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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인문학'의 가벼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7. 3. 22:29

참을 수 없는 '인문학'의 가벼움

입력 : 2016.06.18 03:00 | 수정 : 2016.06.18 10:17

어느 스타 강사의 '황당 강의'로 본 2016년 한국의 인문학 현실

- 판치는 '인스턴트 인문학'
강사도, 청중도 삶을 정조준하는 내용 대신 '통조림 지식'만 전하고 원해
지적 허영심 채우는 액세서리로 전락

강사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사유·토론하는 그곳이 인문학 출발점

"조선 최고의 천재 화가는 누가 뭐래도 장승업입니다. 장승업 선생이 그린 그림을 보겠습니다. 제가 엄청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말의 기상이 살아 있죠."

지난달 19일 OtvN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에 출연한 수능 사회탐구 스타 강사 최진기씨가 '어른들의 인문학, 조선미술을 만나다' 편에서 말 여러 마리가 달려가는 그림 한 점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중섭의 '소'처럼 역동성이 살아 있다"면서 "이것이 진짜 조선화"라고도 했다. 그러나 최근 이 그림은 미술사 연구자 황정수씨에 의해 장승업 그림이 아니라 이양원(72) 전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청자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최씨는 지난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모든 방송에서 하차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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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OtvN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에 출연한 수능 인기 강사 최진기씨가 이양원 전 동덕여대 교수의 그림을 조선 시대 화가 장승업의 ‘군마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OtvN 화면 캡처

질문 없는 '유사 인문학' 열풍

최진기씨와 '어쩌다 어른' 제작진의 사과에도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건이 최근 유행하는 인문학 강의 열풍의 민낯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엉뚱한 작품을 장승업 것으로 소개한 오류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인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단 강의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불교미술사학자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움직이는 생물과 같은 것인데 이를 마치 고정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암기과목 가르치듯 하는 강의는 인문정신을 훼손하는 '유사 인문학'에 불과하다"고 했다. 한 예로 최진기씨는 장승업을 '천재'라고 규정하면서 그 근거로 "천재는 그림을 빨리 그린다"고 말했다. "천재는 하나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다 할 수 있죠. 피카소도 천재 화가라고 한다"고 하기도 했다. 한국회화사 전공자인 유재빈 박사는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질문"이라고 했다. 피카소를 천재라고 한다면 누가 왜 그를 천재라 불렀으며, 과연 천재라는 개념은 가능한가를 질문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유 박사는 "미술사학자가 연구를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다른 시대의 물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다른 시대의 눈으로 봄으로써 지금 보는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고 의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이라면서 "그런데 많은 대중 강연들은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대중은 '정답'을 원한다

'인문학'이라는 미명 아래 암기용 지식을 전달하는 대중강의의 범람은 결국 그런 식의 쉽고 편한 강의를 원하는 대중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미술사' 등의 저서를 쓴 미술평론가 이진숙씨는 "수능 특강식 인문학 강의는 보통 20대를 겨냥한다. 그 세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스스로 사고하는 공부를 한 적 없이 족집게 과외만 받은 것"이라면서 "대중이 남이 정리해서 입에 쏙 넣어주는 지식을 원하다 보니 그런 강의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중 강의를 자주 하는 한 미술평론가는 "강연을 의뢰한 기관에서 '최진기 스타일로 강의를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면서 "'인문학의 대성학원 버전' 강의가 대중에게 잘 먹히기는 하는 모양"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각종 정부기관, 지자체 등이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강연을 마련하면서 입담 좋은 스타강사 위주로 섭외한다"면서 "그렇지만 그런 강의는 어디까지나 인문학의 2차 소비자가 적당한 가공을 거쳐 3차 소비자에게 재판매하는 '속성 교양'일 뿐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인문학이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액세서리 정도로 여겨지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기업 간부 대상 강의를 자주 하는 한 미술사 강사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과시할 수 있는 액세서리 정도의 지식이 우리 사회에서 대중과 돈이 몰리는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강사는 "인문학을 처세술로 여기다 보니 '인스턴트 인문학'이 판을 치는 것"이라고 했다.

독서력 부재가 문제

'인스턴트 인문학'의 유행은 책 읽기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스스로 책을 찾아 읽기보다 TV의 책 소개 프로그램이나 전문가 강연에 기댄다는 것이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예전 같으면 서너 시간 걸려 책 한 권을 읽고서 깨달았을 지식을 요즘 사람들은 책에 대한 2시간짜리 강의를 통해 단번에 습득하려 한다"고 했다. 결국 '독서력의 부재'가 원인. 한씨는 "책벌레들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또 다른 책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모른다"면서 "책 관련 강의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추천도서 목록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인문교양서를 주로 내는 한 출판인은 "개론 지식을 대중에게 단순한 프레임으로 전달하는 책들이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베스트셀 러가 된다"고 했다. 인문학에 대한 동경은 있으나 어렵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런 책을 접하고는 '어, 생각보다 쉽네!' 하면서 사들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미술평론가 이진숙씨는 "작은 독립서점들이 개최하는 독서토론회 등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강사 없이 자발적으로 사유하고 토론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