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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사람을 만든다 /구재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3. 13. 21:01

[시를 즐기는 모임] 강의  내용.

•장소 : 충남 서천 다온사랑방 / •일시 : 2016. 03. 12(토) 16:00~18:00

 

 

 

[詩論]

시가 사람을 만든다

구재기

 

 

     남을 증오하는 감정이 얼굴의 주름살이 되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고운 얼굴을 추악하게 변모시킨다. 감정은 늘 신체에 대해서 반사운동을 일으킨다. 사랑의 감정은 신체 내에 조화된 따스한 빛이 흐르게 한다. 그리고 맥박이 고르며 보통 때보다 기운차게 움직인다. 또 사람의 감정은 위장이 활동을 도와 음식 소화를 잘 시킨다.

     이와 반대로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감정은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동시에 맥박을 급하게 하며, 위장의 운동이 정지되어 음식을 받지 않으며, 먹은 음식은 부패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은 무엇보다도 먼저 건강에 좋은 것이다.(R.데카르트)

     시는 힘찬 감정의 발로發露라고 한다(W.워즈워스). 그렇다면 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최상最上의 행복과 최선最善의 정신과 최량最良이고 최고最高의 행복을 소원하는 감정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숱한 감정에서 최고를 추구하는 시의 세계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시를 살펴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 <동천冬天> 전문

 

     불과 62자, 불과 한 문장 안에 이토록 고귀한 사랑의 감정을 말해놓을 수 있을까?

     위 시작품은 겨울 하늘에 뜬 초승달을 그리운 님의 눈썹에 견주어 노래하고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천상적天上的 · 정신적 사랑과 우주적 상상력으로 승화되고 있다고 평자들은 지적한다. 이 시는 거추장스러운 단 한마디의 설명도 배제한 채,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빚어낸다. 절제된 말로써 간결하게 그려낸, 차가운 동양화의 단순함을 느끼게까지 한다.

     이 시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는 “눈썹”과 “새”이다. 겨울 하늘에 차갑게 걸려 있는 눈썹 같은 초승달과 그 달을 차마 가로질러 날지 못하고 비껴날고 있는 듯한 한 마리 새의 모습을 그린 한 폭의 동양화처럼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이 시작품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화자는 그 초승달을 “내 마음속 우리임의 고운 눈썹”이라고 말하며, 그 눈썹을 하늘에 옮겨 놓았다는 상상에서 절대적인 대상이요, 대상에 대한 존엄함과 외경畏敬스러운 마음을 엿보이게 한다. 그러하거니와 눈썹이 얼마나 높고 귀한 것인가를 알겠다는 시늉을 하며, 두려움에 감히 근접은 못하면서 조심스럽게 피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작품에서의 “눈썹”은 여인의 육체 한 부분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시인이 마음속에 품어 온 삶의 어떤 고귀한 정신적 가치이며, 숭고한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을 하늘에 옮기어 심어 놓았다는 말은 절대적 경지로 승화시킴은 물론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간다 함으로 표현하였거니와, 이는 인간은 물론 새까지도 그 고귀한 정신적 가치를 알아차리고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외경畏敬의 뜻이 들어있는 고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자기를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감정을 가졌다면 인간은 보다 더 성숙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자세를 가질 수 있느냐를 다음의 시는 말해준다.

 

 

이른 아침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호승<햇살에게> 전문

 

 

     인간은 그 자신이 평가하는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오직 자신의 가치 기준에 의하여 평가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란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최대치를 기준으로 삼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자신을 세우는 절대 가치의 기준이요,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고하게 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즉 자신을 세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욕망이란 본성을 뒤로 하고 윤리라는 도덕성을 앞세워 겸손함으로 스스로를 낮추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계기로 하여 자신을 본성으로 바라보면서 자아 성찰을 통한 내면적인 자아를 발견하곤 한다. 즉 찬란하게 비추는 아침 “햇살”을 통하여 “이른 아침/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제는 내가/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절대 가치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을 앞세워 겸손함으로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자기 자신을 “먼지”와 동일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먼지”와 같이 보는 것은 허무한 존재로 보거나 비누 거품과 같이 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굳이 도덕적인 겸손으로 볼 수만은 없는 보편적인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시작품에서 말하는 “먼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진리적인 가치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시작품의 가치를 더해준다. 밝은 아침 “햇살” 속에서야 발견될 수 있는 인간의 가치는 곧 “먼지”인 것이다. “햇살” 속에서만 볼 수 있는 하찮은 먼지!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그렇게 하찮게만 보지 아니한다. 먼지를 보는 순간,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먼지”와 같은 인생이 곧 자신이라는 사실로 발견된 결과,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이기도 하다.

     “먼지와 같은 인생인데 나는 도대체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는가?” 에 대한 자문은 “온갖 허위와 거짓과 시늉만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라는 데에서 깊이 반성을 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은 “먼지”같은 인간인 자신을 찬란하게 비춰준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자신의 허물을 용서해주는 그 크고 높은 포용에 대한 끝없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아침 햇살”로부터 깨달은 새로운 삶에의 새로운 지혜요, 바른 길임에 틀림없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이 세상에는 남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일이라면 즐거워하고, 또한 즐겨듣는 인간이 참 많다. 우리나라에 “나귀는 샌님만 업신여긴다”는 속담이 있다. 제게 만만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별 까닭도 없이 함부로 한다는 뜻이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는 행위는 곧 만만하여 자신의 어떤 분풀이라든가 남을 업신여기는 감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연탄재”란 무엇인가? 춥고도 추운 겨울날, 뜨거운 불길로 온몸을 장렬히 달구어 우리를 추위로부터 구원하여 주고는, 결국 아무 쓸모도 없게 됨으로써 인간의 손에 의하여 처참하게 버려진, 하찮고 만만한 존재이다. 그런 “연탄재”를 과연 “함부로 발로 차”야 할까? 그래서는 안 될 일이 분명하다. “함부로 발로 차”는 행위야말로 인간의 그릇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듯하여 부끄러워지게 한다. 만약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는 인간에게 묻고 싶다. “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뜨거움이란 베풀면 베풀수록 샘물처럼 고여 넘쳐흐르는 정이요 한겨울의 찬바람 결에도 스며드는 설중매雪中梅의 향기와도 같아서 삶에 지친 마음속의 추위를 스르르 녹여준다. 그러하거니와 어찌 보잘 것 없는 연탄재로 변해버렸다고 경시하고 무시할 수 있을까?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고 보잘 것 없는 연탄재이지만 세상을 인정과 감사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한때의 뜨거움으로 세상의 추위를 내몰아준 “연탄재”를 함부로 차버리는 무례를 범하지 않고 감사할 것이요, 세상을 활과 칼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이제는 아무런 쓸모없이 하찮게 버려진 “연탄재”만을 보고 함부로 발로 차버리면서 경시할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반드시 안과 밖이 있다. 안은 보이지 않는 것이요, 다만 밖은 보이는 것일 뿐이다. 하찮은 “연탄재”이지만 “나귀”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안팎을 바로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볼 일이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올바른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에게도 “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면서 살아갈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 절로 감동하게 된다. 아름다운 꽃을 보는 순간 절로 아름다운 감정이 솟아오르고, 향기가 밀려오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하거니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인간의 감정이야 일러 무엇하리오. 다음의 시작품을 살펴보자.

 

 

57번 버스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탔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 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밭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쳐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 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멍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김사인의 [오누이] 전문

 

 

     이 시작품을 읽어가면 내내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형이 아우를 아끼고 아우가 형을 공경하여 비록 지극한 곳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이 모두 다 당연할 따름이요, 조금도 감격한 생각을 주지 말 것이다. 베푸는 이가 덕으로 자처하고, 받는 이가 은혜로 생각한다면 이는 곧 모르는 행인과 다름이 없으니 문득 장사꾼 마음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한『채근담菜根談』의 한 구절을 떠올려진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어찌 된 영문인지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 아무개 추도식에 가/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가정이란 인간적인 인간의 감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몸은 비록 가정을 떠난다 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언제나 가정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가야만 할 때나 가고자 할 때에 가장 잘 맞아주는 곳이 가정이어야 한다.

     서민들의 발인 “57번 버스타고 집에 오는 길”에 시인은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탔는데/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는, 우애로운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형제자매와의 우애는 서로가 작은 결점 하나라도 용서하고 받아주면서, 상호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여 주는 등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의 정적情的 생활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러하거니와 “내내 멍쩡하던 눈에”들어온 이 광경은 시인의 마음에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어린 자매의 모습은 계속하여 눈여겨본다. 그들 자매는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어린 여동생에 대한 배려가 지극하다. 뿐만 아니라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리자 “‘됐어’ 오래비 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계집애는 앞 등밭이 두 손으로 꼭 잡고/‘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쳐다본다”. 우애란 이토록 개인적인 애착심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참다운 마음으로부터의 공감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매의 우애로움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인은 오늘날 어린 자식을 버리고 가는 어버이의 세상이 부끄러워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하, 그 모양 이뻐” 계속 시선이 돌려진다. 그리고 마침내 “눈물 핑” 돌고 만다. 이 눈물은 자매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요, 아무것도 성숙할 수 없도록 각박해져버린 현대에 대한 비관적인 눈물이기도 하다. 또한 오늘날처럼 천륜도 쉽사리 버리고도 오히려 떳떳하게 살아가는 어버이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밥하던 아내가

포개진 밥그릇이 빠지지 않아

나에게 들고 왔다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

당최, 힘주어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

물기에 젖어 안으로 깊어진 마음

오늘은 저리 꼭 맞았나 보다 

 

한 번쯤 나는 등 뒤에서 너를 안아보고 싶었네

 

선반 위,

씻긴 두 개의 밥그릇이

봉분처럼 나란하다

- 고영민 [밥그릇] 전문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말이 있다. “비익比翼”은 암수가 눈과 날개를 하나씩 이어서 짝을 지어야만 비로소 날 수 있는 새이며, “연리”는 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의 가지와 잇닿아서 결이 서로 통하여 있다는 의미로, 부부 사이가 매우 좋음을 이르는 말다. 비익比翼과 연리連理처럼 사이가 좋은 부부의 사랑은 점점 늘어나는 주름살 속에 언제나 숨어 있는 것이라면, 주름살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만큼 사랑도 더욱 더 깊어 갈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상대를 통하여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부부의 사랑은 더욱 두터워질 것이다.

     이 시작품은 “밥하던 아내가/포개진 밥그릇이 빠지지 않아/나에게 들고” 옴으로써 시작됩니다. 아내가 가져온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으로부터 시인은 사랑 가득한 부부의 모습을 발견한다. 부부란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듯이 서로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품고 있으면 서로의 아픔까지 모두 서로가 품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하거니와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부부의 사랑이기 때문에 “당최, 힘주어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견고한 사랑이요, 참으로 금슬琴瑟 좋은 부부이다. “물기에 젖어 안으로 깊어진 마음”을 가지는 부부는 사랑에 젖어 더욱 더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 가는 것이다. 남편은 그러한 사랑을 느끼면서 “오늘은 저리 꼭 맞았나 보다”라면서 스스로 큰 행복에 취한다. 그리고 마침내 “한 번쯤 나는 등 뒤에서 너를 안아보고 싶었네”라면서 스스로 행복에 젖은 마음을 뇌인다. 시인은 문득 백년해로百年偕老를 생각한다. “선반 위,/씻긴 두 개의 밥그릇이/봉분처럼 나란하다”고 한다.

     무릇 부부는 어느 한쪽 낮은 쪽의 수준에 맞추어 생활하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또한 부부를 끈으로 묶어 맺어진 인연이라면 그 끈은 반드시 고무줄이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부부는 당사자만이 알고 있는 행복을 추구한다. 다른 사람은 그 부부의 행복을 엿볼 수 없다. 이탈리아의 화가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는 빈곤과 방랑과 술로써 일생을 보내다가 병원으로 가는 택시 속에서 “나는 내 아내를 꼬옥 껴안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둘은 영원한 기쁨을 믿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그가 죽은 다음날 그의 아내는 6층 창문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누가 그들의 깊은 사랑을 알 수 있었으리오?

 

 

     지금까지 몇 편의 시를 통하여 인간의 감정을 살펴본 다음 그 시속의 감정이 인간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일찍이 중국의 백거이白居易는 “시는 정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고 하였으며, 또 공자孔子는 “시경詩經에 있는 삼백편의 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사악邪惡함이 없다”고 하였다. 시는 곧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인간의 감정을 찾아가게 함으로써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詩 鑑賞]

도꾸마리씨 하나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맹문재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 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무게에 대하여

구재기

 

무게를 가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제 주어진 길을

가다가 멈춘 울산바위는 슬프다

멈춘다는 것은

제 무게로 제 자리를 가진다는 것

울산바위는 제 몸의 무게로

자리하여 멈추고는 마냥 슬프다

 

민들레꽃에게도 무게가 있다

그 꽃의 무게만큼

질기고 긴 곧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뿌리로 제 몸의 무게를 감당하다가

마침내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다

 

생애 중 가장 큰 무게를 가진

그 꽃자리에 돋아난 꽃씨

무게를 버리고 나니 가볍다

가벼울수록 멀리 날 수 있다

 

민들레 꽃씨는

바람과 함께 바람에 실려

울산바위 위를 가볍게 날아, 설악을 넘어

울산바위가 훤히 보이는 동해 바닷가

너르고 푸른 밭 언덕에 사뿐 자리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함민복

 

손에 닭튀김을 들고 서 있다

머리도 발가락도 없는 닭고기 냄새가

팔을 타고 올라왔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겉옷에 달린 단추 몇 개 풀며

닭튀김을 내밀고 싶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는지

차량들의 불빛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십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가시

남진우

 

 

물고기는 제 몸속의 자디잔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오늘도 물속을 우아하게 유영한다

제 살 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

물고기는 오늘도 물속에서 평안하다

이윽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사납게 퍼덕이며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 위에 버려질 때

가시는 비로소 물고기의 온몸을 산산이 찢어 헤치고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자신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