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660년 음력 가을 7월 18일, 사비성(泗沘城)에서 북쪽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친 의자왕이 나당(羅唐)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700년 사직에 종언을 고했다. 이때 일은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 7년(660)조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이에 의하면 의자왕은 이달 13일 포위망을 뚫고서 가까운 신하들만 데리고 야음을 타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현지에 남은 의자왕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난 18일, 의자왕마저 태자를 데리고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같은 달) 29일 금돌성(今突城)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에 도착해 제감 천복(天福)을 당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보고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금돌성은 지금의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었고, 소부리성은 백제 마지막 수도로 지금의 충남 부여에 있던 사비성을 말한다.

그에 앞서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치욕의 현장을 태종무열왕 본기는 이렇게 적었다.

“법민(法敏)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는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예전에 네 아비가 억울하게 내 누이를 죽여 옥중(獄中)에 파묻은 일이 나를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더니, 오늘에야 네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라고 하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법민, 항복하는 부여융에게 침 뱉어

우리는 백제 개로왕에게 앙심을 품고 고구려로 도망가서 나중에는 그 침략군 앞잡이가 되어 나타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이라는 두 사람이 개로왕을 사로잡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임금 얼굴을 향해 침을 세 번 뱉고는”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인 장면을 기억한다. 실상 그와 똑같은 치욕을 훗날의 문무왕이 되는 신라 태자 김법민은 백제 왕자 부여융(夫餘隆)에게 가한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개로왕을 모욕한 이들은 말에서나 내렸지, 김법민은 말 위에 그대로 걸터앉은 채 침을 뱉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20년 전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죽인 일’이란 무얼 말하는가.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 백제 의자왕 2년(642)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대야성 전투를 마주한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양국의 협공에 내내 시달리는 중이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몰아치고, 백제는 신라 서쪽 변경을 들이쳤다. 이해만 해도 7월에 의자왕이 병사를 크게 일으켜 미후(獼猴)를 비롯한 신라 서쪽 변경 40여개 성을 빼앗았는가 하면, 그 다음 달에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와 합세해 신라가 당과 교유하는 서해안 창구인 당항성(党項城)을 침범해 당과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한 일도 있었다. 이 와중에 저 유명한 대야성 전투가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신라는 치열한 공방 끝에 대야성을 내준 것은 물론 이곳을 지키던 성주(城主) 품석(品釋) 부부가 죽임을 당하고, 남녀 1000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대목을 『삼국사기』 백제 의자왕 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치니 성주인 품석이 처자식을 데리고 나와 항복했다.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은 목을 베어 그들의 서울로 보냈다.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 주(州)와 현(縣)에다가 나누어 살게 하고는 병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했다. 임금이 윤충이 공로가 있다 해서 말 20필과 곡식 1000섬을 주었다.”

더 상세한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와 있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품석 외에도 그를 보좌한 사지(舍知) 죽죽(竹竹)과 용석(龍石) 등이 함께 죽었다. 사지란 17등급으로 나뉜 신라 관위(官位)의 제10번째 명칭이다. 죽죽의 용맹함을 『삼국사기』는 별도로 그의 열전을 세워 표창했다. 한데 이 대야성 전투의 패배가 김춘추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던 듯 싶다. 한국사의 흐름을 바꿔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명장면이 여기 펼쳐진다.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한 그해) 겨울, 임금이 장차 백제를 정벌하여 대야성 패배를 보복하고자 이찬(伊飡)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를 청하고자 했다. 그에 앞서 대야성이 패배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춘추의 딸이자 품석의 부인은 누구인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으로 가보자.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딸 죽음 듣고 하루종일 기둥에 기대 슬퍼해

그는 다름아닌 고타소였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지만 그의 생모가 누군지는 베일에 가려있었다. 고타소 역시 김법민·인문 형제나 마찬가지로 김유신의 동생 문희(文姬) 소생 정도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고타소의 생모가 문희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타소가 만약 문희의 소생이라면 오빠 김법민(626년생)보다 늦게 태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그 이듬해에 태어났다 손치더라도 대야성에서 죽을 때 고타소는 기껏해야 만 15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고타소가 많아봐야 죽을 때 15세라는 뜻이며, 그보다 더 어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그가 김품석과 혼인해 대야성을 지키는 성주의 부인이 돼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고타소는 문희의 딸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김춘추의 딸 고타소는 문희의 소생이 아닌 정실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대목을 예리하게 간파한 것이 『화랑세기』다. 춘추공(春秋公) 열전에는 문희와의 결혼을 미적댈 당시 김춘추에게는 보량(寶良)이라는 아름답기 짝이 없는 부인이 있어 그와의 사이에는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다고 전한다. 20년 뒤, 더 정확히는 그로부터 18년 뒤에 김춘추의 아들이자 태자인 김법민이 백제를 멸하면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붙잡아 말 아래 꿇게 하고는 침까지 뱉은 이유를 비로소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법민에게 고타소는 이복 누이였지만, 고타소의 죽음으로 인한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보았기에 이리 행동했으리라.

대야성 전투 패배가 김춘추에게 안긴 ‘내상(內傷)’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다른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죽죽 열전에 의하면 대야주 현지 출신인 죽죽은 선덕여왕 때 사지(舍知)가 돼 대야성 도독 김품석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642년 가을 백제군에 대야성이 함몰할 때 죽는다. 한데 이 열전을 보면 대야성 함락을 부른 장본인은 다름 아닌 김품석임을 알 수 있다.

내막은 이렇다. 품석이 거느린 막객(幕客)으로 역시 사지(舍知)인 검일(黔日)이란 사람이 있었다. 품석은 검일의 아내의 빼어난 미모에 반해 그만 아내를 빼앗아버렸다. 이를 갈던 검일은 마침 윤충이 거느린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 들어오자 적과 내응해 창고를 불태우며 성안을 혼란에 빠뜨린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품석은 고타소와 아이들을 죽이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후 죽죽은 용석과 함께 마지막까지 대야성을 지키며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포로가 된 의자왕에게 술 따르게 해

이 전투에서 검일 이외에도 백제와 내응한 자가 있었는데, 바로 모척(毛尺)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본기 7년(660) 조에 의하면, 백제를 멸한 직후인 그해 8월 2일, 김춘추는 주연을 크게 베풀어 나당 참전 용사들을 위로했다. 이때 김춘추는 당나라 사령관인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단상에 앉고 포로가 된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융은 그 아래 앉히고는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이를 지켜보던 다른 백제 신하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얼마나 비참한 장면인가.

한데 김춘추는 모척을 붙잡아 목을 베게 했다. 나아가 검일도 잡아다가 문초하기를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해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 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해서 싸움에 지도록 했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했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다”라고 하면서 사지를 찢어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아내를 빼앗긴 검일은 모척과 함께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과 내응해 성이 함락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뒤 백제로 들어가 호의호식하다가 18년 뒤에 백제가 함락될 때 붙잡혀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했던가. 김춘추는 사랑하는 딸을 백제에 잃은 복수심에 불타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다. 돌이켜 보면 다름 아닌 사위가 빌미를 준 셈이지만 김춘추에겐 그보다 복수가 더 중요했다. 복수심에 불타 숙적 백제를 멸한 신라는 이어 고구려까지 멸함으로써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달성했다. 한국사의 획을 가른 위대한 역사가 치정(痴情)이 부른 복수극의 결말이었다는 건 아이러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