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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무릅쓰고 '감옥의 역적'을 찾아 문안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 16. 00:10
 

 위험 무릅쓰고 '감옥의 역적'을 찾아 문안하다

  • 송우혜 소설가

 

입력 : 2017.01.11 03:05

[이순신 리더십] [2]

정여립 역모로 피바람 불 때 우의정 정언신도 체포되자 충무공, 과감히 찾아가 면회
목숨 건 용기의 이면엔 "戰功 큰 나 어쩌지 못할 것" 정확한 상황 판단 있어

송우혜 소설가
송우혜 소설가
이순신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강한 기개와 깊은 의리를 지니고 옳은 일이라 생각하면 개인적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담대한 무장이었다. '정읍현감 좌천 사건'은 그런 그의 인품을 시원하게 드러낸다.

이순신이 전라도 조방장(3품직)에서 정읍 현감(종6품)으로 전격 좌천된 '선조 22년 기축년'은 조선왕조사에서 매우 유명하다.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조선 천지가 처참한 피바람에 휩싸였던 해였기 때문이다.

선조 22년 10월 2일에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있은 뒤, 조선왕조 사상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신문과 처형이 잇달아 벌어졌다. 희생자 중에는 단지 '눈물'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있었다. 좌랑 김빙은 추우면 눈물이 줄줄 나는 눈병을 앓고 있었다. 조정 관리들이 둘러서서 지켜보게 하고 자살한 정여립의 시체를 찢을 때 추운 날씨여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이 정여립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오인받아 체포돼 역모 관련 여부로 고문받다가 매 아래 죽었다.

정여립의 친척이었던 우의정 정언신도 역모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런 상황에서 전라감영에서 전라도 조방장으로 복무하던 이순신이 11월에 차사원(중요한 사무로 임시 파견되는 관원)의 임무를 띠고 상경하게 되었다. 서울에 들어온 이순신은 정언신을 문안하러 감옥으로 찾아갔다.

정언신은 이순신과 인연이 깊었다. 정언신은 문신이지만 무략(武略)과 인품도 크게 갖춘 인재라 6년 전 함경북도 육진에서 여진족 니탕개(尼湯介)의 난이 발발했을 때 도순찰사로 임명되어 현지에 가서 진압전을 총지휘했다. 그때 이순신도 육진에 출전했는데, 정언신은 이순신이 매우 뛰어난 무장임을 알아보고 크게 아껴주었다. 정언신은 육진에서 조정으로 돌아온 뒤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서 선조 20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선조 22년 1월에 임금이 "무장을 추천하라!"고 명했을 때 이순신을 추천했다. 그리고 2월에 우의정으로 승진했는데 11월에 '역적'으로 체포된 것이다.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위험 무릅쓰고 '감옥의 역적'을 찾아 문안하다
/이철원 기자
이순신은 정언신의 무고함을 믿었고, 이전에 자신을 아껴주고 추천해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는 생애 최악의 역경에 처한 정언신을 감옥으로 찾아가 문안했다. 그건 무고한 죄수를 양산하던 당시 시국에 대한 '항의'로 받아들여질 행동이었다. 당시의 일이 이순신의 '행록(行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공(이순신)이 차사원으로서 서울에 들어오자 우의정 정언신이 방금 옥중에 있으므로 공이 옥문 밖에서 문안하였다. 그때 금오랑(의금부 도사의 별칭)들이 당상(堂上)에 모여앉아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보고 공은 금오랑들에게 '죄가 있고 없는 것은 막론하고 일국의 대신이 옥중에 있는데 이렇게 당상에서 풍류를 잡히고 논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 아니오.' 하니 금오랑들도 얼굴빛을 고치고 사과했다."

정언신은 끝내 '역적' 혐의를 벗지 못하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대신(大臣: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처형한 전례가 없다' 하여 귀양으로 낙착되었고, 2년 뒤 귀양지에서 죽었다. 후일 그의 무고함이 드러나 죽은 지 8년 만에 복권되었다.

선조 22년 12월에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전격 좌천된 것은 당시 여러 정황상 '역적 정언신 옥중 문안 사건' 때문이었다고 확증된다. 눈병 때문에 흘린 눈물로도 목숨을 잃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참혹한 세월에 그 위험한 사건으로 인한 불이익이 어떻게 '좌천' 선에서 끝날 수 있었을까?

이유는 이순신이 6년 전 니탕개의 난에서 세운 '찬란한 전공'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때 진압군으로 육진에 파견된 이순신은 조선군 최고 최대 전공을 세워 전란 종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북병사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모의하고 거사하여 위계질서를 깨뜨렸다"는 현지 주둔군 최고사령관인 북병사 김우서의 항의로 전공에 걸맞은 포상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좌천당했다. 하지만 그때의 전공으로 그는 선조와 조정 중신들의 큰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순신은 자신이 과거에 세운 전공에 강한 자부심이 있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 불이익은 당하겠지만 무고한 자신을 역적으로 몰지는 못하리라 확신하고 그처럼 위험한 일을 당당하게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정언신이 신문 받을 때 선조는 그를 친히 국문(鞠問)하면서 매까지 쳤다. '대신을 지낸 죄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매를 치지 않는다'는 개국 이래 관행을 깬 것이다. 역적이란 누명 아래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던 옥중의 정언신에게 이순신의 문안은 참으로 크고도 깊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