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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어보의 비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7. 9. 23:12

 

실록에선 ‘죄인’ 혹평, 불교에선 ‘보살’ 찬사···어느 해석이 맞을까

[배영대의 ‘걸으며 생각하며’] 문정왕후 어보의 비밀
미국 LA 카운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최근 귀환한 문정왕후 어보. 불교를 부활시키며 주자학 사대부들과 맞선 왕후의 삶이 녹아 있다. [중앙포토]

미국 LA 카운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최근 귀환한 문정왕후 어보. 불교를 부활시키며 주자학 사대부들과 맞선 왕후의 삶이 녹아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공항에서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어보를 맞이하며 박수 치고 있다. 김성룡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공항에서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어보를 맞이하며 박수 치고 있다. 김성룡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전용기 코드원을 타고 미국에서 귀환한 ‘문정왕후 어보’. 어보는 왕과 왕후를 상징하는 도장이다. 문 대통령이 어보를 향해 두 손 모아 인사하는 모습이 널리 보도됐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문정왕후(1501~1565) 당시로 돌아가 보면 어떨까. 주자학으로 무장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기절초풍하지 않았을까.
 

주자학 신료에 휘둘린 중종 보며
정국 주도, 왕권 강화 의지 다져
누구도 손 못 댔던 불교 진흥 추진
僧科 시행, 서산·사명대사 배출

왕실 안녕, 귀천 차별 없애자는
양주 회암사 무차대회 도중 타계
절은 폐사되고 보우대사도 피살

 

조선 11대 국왕 중종의 계비이자 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에 대한 주자학 사대부들의 평가는 혹독하다. 12세에 즉위한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일으킨 ‘을사사화’로 사림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을 내세우고 건국한 조선에서 승려 보우(普雨·1510~1565)를 중용해 불교를 중흥시키며 사상적으로도 맞섰다.
 
“암탉이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 윤씨 이르는 말”
6·25전쟁 때 도난당해 미국 LA 카운티 박물관에 있다가 이번에 돌아온 문정왕후 어보에는 ‘성렬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547년 명종이 “경복궁 근정전 섬돌 위에 나가 ‘성렬인명대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리고 덕을 칭송하는 옥책문과 악장을 올렸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이때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왕대비로서 직접 정치의 전면에서 활약할 때  만들어진 만큼 문정왕후의 전성기이자 사림들과 팽팽한 대결을 벌이던 시절의 도장인 셈이다.
 
경기도 양주 회암사 전경. [사진 회암사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양주 회암사 전경. [사진 회암사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명종시대에 ‘사실상 여왕’ 역할을 했던 문정왕후와 경기도 양주에 있는 사찰 회암사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회암사의 ‘무차(無遮)대회’ 도중에 문정왕후는 타계했고, 이 때문에 사림들의 혹독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주자학 vs 불교, 조선의 정치를 움직인 밑바탕에는 그 대립 구도가 녹아 있다. 요즘은 주자학과 불교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지만 조선시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려 말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세워진 조선, 주자학을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워 성립한 새 왕조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쟁이 그 구도 속에 전개됐고 문정왕후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의 부도인 홍융탑과 쌍사자 석등.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었다. 회암사가 조선 전기 최대의 국찰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 회암사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의 부도인 홍융탑과 쌍사자 석등.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었다. 회암사가 조선 전기 최대의 국찰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 회암사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폭염주의보가 내린 지난 5일 회암사를 찾았다. 어보의 비밀을 간직한 역사의 흔적이 어딘가 남아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인적이 없는 숲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언뜻 봐서는 이곳이 조선 전기 최대의 국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 지금의 회암사는 문정왕후 당시의 회암사가 아니다. 원래의 자리에서 좀 더 올라간 위치에 조선 후기 새로 지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여전히 모셔져 있는 세 화상 부도, 즉 고려 말과 조선 초를 대표하는 승려인 지공선사, 나옹화상, 무학대사의 부도가 옛 영화를 증언하고 있었다. 문정왕후 때의 회암사 모습은 1997년부터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옛터로만 전해질 뿐이었다. 그곳에서 나온 불교 유물들을 절터 옆에 건립한 회암사지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이 직접 정치를 주도하며 정국을 이끌어 나갔고 그 중심에 불교 진흥이 놓여 있었다. 신료들에게 휘둘리는 남편 중종과 아들 명종을 보면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강력한 신권(臣權)에 맞서 왕권(王權)과 왕실의 위신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태조에 이어 태종·세종·세조 등 그 어떤 힘 있는 임금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불교 진흥에 손을 댔다. 폐지됐던 승려 과거제와 도첩제를 다시 시행했다. 부활시킨 승과의 1회 급제자가 서산대사이고 4회 급제자가 사명당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회암사에 가서 살았고, 세종이나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을 한글로 대량 펴내며 불교에 관심을 보였지만 문정왕후처럼 제도화하지는 못했다. 1565년 음력 4월 초 회암사 무차대회는 그 절정이었다. 그 절정에서 불교의 상승세는 꺾이고 다시 문정왕후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문정왕후 윤씨가 타계한 1565년 음력 4월 6일자 『명종실록』의 기사는 이렇다.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고 하였으니, 윤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마치 부관참시라도 하는 듯한 냉혹한 평가를 내린 『명종실록』은 회암사 무차대회를 문정왕후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 문정왕후가 64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몸소 무차대회에 참가해 매일 목욕하고, 고기를 멀리하며 소식하고, 계를 지키며 기도하다 병이 났다는 것이다. 문정왕후의 타계로 인해 4월 초파일까지 예정됐던 무차대회는 중단됐고 회암사는 폐사됐으며 행사를 주관한 보우대사는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피살됐다.  
 
조선왕조실록은 주자학의 시선으로 기록된 역사서다. 『태조실록』에 실린 첫 상소문에서 정도전은 “불교를 도태시키라”고 했다. 정도전이 말하는 숭유억불의 유교는 2500년 전 공자의 유교가 아니라 남송시대 주희(1130~1200)가 새로 해석해 낸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은 ‘이단(異端)’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주자학의 새로움이란 바로 이단의 척결에 있었다. 공격해야 할 이단은 불교와 도교였고 가혹하게 탄압했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고 그를 비판하며 성립한 조선은 주자학을 전면에 내세웠다. 불교를 비판하는 데서 정당성을 찾는 주자학이 조선 건국에 맞춤으로 동원된 셈이다. 종교와 학문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새 왕조의 이데올로기로 채택될 때의 주자학은 나름대로 정당성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녀자의 사찰 출입을 법으로까지 금지시켜 놓았어도 이 땅에서 1000년 넘게 유지돼 온 불교 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모든 죄를 뒤집어쓴 무차대회는 고려에서부터 이어져온 불교의식이다. 사찰과 종파가 모두 통폐합되고 팔관회를 비롯한 불교행사들이 모두 폐지된 가운데 문정왕후 때 이르러 대규모 무차대회가 다시 기획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보우대사를 내세워 불교 정책을 부활시켰다. 회암사 무차대회의 명분은 명종의 무병장수와 세자의 출산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명종의 대를 이을 세자가 없다는 것은 문정왕후를 비롯한 왕실의 최대 근심거리였다. 근심이 큰 만큼 불교에 더 기대게 됐다.
 
왕후 타계 27년 후 승려들 임진왜란 극복 주역
문정왕후가 1565년 회암사 무차대회 때 공양한 ‘약사삼존도’. 무려 400점을 공양했으나 지금은 6점이 전해지고 있다. 국내에는 이 한 점뿐이고 5점은 해외에 있다. [사진 회암사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문정왕후가 1565년 회암사 무차대회 때 공양한 ‘약사삼존도’. 무려 400점을 공양했으나 지금은 6점이 전해지고 있다. 국내에는 이 한 점뿐이고 5점은 해외에 있다. [사진 회암사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무차대회에 담긴 본래의 의미도 되새겨봐야 할 듯하다. 승속(僧俗), 남녀, 노소, 귀천(貴賤)의 차별을 두지 않고 평등하게 부처님의 공덕이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행사가 무차대회였다. 대규모로 잔치를 베풀고 물품도 골고루 나누어주며 법회를 열었다. 주자학은 사대부의 이데올로기로서 엘리티즘의 성격이 강했다. 그들에게 신분의 구분을 두지 않는 불교의 무차대회가 어떻게 보였을까. 불교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문정왕후의 죽음 직후 회암사는 폐사가 되고 문정왕후 때 부활된 불교 진흥정책도 모두 폐기된다. 하지만 문정왕후 때 육성된 승려들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주역이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문정왕후와 보우대사의 타계 이후 27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서산대사는 보우대사가 맡았던 선종의 본찰 봉은사의 주지와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이어받았고 사명당과 함께 승병을 조직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산대사 작품으로 알려진 다음의 시는 그의 이력과 함께 지금도 많이 회자된다.
 
踏雪野中去  눈 내린 들판을 갈 때
不須胡亂行  어지러이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걷는 발자국
遂作後人程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직후 많은 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을 방문할 때 인용했던 시로도 알려져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없는 길’을 걸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불교의 첫째 계율은 예나 지금이나 불살생(不殺生) 아닌가. 서산대사는 조선 불교가 회생하는 전기를 마련했지만 한국 불교가 풀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숙제를 남겨 놓았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회암사 주지를 맡고 있는 혜성스님이 기자에게 차 한잔을 데워 따라주며 말했다. “지난 과거 따져 뭐해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
 
뉴욕 도서관 문서 찾은 게 반환의 계기
이번 문정왕후 어보 반환에는 불교계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지난 10년간 계속됐다는 점이 특기돼야 하겠다. 문정왕후 시절 교종의 본사로 지정됐었고, 지금은 한국 최고의 학승으로 꼽히는 월운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봉선사와 회암사가 주축이 됐다고 한다. 봉선사의 승려였으며 회암사에서도 2년간 머물러 있었던 혜문이 반환운동을 이끌었다. LA 카운티 박물관과 교섭, 2013년 9월 박물관 측으로부터 반환 약속을 받아냈다. 반환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2009년 뉴욕공공도서관에서 ‘미 국무부 문서’를 찾아낸 것이 어보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6·25전쟁 당시 미군 병사에 의해 조선왕실의 어보가 47개나 약탈당했다는 분실신고 기록이었다.
 
시민운동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이기도 한 혜문은 “문정왕후 어보의 반환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를 회암사지박물관에서 일정 기간 할 수 있기를 제안한다”며 “500년 전 회암사 무차대회에서 못 이룬 그들의 꿈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DA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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