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포저 조익 묘의 비밀과 朱子 절대주의자 송시열
조익 묘에서 사라졌던 신도비
충남 예산군 신양면에 포저 조익 묘가 있다. 인조 원년인 1623년 조익은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있게 하기 위해 10분의 1의 세금을 곡물(穀物)로 거둬야 한다"고 상소했다.('포저집', 포저연보 1623년 3월) 그때 조익은 선혜청 도청이었다. 선혜청은 대동법 시행 관청이다. 갖은 명목으로 물건을 떼 가던 옛 세법을 고쳐서 토지 면적에 따라 쌀로 세금을 거두려는 기관이다. 1655년 그가 죽었다. 송준길을 위시한 쟁쟁한 학자와 관료가 제문을 쓰고 묘비 글을 쓰고(남구만) 무덤에 부장하는 묘지명을 쓰고(윤선거) 신도비문을 썼다(송시열). 모두 서인(西人) 당 소속 동지들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조익 문중은 송시열이 쓴 글을 272년 동안 묵혀뒀다가 1927년에야 신도비를 세웠다. 조익 묘지명을 쓴 윤선거의 형 윤문거의 신도비 또한 송시열이 썼는데, 윤씨 문중은 이 또한 사후 240년 뒤인 1912년에야 세웠다. 역시 송시열이 쓴 윤선거 본인의 신도비는 아예 세운 적이 없다. 윤선거가 좋아했던 윤휴라는 사내는 예순셋에 처형됐다. 송시열 자신은 나이 여든셋에 길거리에서 사약을 받았다. 한때 뜻을 같이했던 동지들이 모두 송시열에게 등을 돌렸다. 당대 최고 권력자요 문장가 송시열이 쓴 글을 동지들이 근 300년 묵혀놓았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송시열의 시작과 끝, 朱子
송시열에게 주자(朱子)는 시작이었다. 주자는 금(金)에 멸망 중이던 송(宋)을 살리는 인물이었고 그 자신은 청(淸)에 핍박받는 조선을 살릴 학자였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송시열은 조선을 명(明)의 계승자라 자처했다. 그는 소중화 조선의 주자였다.
충남 예산군 신양면에 포저 조익 묘가 있다. 인조 원년인 1623년 조익은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있게 하기 위해 10분의 1의 세금을 곡물(穀物)로 거둬야 한다"고 상소했다.('포저집', 포저연보 1623년 3월) 그때 조익은 선혜청 도청이었다. 선혜청은 대동법 시행 관청이다. 갖은 명목으로 물건을 떼 가던 옛 세법을 고쳐서 토지 면적에 따라 쌀로 세금을 거두려는 기관이다. 1655년 그가 죽었다. 송준길을 위시한 쟁쟁한 학자와 관료가 제문을 쓰고 묘비 글을 쓰고(남구만) 무덤에 부장하는 묘지명을 쓰고(윤선거) 신도비문을 썼다(송시열). 모두 서인(西人) 당 소속 동지들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조익 문중은 송시열이 쓴 글을 272년 동안 묵혀뒀다가 1927년에야 신도비를 세웠다. 조익 묘지명을 쓴 윤선거의 형 윤문거의 신도비 또한 송시열이 썼는데, 윤씨 문중은 이 또한 사후 240년 뒤인 1912년에야 세웠다. 역시 송시열이 쓴 윤선거 본인의 신도비는 아예 세운 적이 없다. 윤선거가 좋아했던 윤휴라는 사내는 예순셋에 처형됐다. 송시열 자신은 나이 여든셋에 길거리에서 사약을 받았다. 한때 뜻을 같이했던 동지들이 모두 송시열에게 등을 돌렸다. 당대 최고 권력자요 문장가 송시열이 쓴 글을 동지들이 근 300년 묵혀놓았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송시열의 시작과 끝, 朱子
송시열에게 주자(朱子)는 시작이었다. 주자는 금(金)에 멸망 중이던 송(宋)을 살리는 인물이었고 그 자신은 청(淸)에 핍박받는 조선을 살릴 학자였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송시열은 조선을 명(明)의 계승자라 자처했다. 그는 소중화 조선의 주자였다.
1637년 병자호란 직후 송시열은 외가 부근인 충북 영동 월류봉 아래로 낙향했다. 한천정사(寒泉精舍)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숙종 초 정쟁에서 권력을 잃고 낙향한 곳은 충북 괴산 화양동계곡이었다. 1680년 잠시 중앙에 복귀했다가 다시 낙향한 회덕, 지금 대전 땅에 송시열은 서재를 지었다. 이름은 '남간정사(南澗精舍)'라 했다.
이 모두, 주자(朱子)였다.
주자가 만든 첫 강학소이자 서원이 한천정사다. 화양동계곡 원래 이름은 '황양'이다. 송시열은 중국의 華(화) 자를 넣어 화양(華陽)으로 개칭하고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9곡을 명명했다. 회덕에 만든 서재 이름 '남간(南澗)'은 주자의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 중 두 번째 시 제목이다. 평생 그는 이렇게 거듭 선언했다. '주자의 학문은 요순, 공맹을 계승해 일언일구(一言一句)도 지극한 중정(中正)이 아님이 없습니다(一言一句無非大中至正).'('송자대전', 進朱子封事奏箚箚疑箚·진주자봉사주차차의차(1683년))
송시열에게 주자는 끝이었다. 1689년 6월 8일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을 때 남긴 유언은 이렇다. '"주자가 임종할 때 문인을 불러 곧을 직(直) 자 하나를 말씀하셨으니 내 말도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朱子臨終詔門人一直字吾言亦不外).'(권상하, '宋尤庵受命遺墟碑·송우암 수명유허비')
사상의 자유? 주자만 건드리지 않으면 자유였다. 주자를 공격하는 모든 자는 악(惡)이었다. 송시열은 그 악한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불렀다. 우아한 유학의 글('斯文')을 어지럽히는 도적('亂賊')이라는 뜻이다. 백호 윤휴(尹鑴·1617~1680)가 그런 도적이었다.
사문난적 윤휴
훗날 남인으로 돌아섰지만, 윤휴는 송시열이 이끄는 서인 세력과 친했다. 어릴 적 윤휴를 찾은 송시열이 이리 칭찬했다. "우리들이 30년 동안 독서한 것이 모두가 헛된 것이 되었다(吾輩三十年讀書 盡歸於虛地云)."('백호전서' 윤휴 행장上) 윤휴는 열 살 위인 송시열과 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훗날 윤휴는 벗이 용납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주자가 쓴 중용 해설서가 틀렸다며 자기 식으로 해설서를 쓴 것이다. 1652년 일이다.
'윤휴가 중용주를 고치자 송시열이 가서 엄히 책망하니, 윤휴가 "경전의 오묘한 뜻을 주자만이 알고 어찌 우리들은 모른단 말이냐(經傳奧義 豈朱子獨知 而吾輩不知耶)"라고 말하므로 송시열은 노하여 돌아왔다.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끝내 승복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그를 끊어버렸다.'('송자대전', 연보 1684년 5월 5일) 송시열이 윤휴를 조정에 천거하지 않자 '뭇 비평이 급하게 밀리는 파도 같았다.'('송자대전', 연보 1658년)
1653년 송시열은 충청도 논산에 있는 황산서원에 동지들을 모았다. 안건은 '사문난적 윤휴'였다. 송시열이 말했다. "주자 이후 한 이치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한 글도 밝혀지지 않음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주자를 배척한단 말인가.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다." 그때 동지였던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하고 넘어가려 하자 송시열이 이렇게 말했다. "왕자(王者)가 나타나게 된다면 공이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법을 받게 될 것이다(有王者作 公當先鑴而伏法矣)."('송자대전', 1653년 연보) 경고였다.
12년이 지난 1665년 가을 송시열은 동학사에서 또 윤선거를 몰아붙였다. 윤선거는 "굳이 흑백을 따지자면 윤휴는 흑(黑)"이라 답했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절교를 요구했다. 윤선거는 "인연을 끊겠다"고 답했다. 이제 문제는 윤선거였다.
송시열, 벗을 버리다
송시열과 윤선거는 김장생의 동문 제자였다. 함께 공부를 했고 함께 관료 생활도 했다. 포저 조익이 죽었을 때 윤선거는 조익 묘에 부장하는 묘지명(墓誌銘)을 썼고 송시열은 묘갈문(墓碣文)을 썼다. 그 윤선거가 죽었다. 1669년 8월이다. 송시열은 벗을 보내는 제문을 지었다. '천지가 어두울 때 별 하나가 밝았네(兩儀昏蒙 一星孤明).' 그런데 윤선거 상가에 사문난적 윤휴가 조문을 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윤휴가 자신을 비난하는 제문을 썼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듬해 송시열은 제문을 다시 써서 보냈다. '다시 의논할 길 없으니 슬픔이 마음에 있어서 심히 내 병이 되도다.'
1674년 윤선거의 아들 명재 윤증이 송시열에게 가서 자기 선친 묘갈문을 부탁했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다. 윤증은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 송시열에게 주려고 써둔 편지를 내밀었다. 충고였다. '임금에게 사의(私意)가 없기를 바란다면 자기 사의부터 없애야 하고, 임금이 언로(言路)를 열어 놓기를 바란다면 자기 언로부터 열어야 할 것이다. 좋으면 무릎에 올려 놓고 미우면 못에 밀어 넣는(加膝墜淵) 편협한 생각은 버리고 (남인들과) 소통하시라."('명재연보' 후록1, 나양좌 등 상소 1687년) 송시열은 "그가 윤휴와 절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크게 노했다.
송시열이 글을 썼다.'진실한 현석이 극도로 잘 선양했기에 나는 받아 적을 뿐 따로 짓지 않았네(我述不作).' 자기는 칭찬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은근히 조롱하고 암암리에 풍자하는 내용이 많았다.('명재유고' 1권 연보1 1674년) 이에 윤증이 여러 차례 수정을 해달라고 청했으나 일부 자구(字句) 외에는 고치지 않았다. 심지어 1689년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 중 이런 시(詩)까지 썼다. '듣건대 여니가 참 도학이라니 정자와 주자는 멍청이가 되겠군(聞說驪尼眞道學 却看閩洛是倥侗)'('송자대전' 4권, 무제(無題)) 여니(驪尼)는 윤휴와 윤선거를 뜻한다. 제자 윤증은 이로써 스승과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 이후 윤증은 반(反)송시열 세력을 이끌게 됐다.
노론과 소론 갈라지다
1680년 남인 윤휴가 반역 혐의로 처형됐다. 잠시 실각했던 서인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그때 송시열도 화려하게 복귀했다.('경신환국(庚申換局)')
재집권한 서인 세력은 대대적인 남인 숙청 작업을 시작했다. 주동자는 김익훈이다. 1682년 김익훈은 남인 허새, 허영에게 반역 계략을 덮어씌운 뒤 이를 핑계로 남인 몰살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됐다. 이에 서인 소장파들이 부도덕한 김익훈을 탄핵하라고 요구했다.
탄핵 요구를 주도한 사람이 포저 조익의 손자 조지겸이었고, 처벌을 반대한 사람이 송시열이었다. "우리 사문(師門)의 자제(子弟)"라는 게 이유였다.('송자대전' 부록15 어록2) 명분주의자 송시열이 보인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소장파들이 대거 이탈해 만든 당이 바로 소론(少論)이고
벗들은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렸다. 포저 조익 묘에 신도비가 무려 272년 뒤에 서게 된 경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