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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지 (부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9. 4. 1. 15:10

'죽은 아들을 위해..' 백제 위덕왕의 '아버지의 마음' 담은 사리기 국보된다

이기환 선임기자 입력 2019.04.01. 12:07

    
부여 왕흥사 목탑지에서 수습된 명문 사리장엄구.|문화재청 제공

‘정유년 2월15일(丁酉年 二月十五日)’. 2007년 10월10일 부여 왕흥사 목탑지를 조사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원들은 숨이 멎었다. 목탑지 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서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제 뚜껑이 보였고, 이 뚜껑을 열어보니 흙탕물 속에서 청동사리함(직경 7.5㎝, 높이 8㎝)을 확인했다. 조사단이 진흙투성이인 사리함의 표면을 닦아내니 ‘丁酉年 二月十五日’ 간지가 새겨져 있는게 아닌가.

조사단원들의 입이 말랐다. 이것은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이 유적의 연대를 똑똑히 알려주는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더 닦아보니 명문이 계속 보이기 시작했다. 조사단은 무엇보다 ‘백제왕 창(百濟王昌)’이라는 명문 앞에 모두들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백제왕 창’이라면 바로 백제 25대왕인 위덕왕(재위 554~598년)이기 때문이다.

명문의 내용.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는데 2장이었던 사리가 장례지낼 때 신(神)의 조화로 3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면밀히 명문을 판독해보니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였다. 즉 ‘정유년(577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는데 2장이었던 사리가 장례지낼 때 신(神)의 조화로 3장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왕흥사지 사리공 주변에서는 이밖에도 8150여 점 이상의 공양품들이 확인됐는데, 주요 유물들이 보물(제1767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은 1일 국내에서 알려진 사리기중 가장 오래된 이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지정 예고했다.

왕흥사 사리공 주변에서 확인된 8000여점의 공양물. 백제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창왕, 즉 위덕왕은 왜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왕흥사를 세웠다는 것일까.

창왕은 태자시절이던 554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라 원정에 나선다.

“(태자인) 여창(餘昌)이 신라 정벌을 계획했다. 그러자 원로대신이 ‘하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화가 미칠 게 두렵습니다’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여창은 ‘늙으셨네요. 어찌 겁을 내시오’하고 출전을 고집했다.”(<일본서기>)

그러나 태자는 도리어 관산성(옥천)에서 신라군에 의해 포위를 당한다. 이때 아버지인 성왕(재위 523~554년)이 아들을 구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그만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는다. 이 전투에서 성왕의 목이 잘리고 최고관등인 좌평 4명과 사졸 2만9600명이 몰살하는 등 참패한다. 태자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 왕위에 올랐는데 그 사람이 바로 창왕, 즉 위덕왕(재위 554~598년)이다. 이 참패는 백제에게, 아니 창왕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죄책감에 시달린 창왕은 “출가해서 불교에 입문하고자 한다”(<일본서기>)고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신하들의 만류로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창왕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잇달아 절을 창건하고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는 등 불교 제의에 힘을 쏟았다. 왕흥사 역시 아버지를 죽이고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렸다는 죄책감에 평생 살아왔던 창왕이 세운 절이다.

연꽃모양의 백운모판. 백운모판으로 연잎 사이에 마름모꼴 금박을 넣어 장식한 이 유물은 각각의 연잎을 따로 만들고, 중심은 둥근 원형판이 겹친 형태였다. 운모판의 두께는 0.008㎝였다.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부서질세라 얇디얇은 판이었다.|문화재청 제공

사리공 주변에서는 금은제와 동합금. 옥, 유리, 철제 등 다양한 재질을 써서 제작한 공예품들이 쏟아졌다.

목걸이와 귀고리, 탄목금구, 금모장식(金帽裝飾), 구슬, 금사(金絲) 등이 쏟아졌다. 이 가운데 곡옥의 머리를 씌운 모자형 장식(금모장식)과 작은 고리를 연접하여 만든 공구체(空球體), 탄목(탄화된 나무)을 장기알처럼 깎고 가장자리에 금판을 덧씌운 장식 등은 그 정교한 솜씨가 일품이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을 놀라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연꽃모양의 백운모판이다. 이 운모판 역시 백제 예술의 결정판이다.

백운모판으로 연잎 사이에 마름모꼴 금박을 넣어 장식한 이 유물은 각각의 연잎을 따로 만들고, 중심은 둥근 원형판인 겹친 형태였다. 그런데 운모판의 두께가 0.008㎝라는게 놀랍다.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부서질세라 얇디얇은 판이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백제 왕실 공예품이라는 역사적·예술적 가치,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절대 연대(6세기)를 가진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공예와 조형 예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 국보로 지정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탄목금구. 불에 탄 나무에 금테를 두른 장신구이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왕흥사 사리기’ 뿐 아니라 ‘구미 대둔사 삼장보살도’ 등 조선 시대 불화와 서책 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구미 대둔사 삼장보살도’는 1740년(영조 16년)에 영산회상도, 제석도, 현왕도, 아미타불도와 함께 조성되어 대둔사에 봉안되었던 작품이다. 이 중 삼장보살도(천상과 지상, 지하의 교주로 신앙되는 세 보살인 천장보살·지지보살·지장보살을 일컬음)만 남아있다. ‘김천 직지사 괘불도’는 1803년(순조 3년)에 제작된 괘불로, 현재까지 알려진 19세기 괘불 중 시기가 가장 빠르고 규모도 가장 크다.

‘도은선생시집 권1~2’은 고려 말 문인 도은 이숭인(1347~1392)의 문집 5권 가운데 권 1~2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금속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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