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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사색당쟁과 사당대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4. 2. 18:26

 

사색당쟁과 사당대선

사색(四色)은 원래 네 가지 색깔이란 뜻이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네 개의 붕당(朋黨)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처음에는 사방 방위에 따라 동인·서인·남인·북인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 뒤에는 노론·소론·남인·북인의 4대 당파를 의미하게 되었다. 선조 8년(1575)에 시작되어 조선조의 남은 기간을 관통한 이 집단 쟁투는 흔히 조선을 망친 폐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도를 넘는 쟁론을 두고 당파 싸움의 유전적 형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미상불 표면적으로 유학의 정론주의를 앞세우고 실상에 있어서는 집단의 이익을 추구한 이 이전투구는 후세의 사필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하다.

조선 사색당쟁 역사의 뼈아픈 교훈
대선정국 유용한 타산지석 삼아야
상대를 나라 위한 동반자로 여기고
페어플레이 원칙 고수해야 마땅
新탕평책으로 나라 일으켜 세워야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러 간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서로 다른 보고를 하는 바람에 대비의 기회조차 붙들지 못했다는 것이 파당의 폐해로 예거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인의 분열주의 의식과 역사적 고비마다 등장하는 국론분열 사태는 조선시대 당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 이것은 어쩌면 과거에 있었던 민족적 환부에서 오늘의 부정적 현실을 도출하는 이른바 ‘자학적 역사관’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의 방식은 그것대로 명료한 시각을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르나 거기서 오늘의 질곡을 넘어 내일의 지평을 열어가는 동력을 생산하지는 못한다.

이 역사성의 미묘한 논리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자들은 끊임없이 조선의 역사를 비하하고 당쟁을 원흉으로 몰았다. 조선을 이씨 성 가진 한 가문의 나라라고 치부하기 위하여 이씨조선 곧 이조(李朝)라는 말을 썼고, ‘이조실록’이나 ‘이조백자’와 같은 말이 공공의 언어가 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무리만 지면 싸우기 때문에 사색당쟁이 생겼고 국론을 통일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내세웠다. 이것이 바로 ‘식민사관’인데 일본인 학자와 교육자가 조선인 제자에게 가르치고 그것이 다시 그대로 우리 교육 현장에 도입되는 악순환을 반복해 온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파 간의 싸움이 없는 나라는 없다. 일본 그 스스로도 ‘사무라이’ 시대를 거쳐 오랜 파당의 혈전을 겪었으며 근대 민주주의의 시발을 보인 유럽이나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도 이 싸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굳이 조선의 당쟁을 망국의 원인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는 형국이다. 
 
정쟁이 없이 정치가 평온하기만 하다면 이는 봉건시대의 전제 군주국가이거나 북한과 같이 강고한 일당 독재 체제라는 말이 된다. 정쟁 그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공동체의 내일을 위한 인식과 상대방을 동반자로 수긍하는 금도(襟度)가 망실되었을 때가 문제다. 이 보편적 규범을 지키면 서로 다른 정파 간의 경쟁과 견제는 오히려 긍정적 효력을 산출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엉겁결에 급박한 사당(四黨)대선의 정치 일정에 돌입했다. 한국 정치권은 사색당쟁의 성립 및 분화 과정과 매우 유사하게 서로 간의 이합집산을 거쳐 사당으로 재편되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는 옛말에 그름이 없다면,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옛말도 새겨들어야 옳다. 사색당쟁에서 얻은 뼈아픈 역사의 가르침을 대선 정국에 유용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이유다. 대선 주자에서부터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에 이르기까지, 이 역사반영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지금의 사당이 과거 사색의 전철을 밟지 않고 그것을 반면교사로 하여 발전적인 역사의 단계를 열어가자면 반드시 건너뛰지 말고 명념(銘念)해야 할 기준들이 있다.

우선은 경쟁 상대를 적이 아니라 나라 발전을 추구하는 동반자로 생각해야 한다. 이 인식이 분명하면 무분별한 모욕적 언사나 인신공격이 사라진다. 한 사회의 지도자는 모름지기 그러해야 자격이 있다. 동양의 군자도(君子道)나 서양의 신사도(紳士道)가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동안에 있었던 안희정 후보의 ‘선의’ 발언과 그에 대한 집중적 비판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 정도 배려의 언어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좁은 국량(局量)에는 대인의 풍모가 없다. 상대를 배려하면 상대도 배려를 보이는 법인데, 이 산술 차원의 방정식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국민은 모두 이를 보고 있다. 배려와 관용의 정신이 없는 지도자는 얼음칼과 같아서, 나중에 녹아 없어질 흉기로 ‘사람’을 상하게 한다. 항차 그 사람은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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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페어플레이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조선의 당쟁에는 그래도 그 바탕에 성리학의 정명주의(正名主義)가 남아 있었다. 장담컨대 비록 이 선거에서 진다 할지라도 길이 아닌 곳으로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후보가 역사의 기록에 남는다. 이처럼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가 살아 있어야 눈앞의 싸움을 건전한 경쟁의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고 그런 후보만이 설득력 있게 미래를 주창할 수 있다. 지나간 시대의 잘못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더 값있고 큰 그림으로 그것을 덮어야 한다.  
 
사색당쟁의 탕평책은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사당대선의 ‘신(新) 탕평책’이 마침내 난국에 당착한 이 나라의 내일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김종회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