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시인 두보의 초상. 그는 전쟁의 참혹함을 진지한 시선으로 그려낸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초상. 그는 전쟁의 참혹함을 진지한 시선으로 그려낸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잘 사는 집 대문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
길가에는 얼어 죽은 사람의 해골이 있네.
영화로움과 시듦이 지척으로 이리 다르니,
마음이 슬퍼져서 더 적어갈 수가 없구나.”

 

이런 내용으로 지은 시문이 하나 있다. 당나라 시단의 최고봉을 이뤘던 두보(杜甫·712~770)의 작품이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 지금의 중국 시안)에서 봉선(奉先)이라는 곳으로 가다가 적은 시다. 우리에게도 위의 두 줄 원문 “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주문주육취, 노유동사골)”로 유명한 작품이다.

두보라는 시인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에게 붙는 찬사는 여럿이지만, 여기서 그를 소개하는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전쟁의 속살을 그만큼 제대로 적은 중국의 시인은 많지 않다. 두보는 전쟁이 드리우는 그늘을 가장 진지하게 헤집어 본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겪은 전쟁은 이른바 ‘안사지란(安史之亂)’으로 불리는 당나라 때의 내전이다. 내전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그 참화(慘禍)는 이족과의 전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위의 시는 ‘안사지란’이 번지기 직전의 무렵에 나왔다.

그는 수도 장안이 내란의 주동자에게 점령당하는 경우를 맞아 피란에 나서다가 여러 곳을 배회한다. 천재적인 시인의 눈에 비친 전쟁의 혹독함, 그 소용돌이 안으로 섞여 들어가면서 어떻게 해서든 목숨을 지켜보려는 일반 백성의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들 둘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내란의 전화(戰火)는 도처에서 일었다. 난이 번진 지 3년 정도 지난 무렵이었다. 당시 두보는 장안에서 좌습유(左拾遺)라는 말직에서 강등당한 뒤 다시 전쟁에 참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장안을 떠나 낙양(洛陽) 인근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 때 지났던 곳이 석호촌(石壕村)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별 볼 일 없는 한촌(閑村)이다. 그러나 장안에서 낙양을 향할 때 반드시 거치는 장소여서 군사적으로는 민감한 촌락이었다. 두보가 그 때 지은 시는 ‘석호리(石壕吏)’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전쟁이 일반 백성에게 남기는 깊고 쓰라린 그늘이 이 시에서 도저하게 드러난다. 원문 없이, 스토리 전개식으로 그 시를 적어본다.

 

“저녁 어스름에 석호 마을에 묵기 위해 몸을 들였다. 관리가 사람을 잡으러 왔던 모양이다. 늙은이 하나가 담을 넘어 달아난다. 그 아내는 대문 앞으로 나선다. 관리의 호통 소리는 얼마나 대단하고, 여인네의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여인네가 울며 하소연하는 소리를 듣는다. 아들 셋이 모두 전쟁에 끌려갔단다. 그 중 하나가 엊그제 소식을 전해 왔다. 아들 둘이 전쟁에서 죽었다고…. 남아 있는 사람은 그저 목숨 부지하려 애쓰고, 죽은 이는 어쩔 수 없다는 하소연이다. 집에는 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저 젖먹이 손자가 있다는데, 며느리는 남아 있어도 집밖으로 나설 때 걸칠 치마도 없다고 푸념한다. 여인은 늙었지만 관리를 따라 가고 싶다고 한다. 하양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좇아가, 아침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면서. 밤이 깊어 사람들 말소리는 진작에 그쳤고, 어렴풋이 누군가 울다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듯하다. 아침이 밝아 길을 재촉하는데, 담 넘어 도망쳤던 늙은 남편만이 배웅을 한다.”

 

요란한 수식이나 형용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전란의 아픔은 두보의 담담한 필치에서 곳곳이 깊어진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회오리 바람에 짓눌리는 민초(民草)의 아픔은 그래서 더 강렬하다. 늙은 남편을 전쟁터에 끌고 가기 위해 닥친 관리와 담을 뛰어넘어 도망치는 사람, 아들 셋 가운데 둘을 잃은 나이든 여인네가 남편 대신 전쟁터에 밥 해주는 사역을 하려고 나서는 모습이 다 그렇다. 여인네는 밤에 관리를 쫓아 전쟁터로 가고, 날이 밝아 뒤늦게 돌아온 늙은 남편과 시인이 헤어지는 장면도 그저 담담한 표현뿐이다. 그럼에도 민초에게 드리운 전쟁의 그늘은 아주 깊어 보인다. 공감(共感)의 영역도 끝 부분에 이르면서 크게 넓어진다. ‘석호리’가 명시인 이유다.

이 때는 마침 내전이 벌어져 참혹함이 번졌던 때였다. 그러나 내전이 아닌 시절에서도 전쟁의 그림자는 늘 닥쳤다. ‘안사지란’이 벌어지기 몇 년 전이었다. 그 때는 변방에서 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사람들을 징발했다. 그 현장도 이 우울했던 천재 시인 두보가 지켜본 적이 있다.
 

“15세 때 끌려갔다 와서 40세에 또 끌려가”
그의 시작(詩作)에서 전쟁을 그린 작품은 여럿이다. 그 중에서도 위의 ‘석호리’와 함께 우선 꼽히는 게 하나 있다. ‘병거행(兵車行)’이라는 작품이다. 수레 중에서도 군대가 사용하는 것이 병거(兵車)다. 그런 병거가 움직일 때의 상황을 그린 시다. 요즘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전선(戰線) 열차’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 시도 그 대강을 한 번 옮겨보자.

 

“수레는 삐꺽삐꺽, 말은 히히힝 거린다. 아버지, 어머니, 처와 자식들이 배웅한다. 옷깃 부여잡고 길을 막으며 우는데, 울음소리가 하늘 끝까지 솟는다. 전쟁터로 떠나는 이에게 물으니, ‘호적 뒤져 사람 늘 잡아간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15세에 북쪽으로 끌려가 강변의 전선을 막다가, 40세 때 돌아와서는 서쪽으로 또 끌려갔단다. 떠날 적 마을 이장이 소년의 머리를 헝겊으로 둘러줬는데, 흰머리로 변해 돌아와도 여전히 불려간다. 변방에는 피가 흘러 바다를 이뤘음에도, 황제의 변경 개척 의지는 그칠 줄 모른단다. 그대 듣질 못했는가, 산의 동쪽 모든 마을이 모두 황무지로 변했음을…”.

 

그러나 두보의 ‘병거행’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 산시(陝西) 지역 출신 병사들이 무지렁이 농사꾼들이라 전쟁에 잘 견딘다는 점을 알아 조정에서 그들을 개와 닭 몰듯이 마구 전쟁터로 내보낸다(被驅不異犬與鷄)고 했고, 이렇게 시달릴 바에는 아들 낳지 않고 딸을 얻는 게 더 낫다고 믿는다(信是生男惡, 反是生女好)는 말을 전한다.

 

안사의 난을 촉발했던 양귀비(楊貴妃)의 상상도. [중앙포토]

 

안사의 난을 촉발했던 양귀비(楊貴妃)의 상상도. [중앙포토]

마지막이 압권이다. “그대는 보질 못 하는가? 저 청해의 끝자락, 예부터 백골이 널려 사람의 손이 거두지 못하는 곳. 새로 죽은 귀신은 투덜거리고 먼저 죽은 귀신 우는 곳, 하늘 흐려져 비라도 내리면 꺽~꺽 울음소리 가득한 곳을…(君不見靑海頭, 古來白骨無人收. 新鬼煩寃舊鬼哭, 天陰雨濕聲啾啾)”.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도 있다. 어느 봄에 바라본 정경(情景)을 이르는 ‘춘망(春望)’이라는 작품이다. ‘안사지란’이 벌어진 이듬해 그는 반란군에 붙잡혀 수도 장안에 보내진다. 벼슬이 높지 않아 다행히 풀려난 두보의 눈에 비친 수도의 상황이 이렇다.

 
나라 깨어져도 산하는 그대로지만,
(國破山河在)
성에 봄이 오니 초목만 우거졌네
(城春草木深)
세상일 생각하니 꽃에도 눈물짓고,
(感時花濺淚)
이별을 한탄하니 새소리에 놀란다.
(恨別鳥驚心)
전쟁의 횃불이 석 달 간 이어지니,
(烽火連三月)
집 소식 얻으려면 만금이나 든다.
(家書抵萬金)
희끗해진 머리는 긁어 더 짧아져,
(白頭搔更短)
정말로 비녀조차 받치질 못 하네.
(渾欲不勝簪)

 

두보가 겪었던 전쟁, 안사지란(安史之亂)의 주요 현장이었던 시안의 명나라 때 성곽 모습. [중앙포토]

 

두보가 겪었던 전쟁, 안사지란(安史之亂)의 주요 현장이었던 시안의 명나라 때 성곽 모습. [중앙포토]

 

태평시절이라던 당나라 때도 전쟁의 공포
두보는 말년의 시작에서 스스로 흐느끼는 장면을 자주 적는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런 두보를 보면서 나약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전란의 참혹함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면 두보의 그런 상감(傷感)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두보를 ‘울보’로 취급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전쟁은 그만큼 모든 이의 영혼을 갉아먹는 잔혹함 그 자체다.

두보라는 천재 시인만 그렇지 않다. 전쟁의 참혹함은 사실 중국의 오랜 전통 문단의 주제였다. 전쟁의 잔인함 속으로 끌려들어간 시인 하나는 “맛난 포도주에 야광의 술잔, 마시려니 길 떠나기 재촉하는 비파 소리 들린다. 취해서 전쟁터에 누웠다고 웃지 말아요, 예로부터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이 얼마나 된다고?”라며 반문까지 한다.(당나라 시인 王翰)

전쟁터에 있으면서 고향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던 시인 하나는 옷소매가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러다 말을 타고 가다가 고향 쪽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만난다. “말 위에 마침 종이와 붓이 없으니, 그저 가족에게 나 잘 있다고 전해주길(馬上相逢無紙筆, 憑君傳語報平安)”이라며 간절한 마음을 얹는다.(당나라 시인 岑參)

중국인들에게 비교적 태평했던 시절로 여겨지는 당나라 때의 모습들이다. 평화롭던 시절에도 사실은 늘 전쟁의 공포가 일었다. 두보는 ‘안사지란’의 안팎에서 전쟁의 모습들을 그렸고, 뒤의 왕한(王翰)이나 잠삼(岑參)은 내전이 아닌 평범한 시절에 변방의 전쟁 공포를 다뤘다.

왕조의 교체 시기, 내란이 번져 국토 전체가 혼란으로 휩싸이는 경우, 통일왕조가 명맥을 다 해 농민들에 의한 반란이 번지는 때는 아주 혹심한 전쟁이 이어진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인들은 앞 회에서 소개한 “차라리 태평한 시절의 개로 살고 싶다”는 비원(悲願)을 품는다.

중국인의 마음과 사고를 지배했던 게 이런 전쟁이다. 중국의 역사에는 그런 전쟁이 일정한 리듬처럼 늘 닥쳤다. 그런 인문의 환경은 종내 어디로 이어질까. 중국의 깊은 정신 세계도 결국 그런 전쟁의 상흔(傷痕)을 비켜갈 수는 없는 법이다. 더 참혹한 전쟁의 이야기는 아직 많다.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
ykj335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