관한 실화를 재구성했다. 비가 내리지 않아 밤에 내리는 이슬로 간신히 선인장만 살 수 있는 사막에 7년 분의 비가 내리자 온갖 꽃들이 피어났다는 것. 그러나 시인은 그 사실로부터 ‘가시만 키워왔던 / 수십 년간 마른 사막이었던 나는/ 너라는 비를 맞아 / 꽃으로 폭발 중이다’ 라는 새로운 희망을 드러내고 있다. ‘너’가 흠모하는 사람이던, 희망과 행복 같은 관념이던 무슨 상관이 있으랴 . 진란 시인의「긴가민가 한데」(2019년 4월호) 도 주어진 사실로부터 얻어낸 생명력에 대한 관찰의 시이다. 흙도 물과 더불어 모든 생명이 기대고 종국에는 다시 돌아가는 영원의 집이다. 시인은 화분 속에서 돋아난 작은 토마토를 발견하여 이렇게 외친다 ‘씨앗은 당신의 오래된 전생이다’ 참으로 두고두고 마음에 묻어두고 싶은 시어 (詩語)이다.
Ⅲ. 그리고 남은 이야기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좋은 시는 어떤 시입니까?’ 대답은 간단하다. ‘ 나쁜 시를 빼면 다 좋은 시입니다.’ ‘그렇다면 나쁜 시는 어떤 시입니까?’ 대답은 역시 간단하다. ‘시의 언어를 오로지 전달의 진술로 사용하는 시’.
서두에서 말했듯이 문자 (文字) 예술은 영상매체의 위력 앞에 무력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나 시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를 찾고 언어가 지닌 애매성을 바탕으로 한 비유의 즐거움을 아는 독자들에게 시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산문시들이 어쩌면 진술 (陳述)의 방법으로 이야기의 친근성을 모색한다던가, 아니면 디카시처럼 사진, 영상과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융합의 방식을 도입하는 시도(試圖)도 시의 영역을 넓히는 좋은 촉매제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 두고 싶다.
* 『月刊文學』2019년 상반기 시 총평으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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