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蟲圖 300점, 사임당의 그림이란 확증 없다"
입력 : 2016.02.18 07:06 | 수정 : 2016.02.18 07:07
- 이원복 前 國博학예실장이 밝힌 신사임당 '초충도' 미스터리
"작품마다 화풍의 편차 심하고 전문화가보다 많은 遺作 미심쩍어
율곡이 쓴 글엔 산수·포도만 언급… 율곡학파 영향으로 인기 얻자 모작과 위작, 많이 양산됐을 것"
땅 위에는 잘 익은 수박 두 덩이가 자라고, 그 가운데 한 덩이를 쥐가 파먹고 있다. 위에선 활짝 핀 패랭이꽃을 향해 나비 두 마리가 날아든다. 섬세한 필선과 안정된 구도가 어우러진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수박과 들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충도(草蟲圖·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 10첩 병풍' 중 한 점으로 교과서에도 실렸다.
사임당 하면 풀과 벌레 그림이 연상될 정도로 '초충도'는 그녀의 대표작이다. 국내외에 300여점이 전한다. 사임당의 아들인 율곡 이이의 초상을 담은 5000원권 지폐 뒷면에 그녀의 '초충도'가 실렸을 정도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간송문화전 '화훼영모-자연을 품다'에는 '초충도 8폭 화첩'이 신사임당 이름을 걸고 전시 중이다.
사임당 하면 풀과 벌레 그림이 연상될 정도로 '초충도'는 그녀의 대표작이다. 국내외에 300여점이 전한다. 사임당의 아들인 율곡 이이의 초상을 담은 5000원권 지폐 뒷면에 그녀의 '초충도'가 실렸을 정도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간송문화전 '화훼영모-자연을 품다'에는 '초충도 8폭 화첩'이 신사임당 이름을 걸고 전시 중이다.
그런데 "사임당의 '초충도' 중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확증할 수 있는 작품은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 회화사 연구자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이원복(62)씨는 지난달 29일 열린 도광문화포럼(대표 이건무) 강연에서 "모두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혹은 '신사임당 풍의' 그림"이라고 말했다.
◇초충도 미스터리
사임당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했다. 조선 중기 '초충도'의 상당수가 사임당 작품으로 전해질 만큼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사임당은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린 화가는 아니었다. 더구나 불과 48세에 타계한 것을 감안하면, 평생 그림에만 전념했던 전문 화가들보다 남긴 작품이 훨씬 더 많다는 건 석연치 않다.
이 전 실장은 "초충도 문제는 회화사 연구자들 사이에선 공공연히 알려진 얘기"라며 "한 사람이 그렸다고 보기엔 화풍의 편차가 너무 크다"고 했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도 지난해 출간한 책 '간송미술 36'에서 "신사임당의 '초충도' 중 이론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증거를 지닌 기준작은 없다"고 썼다.
율곡은 사임당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서 이렇게 썼다. "7세 때부터 안견이 그린 것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지극히 신묘했다. 또 포도를 그리셨다. 모두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것들로, 그리신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사임당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문인 어숙권은 "산수와 포도 그림이 안견에 버금간다"고 평했다.
율곡은 사임당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서 이렇게 썼다. "7세 때부터 안견이 그린 것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지극히 신묘했다. 또 포도를 그리셨다. 모두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것들로, 그리신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사임당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문인 어숙권은 "산수와 포도 그림이 안견에 버금간다"고 평했다.
◇초충도 신화는 율곡학파 때문?
이상한 점은 이 기록들엔 신사임당의 특기로 알려진 초충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 이 전 실장은 "사임당의 '초충도' 신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17세기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영향"이라고 했다. 율곡학파의 3대 수장이었던 우암이 사임당의 '초충도'에 대해 쓴 글이 의미심장하다. "사람의 손으로 그렸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워 사람의 힘으로는 범할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율곡 선생을 낳으실 만하다."
백인산 실장은 "사임당의 '현모양처' 면모를 부각하기엔 산수보다는 초충이나 화조(花鳥)가 제격이었을 거다. 우암을 추종한 조선 후기의 율곡학파 문인들이 '초충도'를 신사임당의 대표 그림으로 여기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정신적 지주'인 율곡의 어머니 그림을 갖고 싶어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모작과 위작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수많은 초충도가 그녀의 이름을 빌려 양산됐을 것이란 얘기다. 사임당의 작품이라 확정할 수 있는 기준작이 없기 때문에, 판별하기 애매한 상태로 진작과 위작이 뭉뚱그려져 전해지는 것이다.
비교적 자세히 '소장 이력서'를 갖춘 것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초충도 10첩 병풍'. 초충도 8점과 2쪽의 묵서로 이뤄졌는데 "율곡과 동시대 인물인 이양원이 지녔던 것을 그의 후손으로부터 구입했다"는 신경(1696~1766)의 발문에 이어 1946년 위창 오세창이 '진작(眞作)'으로 단정한 글씨가 붙어 있다.
이상한 점은 이 기록들엔 신사임당의 특기로 알려진 초충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 이 전 실장은 "사임당의 '초충도' 신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17세기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영향"이라고 했다. 율곡학파의 3대 수장이었던 우암이 사임당의 '초충도'에 대해 쓴 글이 의미심장하다. "사람의 손으로 그렸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워 사람의 힘으로는 범할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율곡 선생을 낳으실 만하다."
백인산 실장은 "사임당의 '현모양처' 면모를 부각하기엔 산수보다는 초충이나 화조(花鳥)가 제격이었을 거다. 우암을 추종한 조선 후기의 율곡학파 문인들이 '초충도'를 신사임당의 대표 그림으로 여기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정신적 지주'인 율곡의 어머니 그림을 갖고 싶어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모작과 위작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수많은 초충도가 그녀의 이름을 빌려 양산됐을 것이란 얘기다. 사임당의 작품이라 확정할 수 있는 기준작이 없기 때문에, 판별하기 애매한 상태로 진작과 위작이 뭉뚱그려져 전해지는 것이다.
비교적 자세히 '소장 이력서'를 갖춘 것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초충도 10첩 병풍'. 초충도 8점과 2쪽의 묵서로 이뤄졌는데 "율곡과 동시대 인물인 이양원이 지녔던 것을 그의 후손으로부터 구입했다"는 신경(1696~1766)의 발문에 이어 1946년 위창 오세창이 '진작(眞作)'으로 단정한 글씨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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