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평 벽계마을 이항로 생가 |
▶ 화서학파의 창시자 이항로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은 경춘고속도로가 개통하기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의 오지 가운데 하나였다. 양수리를 지나 문호리를 거쳐 산허리를 20여 리 돌고 돌면 수입천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20여 리를 거슬러가야 벽계마을이 나온다. 깊숙한 산곡의 기운이 감도는 이곳이 화서학파의 발원지이자, 위정척사운동과 중부지방 항일의병이 태동한 바로 그 마을이다.
정조가 즉위한 지 16년 되던 1792년에 양근군(현 양평군) 벽계리에서 이항로(李恒老, 1792∼1868)가 태어났다. 출생지인 벽계리가 청화산 서쪽에 있다고 하여 호를 화서(華西)라 했다. 화서의 윗대는 6대조까지 경기도 고양에 살다가 병자호란을 겪은 뒤, 5대조가 양평군 서종면 정배리로 이주했다. 증조부 때 명달리 소유곡으로 옮겼고, 둘째 큰조부가 노문리 벽계에 정착했다. 그가 후손 없이 세상을 뜨자 부친 이회장(李晦章)이 벽계로 들어왔다. 이항로는 7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생애 대부분을 벽계에서 보냈다.
화서는 일찍부터 과거시험의 부정을 개탄하여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특정 스승 없이 홀로 독서하고 궁리하며 주자학을 집중 탐구하여 독자적인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주리론(主理論)을 체계화하고, 존화양이(尊華攘夷) 위정척사(衛正斥邪) 논리를 체득했다. 아울러 기호학파의 학맥에 있으면서도 율곡 이이를 비롯한 기호학파 인물보다 우암 송시열을 주자(朱子) 이후의 정통으로 삼았다. 이는 화서학의 핵심인 위정척사의 의리론적 시대인식을 우암과 주자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화서의 주리론은 이(理)가 선이요 기(氣)는 악이며, 정직이 이이며 거짓은 기라는 것을 요체로 한다. 주리론에 입각한 엄격한 정사(正邪) 구분은 거짓을 배척하고 올바름을 지켜야 한다는 실천적 위정척사운동으로 발전했다. 조선이 지켜온 유교적 전통과 질서(理)를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氣)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선비의 도리이자 덕목이다. 이것이 화서가 강조한 의리론과 사생관이다.
화서의 명성은 나이 서른에 이미 경향 각지로 퍼져 그 문하에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820년대 무렵 학파의 틀을 갖추기 시작해 1840년대 이르면 전국적인 문파로 성장했다. 화서학파의 주요 근거지는 벽계를 중심으로 한 북한강과 남한강 일대에 가장 많지만, 주거지역 이동과 문인의 범위가 확산되면서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경기·강원·충청·평안도 등 광범한 지역으로 확산됐다. 포천의 김평묵, 포천에서 양평으로 이주한 최익현, 춘천의 유중교와 유인석, 양평의 양헌수, 평안북도 태천의 박문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화서로부터 공맹정주(孔孟程朱)의 도를 배우고 보국양이(保國攘夷) 위정척사를 주창하며 충효·도학·절의·문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자를 배출했다. 『벽계연원록(蘗溪淵源錄)』에 따르면 화서의 직전 제자가 459명, 김평묵·유중교·최익현·유인석 4명의 문인만 하더라도 모두 2,341명에 달한다.
화서학파는 한말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맞서며 위정척사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을 주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상해임시정부, 광복군을 이끌었다. 화서학파에서 독립유공 서훈 받은 이가 233명이고, 103명은 순국 순절했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이렇게 단언했다. “의병 정신은 반만년 역사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민족정신이요, 선생은 그것을 깨달아 전달한 선각자였다.”
기호계 주리론에 입각한 이항로의 학문은 실천을 전제로 한 강력한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을 생명으로 하는 존화양이론을 본령으로 한다. 이는 서세동점(西勢東漸)하는 한말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대응 논리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됐다. 위정척사운동은 1866년 제국주의 침략으로 야기된 병인양요 전후부터 시작된 국가와 민족문화 수호를 위한 장기지속적인 반제투쟁이다. 전국 유림이 주도했고, 그 선두에 화서학파가 있었다.
고종 즉위 초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조정은 국론 통일을 위한 사상적 지주가 필요했다. 1864년 이항로를 전라도도사,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 등에 잇따라 제수했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이번엔 동부승지에 임명했다. 이항로는 75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해 궐문 앞에서 동부승지 사직상소와 함께 정책건의서를 올렸다. “서양 도적과는 싸우는 것이 옳고 화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통스런 현실을 알려 백성들을 일깨우고, 언로를 열며, 현명한 이를 임용하고 간사한 이는 멀리하며, 토목공사를 정지하고 사치를 버려야 국가를 보전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매천 황현은 ‘백 년 이래 가장 바른 목소리’라고 했다.
1846년 13세로 나이로 화서 문하에 들어간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화서가 총애한 제자였다. 화서가 써준 면암(勉菴)이란 글씨는 평생 그의 호가 됐다. 1868년 최익현은 스승의 상소를 이어받아 무진소(戊辰疏)를 올렸다. 당장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당백전을 철폐하며, 사문세를 폐지하고 각종 수탈정책을 폐기하라는 것이었다. 면암 상소의 효시이자, 대원군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 상소로 최익현은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876년 일본과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왜양일체론에 입각해 ‘주전척화’, ‘개항 절대 불가’를 외치는 상소운동이 화서학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김평묵와 유중교는 화서 문인 47명이 연명한 「절화소(絶和疏)」를 올렸다. 최익현은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일명 ‘도끼상소’라 불리는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렸다. ‘통상은 곧 침략과 약탈로, 일본 물화의 유입으로 조선 경제는 파탄날 것이며, 사교인 천주교가 들어와 전통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람을 금수로 만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상소로 인해 면암은 척사위정세력의 중심인물이 됐다.
1895년에는 개화정부의 복제개정에 반대하여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리고, 개화정책 폐지,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 처단, 역적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 등을 요구했다. 단발령 시행 때는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며 ‘상투를 자르는 짓은 정신을 좀먹는 지름길이므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외쳤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암은 이를 일제의 침략이자 국권 침탈로 인식했다.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 처단을 주장했다.
최익현은 1906년에 이르러 그간의 상소운동을 청산하고 대일 투쟁 방식을 전환하여 무력항쟁에 나섰다.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을 전국 각지에 보내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별 궐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면암 자신도 호남유생 임병찬 등과 손잡고, 장성 유생 기우만의 협조를 얻어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항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순창에서 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체포되어 유배지 대마도에서 7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그의 운구행렬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목숨을 바쳐 자기 몫을 다한 지사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애국심과 의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최익현의 위정척사운동은 이후 독립운동과 민족주의로 전화하는 한편, 끝까지 항전하는 비타협적 투쟁정신으로 이어졌다.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은 14세 때 당숙 유중교를 따라 이항로 문하에 들어갔다. 증조부 유영오가 화서와 인연을 맺은 이래 춘천 가정리 고흥 유씨 일족은 화서의 문인이 됐다. 화서는 유인석을 첫눈에 보고 말하기를 “비록 체구는 작다 해도 차돌 같이 강한 의지와 대쪽 같은 성품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 언젠가는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할 인물”이라며 칭찬했다. 유중교는 김평묵과 함께 화서학파의 양대 산맥을 이룬 인물이다. 가평과 제천에서 강학활동을 하며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주도한 수많은 문인을 양성했다. 유인석은 유중교를 최후까지 수종하며 유중교 문하의 탄탄한 인적 기반으로 토대로 1895년 말 이래 20여 년간 장기지속적인 의병 항전 수행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은 당대의 위기상항을 타개할 유림들의 행동지침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했다. 내용은 첫째,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자는 거의소청(擧義掃淸), 둘째, 국외로 망명해 대의를 지키자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셋째, 의리를 간직한 채 목숨을 다하자는 자정치명(自靖致命)이다. 공론이 거의소청으로 모아지면서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명분이 됐다. 화서학파는 전 문파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국 의병항전을 선도했다. 그 중에서도 유중교가 자양서사를 열어 제자를 양성한 제천은 대표적인 항전지역이다. 유인석은 학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유중교의 문인이 총결집하여 제천의병을 이끌었다. 이항로가 문인 제자들에게 척사위정사상을 설파한 양근 지평에서는 김하락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 지역은 모두 일찍부터 반침략의식이 싹튼 곳이었다.
1896년 2월 제천에서 봉기한 유인석은 영월에서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을 결성하고 총대장에 추대됐다. 창의 명분은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고 단발하지 않은 채 신체를 보존한다는 ‘복수보형(復讐保形)’이었다. 아울러 전국에 격문(檄告八道列邑)을 발송해 의병봉기의 취지와 동참을 촉구했다. 유인석 의병진은 한때 3,000명을 넘으며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중부지역 일대를 석권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반일항전은 민중들의 반침략의식을 크게 고무시키며 1905년 이후 항일의병운동으로 계승됐다. 의병봉기에 가담한 유생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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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유인석은 1908년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이범윤 등과 항일세력을 규합했다. 그 결과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고 도총재에 추대됐다. 또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민족 독립에 대한 결의와 전 세계의 지지를 호소’하는 성명회 선언서를 작성해 해외 여러 국가에 보냈다. 1915년 의암은 독립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낯선 이국땅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유인석이 연해주에서 펼친 항일투쟁은 이후 대한광복군의 성립과 독립무장투쟁의 발판이 됐다.(차선혜 방송대 강사)
차선혜 한국방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