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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과 미당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 31. 11:27

백석과 미당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아

 

입력 : 2016.01.28 03:00

백석 시집 '사슴', 서정주 동인지 '시인부락'… 올해 출간 80주년 맞아
분단시대 南엔 미당, 北엔 백석… 80년 전에 전통·근대 조화 모색
좋은 시는 해석 달라지며 거듭나

 

한국 시인들을 대상으로 문예지가 '가장 좋아하는 선배 시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두 시인이 늘 선두 다툼을 벌인다. 시인 백석(1912~1996)과 서정주(1915~ 2000)다. 그런데 두 시인의 삶에서 1936년이 매우 중요하다. 평북 정주 출신 백석은 첫 시집 '사슴'을 그해에 냈고, 전북 고창 출신 서정주는 시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둘 다 그전에 등단했지만, 올해야말로 그들의 문학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지 80주년이 된 셈이다.

최근 두 시인을 향한 논의가 묘하게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시사랑문화인협의회'(회장 최동호)의 문인 20여 명이 지난 주말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백석 문학 기행을 펼쳤다. 서울에선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가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이나 된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론'을 네이버 문화재단의 강연회에서 발표했다.

백석은 조선일보 중흥주 계초 방응모 선생의 장학금을 받아 1930~1934년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당시 일본 시를 지배한 이미지즘과 영문학의 모더니즘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때 쓴 시 '가키사키(枾崎)의 바다' 는 가난한 바닷가 마을을 평북 방언으로 쓸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국 풍경 속에서도 춥고 가난한 고향과 고독한 자아의 초상을 떠올린 것이다. 백석은 귀국한 뒤 조선의 북녘 지방 정서를 사투리로 노래한 시가 주류를 이룬 시집 '사슴'을 냈다. 문단에선 토속주의와 향토주의로 해석하기 쉬웠다. 그러나 시인·평론가 김기림은 남달리 백석의 근대성을 눈여겨봤다. '녹두빛 '더블부레스트'를 젖히고 한대(寒帶)의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한 청년의 풍채는 나로 하여금 때때로 그 주위를 몽파르나스로 환각시킨다.(중략) 백석의 시집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주책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조선일보 1936년 1월 29일)

백석은 냉전 시대에 월북 작가로 몰려 우리 곁을 떠났다가 1987년 납·월북 문인 해제 조치 이후 돌아왔다. 해금 직후엔 그의 시에 나오는 토속성과 민중성, 북방 정서가 주로 논의됐다. 그의 연애를 둘러싼 낭만적 해석도 끊이지 않았다. 이어선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음식을 연구한 책도 나왔다. 그러나 요즘엔 백석의 모더니티를 중시하는 해석도 나온다. 김기림이 80년 전에 알아본 모더니티가 다시 주목받는 셈이다. '시인 예이츠가 한국 시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한세정 시인은 "예이츠가 영국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의 민족정신을 지키려고 향토적인 시를 썼듯이, 영문학을 공부한 백석은 사라져가는 고향의 풍물을 근대적 감각으로 노래했다"고 풀이했다.

[박해현의 문학산책] 백석과 미당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아
/이철원 기자

 

시인은 시대 변화와 함께 새롭게 해석된다. 일부는 '과대평가됐다'며 추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뛰어난 시인일수록 새 해석을 거쳐 풍성한 의미의 영토를 확보한다. 올해 여든 살을 맞은 김우창 교수는 1976년 미당의 시집 해설을 쓴 뒤 40년 만에 방대한 미당론(論)을 새로 써냈다. 김우창 교수는 "미당 선생이 살아 계실 때 내가 잘 몰랐던 것을 지금에서야 다시 생각하게 된다"며 "미당은 그냥 감각이 아니라 일관된 생각을 하면서 평생 추구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한국인의 현실에 대한 일관된 탐구'였다고 한다. 김 교수는 미당의 시를 흔히 토속주의와 허무주의, 초월주의로만 해석하는 기존 시각에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김 교수는 "미당이 개인적 고뇌에 깊이 빠져 현실을 더 크게 보지 않은 적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김 교수가 다시 읽어보니 "미당은 한국인의 현실 문제를 놓고 늘 고뇌했기에 허무와 초월 어느 쪽에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당은 초기에 당시 젊은 문인들이 그랬듯이 유교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유교적 금욕주의에 저항해 서구적 관능주의를 내세운 시집 '화사집'을 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집에서 토속성과 모더니티의 조화를 이루며 한국 시에 새 지평을 열었다. 그 이후 미당은 본격적으로 무속과 불교에 심취했지만 퇴행적 복고주의를 노래한 게 아니었다. 그는 '삼국유사'의 설화를 새롭게 해석해 신라를 한국적 정신의 이상향으로 그린 신화적 상상력을 펼쳤다. 전통문화를 재해석해 남북한의 근대 국가론을 넘어 선 상상의 공동체를 시인답게 자유분방하게 꿈꾸었다.

백석과 미당은 뛰어난 평론을 낳게 하는 뛰어난 시인들이다. 그들의 시는 마르지 않는 문학의 샘과 같다. 1936년에 나란히 문학적으로 개화(開花)한 두 시인이 올해 똑같이 재조명되다니, 문학의 샘물이 더 달콤한 맛을 풍기는 듯하다. 올해 내내 샘물 곁에 숱한 문인들이 모여 더 풍성한 대화가 이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