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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자주색·진홍색 얻으려는 노력이 화학 발달로 이어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4. 16. 16:09

자주색·진홍색 얻으려는 노력이 화학 발달로 이어져

 

항구가 보이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몸집 좋은 사내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다.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고둥과 조개가 널려 있다. 사내의 애견은 앞발을 큼지막한 고둥에 얹고 장난을 치고 있다. 그런데 개의 주둥이가 선홍색으로 물들어 있
다. 그림 속의 사내는 누구일까? 그리고 개의 주둥이는 왜 선홍색을 띠고 있는 것일까?

뿔고둥·코치닐 등 천연 염색재료
고대·중세에서 주요 교역품 역할

근대 실험실서 태어난 인공염료
바이엘·아그파 등 대기업 모태돼

 
그림 1 테오도르 반 툴덴, ‘자주색의 발견’, 17세기.

그림 1 테오도르 반 툴덴, ‘자주색의 발견’, 17세기.

 

그림 1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테오도르 반 툴덴의 작품이다. 그는 동시대 화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교유했고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실제로 루벤스는 위의 그림과 구도가 거의 똑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위 그림은 티레라는 항구도시가 배경이다. 지중해 동안에 면한 고대도시다. 해상무역에 뛰어나 그리스와 지중해를 놓고 세력을 겨뤘던 페니키아의 핵심도시 중 하나였다.
 
등장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다. 그가 애견을 끌고 바닷가를 산책한다. 그가 님프에게 구애를 하느라 한눈을 파는 사이에 개가 뿔고둥 하나를 입에 물고 장난을 친다.  
 
그런데 개의 주둥이가 점점 붉은색으로 변한다. 피를 흘리는 것일까? 아니다. 뿔고둥에서 스며나오는 액체가 개의 주둥이를 물들인 것이다. 뿔고둥의 아가미선에서 맑은 액체가 분비되는데, 이것이 공기 중에 노출되고 햇빛을 받으면 색깔이 서서히 붉게 바뀌어 선홍색이 되고 마침내 자주색으로 변한다. 님프는 헤라클레스에게 이 색깔로 옷을 지어 자신에게 선물해 달라고 청한다.
 
이 매력적인 자주색을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이라고 부른다. 뿔고둥이 티레에서 많이 자생해서 생긴 이름이다. 최상의 염료를 얻으려면 시리우스라는 별이 밤하늘에 뜨는 겨울철에 뿔고둥을 채취해야 한다고 전해진다. 시리우스는 큰개자리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어서 ‘개의 별’이라고 불린다. 그림1에서 헤라클레스와 더불어 개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그림1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과 애견을 등장시킨 자주색 염료의 탄생설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1g의 염료 얻으려면 뿔고둥 9000마리 필요
아름답고 선명한 색깔로 치장하려는 욕망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구석기인들이 살던 동굴에서 발견되는 채색된 그림이 이를 말해준다. 사람들은 점차 색깔을 사물에 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색깔 있는 염료로 물을 들이는 방법을 자연에서 찾아냈다. 식물이나 광물이 대부분이었지만 동물 중에서도 독특한 색소를 함유한 것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뿔고둥에서 뽑아내는 티리언 퍼플 염료는 유럽인들이 오랜 기간 무척이나 진귀하게 여긴 명품이었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미 3600년 전에 그리스의 크레타에서 이 염료가 사용됐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의 한 역사서에는 소아시아에서 이 염료가 같은 무게의 은과 교환될 정도로 고가였다고 기록돼 있다. 1g의 염료를 얻기 위해서는 9000마리의 뿔고둥이 필요했다니 그렇게 값이 비쌀 만하다.
 
로마제국에서도 뿔고둥에서 추출한 염료는 만인이 선망하는 사치재로 여겨졌고, 그 덕분에 티레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국가는 염료제조법을 비밀로 엄격하게 관리했으며 개인적으로 이 염료를 제조하는 자는 붙잡아 엄벌에 처했다. 뒤를 이은 비잔틴제국도 티리언 퍼플의 생산을 직접 통제했고, 황제와 극소수 측근만 이 염료로 물들인 의복을 입을 수 있도록 제한했다.  
 
이런 연유로 티리언 퍼플은 로열 퍼플, 혹은 임페리얼 퍼플이라는 고급스런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13세기 초 십자군 부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비잔틴제국은 티리언 퍼플의 제조기반을 상실했다.
 
특이한 동물자원이 사람들이 선망하는 염료를 추출하는 데 사용된 사례는 티리언 퍼플만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에서 뿔고둥의 위치를 이어받은 것은 케르메스(kermes)라는 곤충이었다. 케르메스는 상록참나무의 진액을 빨아먹고 사는 작은 곤충으로 지중해 연안에 분포한다. 케르메스의 알을 말려 낟알처럼 되면 이를 빻아서 붉은 색소를 뽑아내는데, 이것으로 염색한 옷감은 고운 진홍색을 띠게 된다.  
 
중세 초기에는 주로 비단 염색에 사용했지만 중세 후기에 모직물 생산이 증가하자 고급 모직제품을 만드는 데에도 썼다. 유럽인들 눈에 이보다 고운 빨간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아직 더욱 생생한 색깔을 내는 염료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에는 케르메스를 능가하는 놀라운 천연 염색원이 존재했다. 바로 코치닐(cochineal)이었다.  
 
그림 2 호세 안토니오 드 알자테 이 라미레즈, ‘사슴꼬리로 코치닐을 수확하는 인디오’, 1777년.

그림 2 호세 안토니오 드 알자테 이 라미레즈, ‘사슴꼬리로 코치닐을 수확하는 인디오’, 1777년.

 

그림 2를 보자. 멕시코 신부인 호세 안토니오의 작품에 한 인디오 농부가 사슴 꼬리를 손에 들고 선인장 표면을 털어내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사내가 긁어모으고 있는 것이 바로 코치닐이다.  
 
코치닐은 선인장에 기생하는 작은 연지벌레인데, 이를 수확해 빻으면 눈이 부실 만큼 선명한 빨간색 염료를 얻게 된다. 코치닐로 염색한 색깔만큼 생생한 색깔을 내려면 케르메스를 기존보다 열 배 더 넣어야 할 정도다. 이런 놀라운 효과 때문에 코치닐은 오늘날에도 립스틱 같은 화장품의 재료로 사용되며 각종 청량음료에 착색료로 첨가되기도 한다.
 
그림 3 호세 안토니오 드 알자테 이 라미레즈, ‘현미경으로 크게 확대한 코치닐’, 1777년.

그림 3 호세 안토니오 드 알자테 이 라미레즈, ‘현미경으로 크게 확대한 코치닐’, 1777년.

 

선인장 벌레는 요즘도 붉은 화장품 재료로

 

호세 안토니오는 생물학에 관심이 깊었기 때문에 코치닐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 그림도 남겼다. 바로 그림 3이다. 동그란 모양의 곤충이 암컷 코치닐이고, 긴 모양에 날개를 단 곤충이 수컷 코치닐이다. 화가는 암수 코치닐을 각각 배와 등 쪽에서 관찰하고 자세히 묘사했다.
 
아메리카인들은 일찍이 마야제국과 아스텍제국 시대부터 코치닐로 염색을 했다. 당시에 코치닐 염료나 코치닐로 염색한 직물은 지배 부족이 피지배 집단에게 요구하는 단골 공물이었다. 인디오들에게도 빨간 염료가 진귀한 물품이었다는 뜻이다.  
 
16세기 초 스페인 정복자들이 멕시코를 정복한 이래 코치닐은 파란만장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정복자들은 코치닐 염료를 스페인으로 수출해 큰 이득을 얻었다. 새 염료는 곧 주변국 소비자들의 눈길도 사로잡았다. 유럽 전역에서 멕시코산 코치닐 염료의 수요가 치솟았고 아시아로도 인기가 확산됐다. 글로벌 히트상품이 된 것이다.  
 
1779년에는 한 프랑스인이 코치닐 벌레를 몰래 빼내 프랑스 식민지인 생도맹그에 이식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독점적 지위는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다. 1810년대 멕시코 독립전쟁의 와중에 코치닐 벌레가 스페인인들에 의해 유출돼 중앙아메리카와 카나리제도 등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코치닐 가격은 곧 하락하기 시작했다.
 
더욱 결정적인 타격은 농장이 아니라 실험실로부터 왔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화학이 발달하면서 인공염료가 개발됐다. 1856년 영국의 윌리엄 퍼킨이 보라색 유기염료인 ‘모브’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애초에 말라리아 치료제로 쓰이는 퀴닌을 인공합성하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염료를 만들어낸 것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물론 프랑스 유제니 왕후도 모브로 염색한 직물을 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험실에서 합성된 염료가 뜨거운 호응을 얻자 인공염료의 개발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영국 외에 다른 국가들도 발 빠르게 경쟁대열에 합류했다. 특히 독일의 추격이 눈부셨다. 획스트·아그파·바이엘 등이 기업을 설립하고 인공염료의 개발을 주도했다. 이들은 모두 거대 화학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DA 300


독일의 성공은 과학자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업화에 뒤쳐졌던 독일은 국가적 역량을 모아 신산업인 화학공업에서 앞서 나갈 방법을 모색했다. 해외에 거주하는 과학자들을 국내로 유치했고, 동일한 물질도 공정이 다르면 독립된 특허권을 부여하도록 특허법을 개정했으며, 대학에서 과학연구에 더 많은 힘을 쏟도록 장려했다. 전통적 제도와 교육을 고수한 영국을 추월할 기회를 현명하게 포착한 것이다. 


화려한 염색을 향한 인류의 꿈은 이렇듯 자연과 과학, 우연적 발견과 의도적 노력을 거치면서 전개되어 왔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bks21@skku.edu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비주얼 경제사』, 『세계경제사 들어서기』, 『경제사: 세계화와세계경제의 역사』 등 다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