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자 박혜란(71)씨는 육아 전문가, 엄마들의 멘토로 유명하다. 아들 셋을 과외 시키지 않고, 스트레스 없이 모두 서울대에 보낸 경험을 책으로 냈다. 둘째 아들이 가수 이적이어서 더 유명세를 탔다. 기자 출신으로 여성학에 몰두하던 박씨는 나이듦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50대와 60대에 각각 『나이듦에 대하여』와 『다시, 나이듦에 대하여』를 낸 그는 70대가 되어 『오늘, 난생처음 살아보는 날』(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펴냈다. 6일 기자와 만난 박씨는 “이 책은 나이듦 시리즈 3탄”이라고 설명했다.
책은 “드디어 노인이 되었다”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가까워진 죽음 앞에서 어떻게 하루하루 나이들 것인가에 대해 얘기한다. 노년층에 다가오는 공포인 죽음과 병마 등의 일상도 무겁지 않게 풀어냈다. 박혜란 특유의 위트 때문에 노년의 삶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인생을 돌아보니 지금처럼 좋은 때가 또 없었다 싶다. 집 마련하느라 허리띠 졸라맬 걱정 없어, 아이와 씨름하며 공부시킬 걱정 없어, 남보다 못살까 봐 애면글면할 것도 없어, 남편 일이 잘 안 될까 속탈 걱정도 없어, 더 이상 큰돈 들 일도 없어, 시집살이 톡톡히 시켰던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도 원한도 다 사라지고 없어, 걱정이라면 그저 앞으로 아프지 말고 죽어야지 하는 것 하나뿐이다.”
박씨는 “친구들끼리 모이면 마치 누가 깜빡깜빡 챔피언인지 겨루는 대회라도 열린 것 같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씨의 눈빛은 형형했고 목소리도 또렷했다. 그는 “50대 때 쓴 『나이듦에 대하여』의 주 독자가 30대였다. 왜 50대 아줌마의 신세 한탄에 젊은 층이 공감하는지 신기했다”고 말했다. 박씨에게 육아법을 배운 30대 후배들이 멋지게 늙어가는 법도 본받으려 한 것 같다. 70세가 되어 쓴 이 책도 후배 세대에게 지침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상에는 시간이 가르쳐주는 것들이 참 많다”고 했다.
박씨는 은퇴 직후엔 남편이 조금만 거슬려도 삐지거나 목소리가 커지는 등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했다. 황혼이혼이 이래서 늘어나는구나 싶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는 “남편들은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 세대와 반대로 살면 된다”면서 “페미니즘이 답”이라고 말했다.
“남자는 여자보다 잘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들이 엄청난 권력을 누린 것 같지만 이를 위해 남자들이 얼마나 힘들고 큰 짐을 다 짊어지고 살았는가. 여자보다 잘나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억압이라는 것을 왜 남자들은 모르는가. 나이가 들면 권력을 빼앗긴 남자들이 심적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 다른 말로 양성평등을 기초로 한 친밀감이 있어야만 오순도순 살 수 있다.”
아이와의 소통이 원천 봉쇄된 것도 문제다. “과거 세대 육아는 남자답지 못하고 아내에 대한 월권이라는 생각도 했을 거다. 그러나 소통이 없었으니 노년이 되면 인간적으로 대접받기 힘들고 고독한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일흔이 넘어서부터는 자신이 주장했던 결혼 정년제나 졸혼제(20년이 지나면 결혼에서 졸업) 같은 것들도 번거롭게 생각된다고 했다. 그는 “좋으나 싫으나 오래도록 살아온 남편이니 그냥 죽을 때까지 함께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남성적 공간에서 큰 사람]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인해 여성 리더십은 비판받고 있다. 박씨는 할 말이 많았다. 그는 “비리를 저지른 최순실은 리더십이라고 볼 수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몸은 여성이지만 실제로 여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여성계에서 첫 여성 대통령을 깎아내리려 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성이 별로 없는 박 대통령을 딱 반긴 것도 아니었다. 박씨는 “박 대통령은 완전히 남성적 공간에서 자란 사람이다. 여성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배려와 공감, 정서적 교류, 소통 같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게 없었다. 남성적인 박 대통령의 실패 때문에 여성에게 리더십을 맡기면 안 되겠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억울한 얘기다. 잘못한 남자 대통령이 나온다고 남자는 대통령 시키면 안 된다고 하지는 않는다. 여성으로서는 억울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며느리와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 박씨는 “며느리나 자식이나 똑같다”며 “다름을 인정하고 아예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도 안 한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박씨가 냉장고에서 손주들에게 우유나 주스를 꺼내주면 며느리들이 눈치를 살피면서 유효기간을 점검한다고 한다. 박씨가 아주 꼼꼼한 편은 아니어서 며느리들이 다시 확인을 한다. 시어머니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박씨는 “나는 유통기한 하루 이틀 넘겨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며느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생각도 맞다. 그 정도는 먹어도 괜찮다고 강요하면 안 된다. 나는 이렇게 사니까 너도 이렇게 하라고 남의 인생에 개입을 하면 안 된다”고 웃었다.
[권력 누린 것 같지만 남자는 억압당해]
일본 작가 사노 요코는 세상을 뜨기 두 해 전까지의 생활을 담은 『죽는 게 뭐라고』를 썼다. 혼자 사는 작가로서 죽음을 삶의 일부로, 삶의 당연한 수순으로 담담히 받아들인다. 박씨도 전작 나이듦 시리즈와 비교해 죽음에 대한 언급이 약간 늘었다.
“친구의 죽음이 남긴 그림자는 쉬이 옅어질 것 같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나 자신이 다시 보였다. 내가 인정하기 싫은 내 모습이. 친구는 잊어버리기 쉬운 것을 다시 깨우쳐 주었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늘 마음을 잘 가다듬고 살라고,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열심히 사랑하며 살라고.”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고 박씨는 말했다. 친했던 친구도, 제사 음식을 잘 만들던 큰 동서도 세상을 떠났다.
요즘 박씨 또래의 화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다. 다들 아프지 않고 자는 듯이 죽고 싶다는 소망을 한다. 노인이 죽고 싶다는 말이 거짓말 중 가장 큰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더 이상 그렇지는 않다고 박씨는 믿는다. “앞으로의 삶이 고통만 있고 무의미하다면 죽고 싶다는 생각은 존중받아야 한다. 안락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살고 싶으면 당연히 존중해야지만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데 삶의 끈을 왜 쥐고 있는가. 생명 연장 장치 등에 대해 평소에 자식들에게 얘기를 해놔야 한다. 중환자실에서 주렁주렁 몸에 끈을 달고 사는 것은 끔찍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우리 세대는 너무 오래 살아서 당황한 한국의 첫 세대, 신노년의 첫 세대”라고 말했다. “내가 스물다섯 때는 60세에 죽을 줄 알았다. 그땐 다들 60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환갑은 빚을 내서라도 치를 잔치고 큰 경사였다. 나도 그렇게 준비했다. 그러나 수명은 놀랍게도 30년이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