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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79년 된 대장간… 3代 아들은 100년을 채우고 싶다는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5. 8. 09:07
 서울에 79년 된 대장간… 3代 아들은 100년을 채우고 싶다는데

입력 : 2016.05.07 03:00 | 수정 : 2016.05.07 03:23

천호동 '동명대장간'의 하루

강영기 

 

아버지 강영기씨는 “하다 보니 (대장간 일을) 계속 하게 됐다”고 했고, 아들 단호씨는 “손님들이 솜씨를 칭찬해줄 때마다 이 일을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부자(父子)에게서 대장장이의 자부심이 느껴졌다./오종찬 기자
"이거 좀 납작하게 되나?"

지난달 19일 오전 7시 서울 천호동 동명대장간. 회색 점퍼를 입은 남자들이 하나둘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이들은 석재(石材)를 가공하는 정을 맡기고는 선반을 뒤적여 새로운 정을 꺼내 갔다. 뭉툭해진 끝을 다시 날카롭게 손질해 놓은 것들이었다. 길이 20~30㎝ 정도인 정을 서너 개씩 교환하며 주인에게 돈을 건넸다. "가격이 얼마냐"는 물음 대신 "끝을 좀 납작하게 해달라"거나 "더 짧은 것은 없느냐"는 말들이 오갔다. 주인은 손님들에게 받은 정을 모루(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작업대) 앞에 던지듯 쌓았다. 대장간 구석에 놓인 화로에 바람을 넣자 무연탄이 빨갛게 타올랐다. 요즘 대장간의 풀무질은 발로 펌프를 밟지 않고 기계로 한다.

서울 강남·강동 지역 유일의 대장간인 동명대장간은 오전 6시 문을 열고 밤 9시에 문을 닫는다. 겉보기엔 일반 철공소와 다르지 않지만 56㎡(약 17평) 남짓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빨갛게 빛나는 화로와 단단한 모루, 담금질 때 쓰는 물통이 눈에 띈다. 3대에 걸쳐 79년째 대장간을 이어오고 있는 강영기(65)·단호(37)씨 부자(父子)는 이곳에서 하루 종일 불과 씨름하며 망치질을 한다.

대장간 먹여 살리는 공사판

오전 6시 대장장이 강영기씨가 화로에 불을 붙이며 대장간 문을 열었다. 새벽에 가게 문을 여는 것은 공사판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다. 도로 보수공사나 상가 공사 현장 등에서 일하는 이들은 현장에 가기 전 대장간에 들러 전날 쓴 연장을 맡기고 새로 손질된 연장을 받아 갔다.

맨홀 뚜껑을 여는 데 쓰는 갈고리, 철을 구부리는 데 쓰는 연장 등 새벽 손님들이 맡기는 물건은 다양했다. 그중 가장 수요가 많은 건 돌을 깨는 데 쓰는 정이었다. 하루만 써도 끝이 뭉툭해져서 매일 갈아줘야 한다. 강씨는 "대형 공사장에서 작업반장이 인부들이 쓰는 정을 모두 가져와 한꺼번에 100개씩 맡길 때도 있다"고 했다.

아버지 강씨가 손님들을 상대해 가며 정을 한 무더기 쌓고 있던 오전 8시쯤 아들 단호씨가 출근했다. 운동복 바지와 낡은 점퍼 차림이었다. 흰 운동화는 녹과 먼지가 묻어 검붉게 변해있었다. 단호씨는 집게를 들고 익숙하게 화로 안 불을 뒤적였다.

농기구만 만들어 팔던 동명대장간이 공사용 연장을 손질하기 시작한 건 1970년대부터다. 대장간 주변의 논밭들이 주택과 상가들로 변해가던 때였다. 건설붐이 일면서 사람들이 "혹시 이것과 똑같이 만들어줄 수 있느냐"며 건설 현장 연장들을 들고 찾아왔다. 아버지 강씨는 "그땐 그게 무엇에 쓰는 건지도 몰랐지만 손님들이 요청하는 대로 따라 만들다 보니 연장을 만들고 손질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했다. 지금은 동명대장간 손님의 절반가량이 공사장 인부들이다.

낫·괭이·삽 같은 농기구도 만든다. 다만 더 이상 농부들만 농기구를 사가지 않는다. 오전 10시 대장간을 찾은 김성호(52)씨는 괭이를 사가며 "하남에 취미로 농사짓는 작은 밭이 있다"고 했다. 호미를 사간 한 60대 여성은 마당 텃밭에 고추와 파 몇 개를 심었다고 했다. 단호씨는 이 손님에게 비싼 수제 호미 대신 3000원짜리 호미를 권했다. 호미를 대장간에서 직접 만들면 2만 5000원은 받아야 하는데 공장에서 찍어 만들어져 나오는 중국산은 3000원이면 살 수 있다. 단호씨는 "작은 텃밭 정도를 가꾸는데 굳이 비싼 값을 주고 호미를 살 필요는 없다"고 했다.

공사용 연장을 빼면 대장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은 칼이었다. 몸체에 장미까지 새겨넣는 요즘 칼들에 비해 거친 나무 손잡이를 박아넣은 동명대장간의 칼은 투박하다. 하지만 이날 칼을 사러 온 사람들은 모두 몇 년째 이곳 칼만 사용한다고 했다.

아직도 망치로 두들겨 담금질

오전 9시쯤이 되자 부자는 본격적으로 화로를 쓰기 시작했다. 정을 20개씩 집어 올려 화로에 넣은 후 요리조리 돌려가며 10분쯤 달궜다. 정이 벌겋게 달궈지면 망치질을 해주는 기계에서 1차 손질을 했다. 발로 페달을 밟으면 기계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구조였다. 그다음엔 모루 위에 정을 올려놓고 4㎏ 정도 되는 망치로 정 끝을 몇 차례 두들겼다. 단호씨는 "기계가 편하긴 하지만 마무리는 꼭 직접 망치를 두들겨 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손질된 정을 물통 속에서 담금질했다. 뜨거운 쇳덩이를 물에 넣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솟아올랐다.

부피가 커 기계를 쓸 수 없는 쇳덩이는 부자가 함께 작업했다. 오후 3시쯤 대형 망치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단호씨가 지름 30㎝짜리 원통형 쇳덩이를 들어올려 화덕에서 달군 후 모루 위에 얹으면 강영기씨가 망치로 쇳덩이를 내려쳤다. 달구고 두드리고 식히는 과정이 5차례 반복됐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망치질 소리에 묻혀 바깥 길거리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100년 전 대장간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을 것 같은 상상이 들 정도였다. 손님이 와도 바로 망치를 놓고 달려가지 않았다. 5분이고 10분이고 손님을 기다리게 하더라도 망치질을 모두 마치고서야 손님을 상대했다.

강영기씨는 "겨울엔 완전히 망치 소리에 파묻혀 지낸다"고 했다. 공사장을 오가는 인부도, 농사짓는 이도 없는 겨울엔 오가는 손님이 반으로 줄어든다. 그 틈에 동명대장간은 다음 해 내다 팔 농기구나 공사용 연장을 만드는 데 열중한다. 대장간에서 파는 칼이나 낫, 꺾쇠 대부분이 지난겨울에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다.

이날 대장간에는 하루 종일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오후 9시 문을 닫을 때까지 약 200명의 손님이 오갔다. 쇠사슬이나 포대 같은 철물점 물건을 사는 사람이 절반, 칼이나 호미 같은 도구를 사거나 수리하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가게 이름이 대장간이다 보니 손님들은 쇠로 된 물건이면 뭐든지 가져왔다. 철제 물통 손잡이를 수리해달라고 온 사람, 등산용 쇠막대기를 만들어 달라는 사람, 직접 그림을 그려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는 사람 등 요구는 다양했다. 멀리서 왔다가 발길을 돌린 사람도 있었다. 서초동에서 왔다는 한 손님은 책상 아래에 받칠 원통형 받침대를 만들어달라고 찾아왔다가 "쇠를 둥근 모양으로 만들긴 어렵다"며 퇴짜를 맞았다.

동명대장간 

 

서울 천호동에 있는 동명대장간. 밖에 내놓은 칼·낫·갈고리 등은 이곳에서 직접 만든 물건이다./오종찬 기자
"쇠로 된 건 뭐든지 만든다"

동명대장간은 1937년 문을 열었다. 철원 출신인 강영기씨의 아버지가 동네 대장간에서 배운 기술을 가지고 천호동에서 대장간을 열었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에 모든 작업을 손으로 하던 때였다. 강영기씨는 "부모님이 학교를 제대로 보내주지 않아 대장간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며 "열세 살 무렵부터 대장간 일을 어깨너머로 보고 자라다 보니 어느 순간 대장장이가 됐다"고 했다. 젊은 시절 대장간 일이 지겨워 목수도 해보고 막노동도 해봤지만 결국 대장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

50년 넘게 대장간 일을 해온 그는 "쇠로 된 것이라면 뭐든지 만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그중 제일 난도 높은 건 칼. 두께 2~3㎝짜리 쇳덩이를 얇게 펴고 그라인더로 날을 가는 작업을 몇 차례 반복하는데 두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강씨는 칼을 잘 만드는 비결을 묻는 말에 "그냥 불로 달구고 망치로 치면 된다"고만 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요령 따윈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들 단호씨는 2005년 무렵부터 대장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건설사무소에서 일하다 잠시 가게 일을 돕는다는 게 어느새 12년 차 대장장이가 됐다. 단호씨는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 도와드리려고 시작한 일이 결국 평생 직업이 됐다"고 했다.

10년 넘게 대장간 일을 배웠지만 강영기씨는 아들을 향해 "아직 멀었다"고 했다. 쇠로 뭐든지 만들 수 있는 경지까지 가야 하는데 아직은 배운 걸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수준이라는 게 아버지의 평가였다. 단호씨는 "사람들이 우리 대장간 물건만 쓴다며 시골에 이사 가서도 우리 가게에 주문할 때 보람을 느낀다"며 "내 가게와 나만의 기술이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는 "기사에 '100년을 이어가는 대장간'이라고 소개될 때까지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버지 강영기씨는 아들의 말에 "어차피 다 제 것이 될 테니 그러지"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아무도 대장간 일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들이 아니었다면 대장간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라고 했다.

오후 7시 해가 지기 시작하자 경기 남양주시에 사는 단호씨가 짐을 챙겼다. 아버지는 아들이 가고도 한참 동안 가게를 지켰다. 대장간을 찾는 손님이 뜸해지고 풀무질을 멈춘 화로 안의 불길도 사그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