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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 28. 21:37

핑계

이원화

 

 

오전 7시 30분.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여 학교에 보내고, 대충 그릇을 치운 후 민주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은 후 하얀색 블라우스에 검정색 스커트를 받쳐 입었다. 민주는 화장품 뚜껑을 열다가 용량을 다시 확인 했다. 30ml. 민주의 주먹만 한 화장품 케이스는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파랑색으로 민주가 좋아하는 색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케이스의 색깔 때문에 화장품을 구입한건 아니지만, 화장품을 볼 때마다 색깔이 예뻐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화장품 회사에서는 케이스의 색깔도 중요 판매 포인트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화장품 케이스에 색깔이 있고, 흰색부터 다양한 색깔이 있지만 어두운 색보다는 밝은 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해외여행이라는 걸 하면서 면세점에서 샀던 화장품이다. 딸깍 소리가 나며 열리는 화장품 케이스는 색깔도 예쁠 뿐만 아니라 열릴 때의 느낌도 좋았다. 비싼 만큼 케이스 디자인에도 감성을 살린 화장품 케이스는 이중으로 되어 있다. 케이스의 전체 크기는 주먹만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용기에 화장품이 들어 있다. 화장품 뚜껑을 열 때마다 속은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적은 용량의 화장품 때문에. 30ml. 처음부터 30ml라는 걸 모르고 산 것도 아니다. 단지 케이스의 크기를 보며, 30ml라는 걸 순간 잊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화장품 회사의 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략. 이기기 위한 방법. 사는 일이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듯한 느낌이다. 집게손가락을 넣어 조심스레 크림을 찍어 내면서 남은 양을 가늠해 본다. 두 번쯤 더 바를 수 있을까. 두 번. 한꺼번에 좀 더 많이 바르면 한 번에 끝날 것이다. 처음 뚜껑을 열었을 때의 설렘은 이미 사라졌고, 이젠 새로운 화장품을 사야할 때가 왔다.

오전 8시 30분.

이십여 명의 책상이 즐비한 사무실은 오늘도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출근하는 사원들의 기분을 밝게 하기 위한 회사의 방침이다. 서비스업이다. 고객을 만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원들이 곧 회사의 얼굴이기도 하다. 총무가 아침회의에 들어가 있을 시간. 사무실엔 영화만 있다. 민주는 습관처럼 사무실을 둘러본다. 아침부터 영화의 얼굴이 발그레 하다. 영화가 콧노래를 부르며 민주를 부른다.

민주는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고 고객관리 화면을 열었다.

“언니, 언니. 이것 봐요. 뭔지 알죠? 이거, 명품이야.”

출근하는 민주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영화가 다짜고짜 백을 어깨에 메면서, 민주를 향해 웃는다. 가방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로고가 새겨져 있다. 아니 가방 자체가 로고이다. 누가 봐도 루이비통이구나. 알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디자인. 오히려 너무 흔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게 되는 가방 디자인. 아침마다 회사의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민주는 늘 사람들의 옷차림과 가방을 눈여겨보았다. 아줌마들이 마치 가방 전시회를 여는 듯 보이기도 했다. 각종 로고가 달린, 번쩍번쩍 광이 나는 가방. 번쩍이는 가방을 손에 들거나 메고 오는 아줌마들의 옷차림은 언제나 눈에 띄었다. 회사건물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어디에서 보아도 아, 보험회사 직원이네, 싶을 만큼 눈에 띄는 정장차림을 하고 있다.

“어머. 루이비똥이네. 그래. 어디서 났어? 커피 한 잔 줄까? 마실래?”

통이 아닌 똥. 민주의 발음을 혼자 신이 난 영화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영화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 오늘도 남자친구 자랑을 하려는 것이겠지. 영화의 장단에 맞장구라도 쳐주어야 할 것 같다.

민주가 종이컵에 커피 두 잔을 타왔다.

“어디서 나긴요, 남자친구가 사줬지. 내가 내 돈 주고 사겠어요?”

늘 고민 없이 사는 듯 보이는 영화가 부럽다. 진짜든 가짜든 사주기라도 하는 그 남자친구도. 남편도 있고 두 아이를 키우는 영화는 남자 친구도 여러 명이다. 왠지 새로운 남자가 생긴 건 아닐까 싶다.

보험회사에 영화를 데려온 게 민주다. 영화를 증원하면서 매니저와 과장도 애를 많이 썼다. 경력직이기도 한 영화가 옮겨 다닌 회사만 해도 여러 개다. 여기에 정착을 할 수나 있을까, 늘 불안불안하다. 영화를 증원하면서 매니저가 투자한 돈 만도 천만 원이 넘는다. 벌써 몇 개의 보험사를 옮겼다는 것을 알지만, 영화를 데려오기 위해 과장까지 나서야 했던 건 머릿수가 곧 영업전략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나 평균적 업적이 있다. 영업소의 업적을 채우기 위해 머릿수가 필요하다. 회사는 운영비 등 사업소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실적과 머릿수의 합으로 계산해서 지급한다. 영업소별 부익부빈익빈이 운영비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과장은 과장대로 사원들에게 증원과 실적을 강요하는 것이다.

매니저는 자신의 계약 없이 전체 머릿수의 평균 업적률을 급여로 받는 사람이고, 신규 사원이 늘지 않으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비를 들여서라도 사람을 데려온다. 어차피 한 사람 늘어나면 계속해서 업적률이 늘어나리란 계산 때문이다. 매니저는 지난 달 자신의 급여 외에 따로 수당을 천만 원이나 받았다. 물론 민주도 수당을 따로 받았다. 영화의 업적에 비례한 수당을. 해외여행의 부상까지.

“그래. 좋겠네. 근데 그거 진짜야?”

기어이 비수를 찌르고 말았다. 그냥 좋아 보인다고, 예쁘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무엇 때문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기어이 확인이 필요한가. 민주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영화가 만나는 남자가 누구든 민주가 관여할 사항은 못 된다는 것이 민주의 생각이기도 했다. 사생활이니까.

“언니느은,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어때. 내가 맸으니 가짜도 진짜가 되는 거지. 남들이 뭐라던 내가 좋으면 그만 아냐?”

내가 좋으면 그만 아니냐는 말 속에 가짜라는 말이 들어있는 것 같다. 하긴 진짜가 뭘까. 진짜가 있기나 할까. 진짜. 진짜. 이 달 영업 목표에나 진짜가 있을까. 영화에게는 모든 남자들도 다 같은 것 같았다. 남편을 두고도 여러 명의 남자를 만나지만 늘 당당했다. 자동차를 사준 남자, 옷을 사 주는 남자. 매월 입금을 하는 남자. 여러 명의 남자들이 한결같이 영화에게 매달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오전 9시.

조회시간은 지루했다. 각자 자신의 목표를 다시 확인하고 목표달성에 매진하라는 영업과장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과장은 목표를 위해, 계획을 세우라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어제도 그제도 들었던 말이다. 민주는 자신의 목표를 곱씹었다. 목표. 대체 저 목표라는 괴물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목표라는 괴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계획을 세웠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이 목표로 쉽게 이어졌던가.

앞에서 목청을 높이던 과장이 소리쳤다. 정신 차리세요, 정신. 마치 민주를 향해 소리치는 듯하다. 김민주 씨. 라고 하지 않은 것만도 배려인지 모르겠다. 민주는 아침부터 혼자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딱히 누구에겐지 알 수 없는 짜증을.

케이스는 주먹만 한데 용량은 30ml인 화장품 때문인지, 영화의 짝퉁 가방 때문인지, 목표를 향해 달리라는 과장의 압력 때문인지, 그 목표달성이 어렵다는 걸 이미 아는 자신 때문인지.

오전 10시.

민주는 다시 컴퓨터의 고객관리 화면을 열었다. 민주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콜센터에 전화한 고객들의 명단이 뜬다. 약관 대출을 받거나, 계약 문의를 하거나, 보험료 납입 통장을 변경했거나, 말없이 계약을 해지 해버린 고객들의 명단. 고객들이 콜센터에 전화한 내용들이 음성녹음과 기록으로 남는다. 민주에겐 관리대상 확인 기록으로 컴퓨터 화면에 뜬다. 민주는 고객들에게 전화를 하고, 그 기록을 다시 컴퓨터에 저장했다. 고객들이 민원을 제기했을 때 고객관리 기록이 민원 사항과 대치될 수 있으므로 늘 신중하게 기록을 남겼다.

오전 11시.

벌써 11시다. 출근 후 조회, 그리고 고객들과의 통화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버린다. 민주는 오늘 스케줄을 다시 점검했다. 영화는 다른 사원들에게 가방을 자랑하는 중이다. 영화가 자료집을 들고 나오는 민주를 보더니 언니, 같이 나가요. 하며 민주를 부른다. 민주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옆 사무실의 사원들과 인사를 한다. 같은 층에 지점이 있기 때문에 5층은 외부 사람들도 많이 드나든다. 만기보험금을 찾으러 오거나 보험금을 청구하거나, 해약을 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보험가입 전 건강진단을 받으러 오는 고객들도 있다.

영화의 표정이 밝다.

“방문 가는 거니? 어디로 가?”

“응. 언니, 오빠가 하나 하기로 했어. 이따 오후에 봐요. 언니. 저녁에 오빠들이랑 식사할 건데 언니는 시간 어때? 오빠가 언니 보고 싶대요.”

민주의 팔에 곧 안길 듯 몸을 기대며, 새벽이슬 흐르는 듯 물기 흘러 넘치는 영화의 목소리에서 생기가 돈다.

영화의 전화벨이 울린다. 번호를 확인한 순간 몸을 꼬듯 영화의 얼굴표정에 애교가 넘친다.

“오빠, 언니들이 가방 정말 예쁘대. 응. 곧 가요. 나왔어요. 주차장.”

코맹맹이 소리로 전화를 받던 영화가 전화를 끊자 민주가 물었다.

“그럼 오늘 마감 치는 거야? 지난번에 사업한다던 그 분 아냐?”

“언니는,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그 오빠 말고, 다른 오빠야.”

마치 민주를 나무라듯 표정하나 안 바꾸고 다른 오빠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영화가 어이없다. 영화가 식사를 하자고 해 나갔다가 한 번 만난 사람이 있었다. 사업을 한다던가. 남자는 한사코 영화에게 뭐든 다 해주고 싶다고. 영화가 너무 좋다고, 영화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근데 나를 왜? 나를 어떻게 알고?”

“아마도. 이런 맛에 보험회사 다니는 거 아니겠어? 언니. 그리고 내가 잘 돼야 언니도 좋잖아.”

영화는 자신의 업적을 환산해 민주에게도 수당이 지급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글쎄. 나는 잘 알지도 못하잖아.”

“내가 언니 얘기 했거든. 나 많이 도와준다고. 그래서 오빠가 언니 챙겨주고 싶은가 봐.”

민주는 그 자리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무엇보다 영화의 물기 줄줄 흐르는 저 목소리와 몸짓이 싫었다. 지하 3층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 영화의 차가 있다. 얼마 전에 오빠가 사주면서 영화 명의로 자동차종합보험에 가입하고 등록까지 깔끔하게 마쳐서 영화에게 건네줬다는 자동차. 영화가 자동차를 향해 버튼을 누르자 자동으로 시동이 걸렸다.

“응. 저녁에 시간 봐서. 그런데 아무래도 좀 어렵지 싶네. 시간이.”

“언니. 뭐든 언니하기 나름이야. 마음을 열어. 언니, 지금 힘들잖아. 오빠가 소개도 하겠대. 뭐든 언니가 원하면 이루어지는 거야. 언니.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지 언니도 알지?”

민주에게 한쪽 눈을 찡긋, 윙크를 하며 차에 오르는 영화의 긴 웨이브머리카락과 짧은 치마가 민주의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음을 열어, 언니. 원하면 이루어지는 거야, 언니. 영화가 꼬박꼬박 언니라고 부르면서 민주를 나무라는 것 같다. 보험료를 낼 수 있는 새로운 고객을 발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는 영화와 함께 저녁시간에 오빠라고 불러주길 원하는 남자를 소개 받고 싶지 않았다.

민주는 오늘 김 사장과의 약속이 있다. 오늘 청약서에 싸인을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점심을 함께 하고 오리라. 김 사장의 입장에서야 특별히 민주를 기다릴 이유는 없지만, 민주의 입장에서 김 사장은 큰 고객이다. 이번 달 목표 달성도 김 사장의 싸인 여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오늘 월초 마감이다. 지난 월말에 가입을 할듯 말듯 민주를 애태우던 김 사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늘은 부인의 좌판으로 가 보는 것이 나을라나. 아무래도 김 사장이 선뜻 가입을 하지 않는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좌판을 가지고 있는 김 사장은 중국에서 수산물을 수입해 오는 유통업자의 중간 도매상이기도 했다. 직접 수입을 하지는 않지만, 중간 유통업자로서 시장 내에서 역량도 가지고 있었다. 시장에 나오는 수산물들이 김 사장의 손을 거쳐 점포에 깔리는 것이다. 유통 과정에서 중국산 수산물을 국산으로 둔갑시켜 원산지를 속이기도 하고, 말린 해삼을 가성소다, 즉 양잿물에 넣어 두 배, 세 배로 불려 중량을 늘려 판매하기도 한다. 가짜 냉동조기, 물 먹은 낙지 등 수산물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민주는 괜히 혼자 불안했다. 원산지를 속이기 위해 상표를 바꾸는 상표갈이, 포대갈이가 왠지 김 사장과도 관련이 있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물 먹은 낙지라고 들어 보셨소이. 물 먹인 소라는 말은 많이 들어 봤제? 살아있는 소 입 속에 호스를 넣고 물을 먹여 소를 도살하면 물 먹인 소제. 그런데 물 먹은 낙지는 뭔지 아요? 낙지란 놈은 원래 바다, 즉 짠물에서 사는 것이 낙지제. 그란디 그 낙지를 잡아다가 민물에 넣어부러. 그럼 어찌 되겄소. 낙지가 살라고 발버둥 치면서 오히려 물을 더 많이 먹게 돼. 바닷물이 아닌 민물이다 보니 삼투압현상으로 낙지 피부가 갑자기 탱탱하게 불어나. 두 배. 세 배까지도 낙지가 커져. 그런 낙지를 급속 냉동하는 것이제. 보기에는 크고 좋제. 냉동상태로 수입하니깐, 알 방법이 없어. 끓여보믄 알제. 피부가 늘어져서 푸석푸석하고 질기면서 맛이 없어져. 낙지 세포조직이 이미 파괴된 것이제. 크고 무게 많이 나가면서 싼놈 좋아하니 단가를 맞추려고 하는 짓이제.”

김 사장은 민주가 왜 왔는지 알면서도 한참동안 엉뚱한 소리만 했다. 시중에 유통되는 물 먹은 낙지의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 수출업체들이 불법으로 한국에 수출한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다. 바다에서 잡아올린 낙지를 바로 민물에 담가놓으면 물을 잔뜩 먹고 퉁퉁 불어 부피가 증가한다. 이때 다시 수송을 위해 낙지를 냉동하면, 물이 얼음으로 변하면서 또 부피가 증가한다. 얼음결정이 세포조직을 또 손상시키고 낙지는 낙지 고유의 말랑말랑, 쫀득한 느낌을 잃어버리고 질겨지면서 맛이 없어진다. 한번 손상된 세포조직은 회복이 안 된다. 상황이 변해도.

시장 바닥에 물기가 흐른다. 생선을 놓은 얼음에서 흐르는 물이기도 하고, 해산물이 싱싱해 보이도록 물을 끼얹기 때문이기도 하다. 싱싱해 보이도록 하기 위해 해산물을 얼음에 올리고, 자꾸만 뒤집어가며 물을 끼얹는 상인들의 손길이 바쁘다. 좌판에 낙지가 즐비하게 놓여 있다. 낙지머리에 철사를 꿰어 한 묶음으로 파는 낙지가 마치 키 재기를 하듯 얼음 위에 가지런하다. 낙지가 고유의 빛깔인 연한 갈색의 빛을 띠지 않고 희멀건한 색깔을 띠고 있다. 해산물마다 이름표를 달고 있다. 품명 낙지. 수입산. 박스를 뜯어서 대충 써 붙인 이름표들이 즐비하다. 가로 14cm×세로 10cm 이상 규격 크기의 흉내나마 내고 있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물 먹은 낙지라는 말은 없다.

민주는 김 사장과 점심을 함께 먹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오늘도 김 사장에게 계약서 싸인을 받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자꾸만 점심을 먹고 가라고 김 사장이 잡았지만, 민주는 낙지를 한 꾸러미 사서 들고 일어섰다. 김 사장의 머릿속에 딴 생각이 있는 한 계약이 어렵겠다 싶다.

민주는 시장 바닥의 물이 옷에 튀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음을 옮겼다. 구두 뒷굽에서 튀어오른 물이 스타킹에 튀면 얼룩뿐만 아니라 냄새까지 밸 수 있기 때문이다. 왼손에는 컴퓨터와 서류를, 오른손에는 낙지를 들고 하천변에 주차한 자동차를 향해 가는 민주의 발걸음이 무겁다. 영업을 한 지 오년이 넘었지만,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시작이다. 점심은 사무실에 가서 먹어야 할 것 같다.

12시 30분.

사무실에 들어서니 모두들 영업을 나갔는지 조용하다. 영화도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어느새 민주를 본 매니저가 인사를 하며 민주를 부른다.

“민주 씨, 오늘 점심 같이 할까? 시간 어때요?”

민주가 괜찮다고 하자, 매니저가 핸드폰과 지갑을 들고 나와 문 앞에서 민주를 기다렸다. 민주는 자리에 가방을 놓고 핸드폰과 지갑만을 들고 나왔다.

거리에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삼삼오오 사람들의 대열이 이어진다. 점심을 먹기 위해 나온 저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는 듯싶다. 민주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사무실 앞 낙지천국에 자리를 잡은 매니저가 민주의 자리에 방석을 깔아주며 친근하게 웃는다. 사람을 편안하게 대하는 것이 매니저의 장점이기도 하다. 매니저가 낙지볶음을 주문한다. 민주는 볶음보다 무침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매니저가 민주를 부른건 김 사장에게 거절당하고 돌아와 어두운 민주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영화 때문일까. 경력사원이라 하더라도 회사에 새로 입사한 사원은 정해진 목표가 있었다. 최소 6개월은 정해진 목표를 채워야만 했다. 물론 기본급으로 지급되는 급여 역시 영업실적에 따라 지급되니, 반드시 목표달성을 안 해도 상관없겠지만, 그러면 다음 달 급여가 적기 때문에 탈락률이 높아지고, 사원 정착률이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6개월은 기본적으로 관리대상이다.

“사실은 영화 씨 보증보험 증권 때문에 보자고 했어요.”

“보증보험 증권이라뇨? 지난달에 이미 해결된 거 아니었어요?”

영화는 신용불량자였다. 민주는 모르고 있었다. 회사를 옮기고 싶다는 영화의 말을 듣고 매니저와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했다. 보험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한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가 신용불량자일건 생각도 못했다. 경력사원으로 오려면 실적확인서나 급여명세서가 필요했지만, 영화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서류를 가져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꼭 경력사원으로 오겠다고 했다. 근무하던 회사에 사직서를 우편으로 날리고, 코드신청을 할 때까지도 자신이 신용불량자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보험회사에서 일을 하려면 회사를 통해 금융감독원에서 부여한 코드번호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보험회사도 금융업이다. 그런데 금융업 종사자인 영화가 신용불량자라니. 보험회사에 근무하려면 누구나 코드번호를 받아야 하고, 보증보험 증권을 끊어야 했다. 보험 청약철회 기간이 15일인데 반해, 보험 품질보증 기간은 3개월이다. 보험에 가입한 고객이 청약을 철회할 수 있는 기간은 15일로 짧기 때문에 다음달 20일 경에 지급되는 급여에서 청약철회 된 수당은 공제하고 지급할 수 있지만, 일부 사원들은 품질보증 기간 3개월을 이용해 3개월 동안 수당 다 받고 나서 고객들을 이용하여, 품질보증을 내세워 보험료를 환불 받고 회사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먹튀라 부르는데, 회사에서는 먹튀를 막기 위해 보증보험 증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차적 판매책임을 보증보험으로 간편하게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다. 보험회사는 이미 지급한 수당을 돌려 받기 위해 보증보험 회사에 배상을 청구하여 실질적 손해를 방지한다. 보증보험 회사에서는 사원 개인에게 구상권을 행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손실을 막는다.

“보증보험 증권을 끊을 수 없어서, 남편이 보증을 선다고 하더니, 그나마도 말이 없고, 아무래도 계속 가족들 계약이 들어오는 것 같아서, 좀 불안해서 그래요. 민주 씨가 좀 알아봐 줄래요?”

“저도 요즘 계약이 잘 안돼서 힘든데……. 설마 영화가 그러겠어요? 경력도 있고.”

매니저는 자신과 영화 사이의 돈 거래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민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의심했다. 설마. 영화의 계약이 전부 가족 계약이라면 걱정스럽기도 했다. 보험회사에 처음 입사했다면 가족 계약이 전부라 해도 믿을 수 있으나, 경력사원이 가족 계약이 전부라고? 그리고 경력이 있으니, 보험회사의 생리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매니저에게 가져간 돈만도 벌써 천만 원이 넘었다. 고객들의 계약은 보증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다지만, 아니다. 영화는 보증보험 증권도 없다. 더 중요한 건 영화가 먹튀일 경우 매니저의 돈은 어디서도 받을 길이 없다. 사원에게 지급하는 돈 자체가 이미 불법이니까. 증원에 성공 했지만, 증원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명목으로 돈을 주고 지원을 하지만, 발을 잘라내고 먹물을 튀기며 도망가는 낙지처럼 어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바다는 계속 오염되고, 갯벌이나 얕은 바다 속에서 사는 야행성 낙지는 갈수록 개체수가 줄어 가격은 언제나 고공 행진을 계속한다. 자신이 불리하다 싶으면 발 하나 잘라내고, 먹물을 쏘면서 도망가는 낙지지만 새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낙지. 뻘 속에 집을 짓고 알을 낳은 낙지는 먹이도 먹지 않고 부채질을 하듯 계속 몸을 흔들어 마침내 알이 부화되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 굶어죽는 것이다. 현대의 기술로 인공수정과 부화까지는 성공을 했으나, 양식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낙지를 인공부화 하면 같이 태어나, 종이 같은 낙지가 서로를 잡아먹는 공식 현상 때문이다.

몇 가지 밑반찬이 나오고 낙지볶음이 나왔다. 국물이 흥건하다. 볶음이니 불판에서 국물이 좀더 줄어들 때까지 불을 켜고 있으면 되겠지만, 낙지는 살짝 익혀야 질겨지지 않는다.

민주가 어렸을 적에 엄마는 주전자를 들고 뻘밭에 나가 낙지를 잡아오곤 했다. 엄마는 잡아온 낙지 몸통을 잡고 흡반吸盤의 뻘을 쭉 훑어 씻은 다음 탕탕 썰어 민주의 입에 넣어주곤 했다. 쫀득쫀득 사각거리는 낙지의 맛이 아직도 민주의 혀끝에 남아 있었다.

민주는 낙지볶음을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얘기해 볼 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영화 씨가 얘기 했나 모르겠는데, 사실은 지금 영화 씨 급여가 30퍼센트만 지급되고 있어요. 보증보험 증권이 없기 때문에 회사에서 만일을 대비해 급여를 압류하고 있는 상황이죠. 그래서 아마 생활도 많이 힘든 것 같아요. 언제든 영화 씨가 증권을 가져오면 미지급분은 한꺼번에 지급될 거예요. 그냥 회사에 저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죠.”

민주는 깜짝 놀랐다. 급여가 30퍼센트만 지급 된다면 영화는 지금 급여가 얼마란 말인가. 전에 남편이 실업자라 했던 것 같은데. 그럼 영화는 지금 급여가 아닌 다른 돈으로 먹고 살고 있다는 말인가. 설마. 영화가 말하는 오빠들이! 민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민주의 전화벨이 울린다. 보람이 엄마다. 민주는 순간 보람이 엄마의 계약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예, 보람이 엄마. 무슨 일이에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계약사항이랑 뭐 그런 것 좀 알 수 없을까요?”

“그래요. 마음이 많이 아프겠네요. 장례식장은 어디에요?”

민주는 보람엄마의 마음을 다독이며 조문을 위해 장례식장을 물었다. 형제자매가 여러 명이니 가보면 상황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망자 대부분이 한두 개의 보험에는 가입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기본 동산이나 부동산 외에 보험금 확인도 꼭 필요하다. 죽은 자 뒤에 재산상속의 절차가 남으니까. 계약사항을 물어오는 것을 보니 좀 걱정스럽기도 하다. 민주회사에 가입한 계약이야 민주가 알 수 있다하더라도 다른 보험회사에 가입한 내역은 상속인금융거래조회서비스를 이용하면 될 것이다. 민주는 필요한 서류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오후 3시.

민주는 서류 목록을 가지고 장례식장을 방문하였다. 상주들이 아직 상복도 입지 않은 장례식장은 연락이 많이 안 된 때문인지 한산했다.

가족들이 모여 장례절차를 의논하고 있는 듯했다. 민주는 고인에게 목례를 하고, 상주들과 인사를 나눈 후 보람 엄마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보람 엄마가 민주를 가족들에게 소개했고 민주는 상속인금융거래조회서비스 이용을 위한 서류 목록과 보험금 수령을 위한 청구 서류 목록을 전했다. 누군가 상속인 대표를 지정하여, 보험금청구를 하면 더 편리할 거란 얘기도 덧붙였다.

간단한 음식이 몇 가지 나오고, 음료가 나왔다. 누군가 상조에 가입 한 듯 상조라고 쓰인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신발을 정리하고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차일을 치고 마치 잔치를 치르듯 장례를 치르던 광경은 이제 책 속에서나 보는 광경일 듯싶다.

시골에서 일가친척들이 오고 있는 중인가 보다. 상가에 들어서며 곡을 하는 할머니.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는 할머니들의 정경 속에 자신들의 회한과 애정이 들어있기도 했다.

민주는 어렸을 적 친구 아버지가 오랜 지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누군가 하던 곡이 생각났다. 해거름에 상가에 나타난 할머니는 곡을 하며 대문에 들어서더니 마당을 가로질러 방에 들어가 병풍 뒤의 관을 붙들고 계속 곡을 했다.

“아이고, 우리 동상, 이것이 먼 일인가. 살아 있으면, 건너 방죽 논도 주고, 어장도 줄 것인디. 동상 어째 죽었는가. 이것이 먼 일이당가. 자네 없이 나는 어찌 산단 말인가. 아이고, 아이고.”

언제든 장례식에 가면 그 때의 장면이 그림처럼 나타나곤 했다. 왜 죽고 나니 다 줄 것처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순간에, 살아있는 동안에 잘 하지.

언젠가 그 친구를 만나 그렇게 운 사람이 누군가 물었을 때 친구가 픽 웃었다.

“그래? 그렇게 울었어? 한 사람 밖에 없어. 우리 고모.”

“그럼 아버지 돌아가시고 좀 도움을 주기는 했니.”

“뭔 소리야. 빚잔치하고 나니 당장 먹을 것도 없었는데. 글쎄 고모가 뭘 도와줬던 기억은 없네. 내가 학교 포기하고 동생들 돌보고 엄마가 고생했지.”

“그런 면에서 보험은 아주 훌륭하지? 사망으로 인해 빚어지는 가족붕괴를 일정부분 보호하는 거잖아? 너도 아버지 보험금이라도 있었으면 니네 엄마도 너도 고생을 덜 하지 않았겠어?”

“그래. 아주 훌륭하시네. 근데 보험이 공짜냐? 매월 매월 꼬박꼬박 돈을 내야지. 꼬박꼬박 돈 내다가 실효라도 되면 그날로 보장 꽝이잖아.”

친구와 장난처럼 얘기하고 말았지만, 보험은 꼭 필요하다. 수입이 끊겨도 생계에 지장이 없는 부자에게는 보험이 필요없다. 진짜로 보험이 필요한 사람들은 일반 서민들이다. 매월 매월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에게 보험은 꼭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민주는 사람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 돈. 죽으면서까지도 필요한 돈. 마치 사람들이 돈을 향해 죽도록 달리기를 하다가 그 힘에 겨워 꼴깍 숨이 넘어가는 것 같다.

오후 5시.

귀소 시간이다. 10시 이후 자유로운 활동을 하다가 5시 귀소하여, 일과를 정리하는 시간. 오늘 마감 날이기 때문인지 사무실이 북적인다. 매니저가 간식을 준비했는지, 사무실 한 켠 원탁에 김밥, 튀김 등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영화도 있다. 보험계약 접수를 마쳤는지 더 밝은 표정이다.

영화가 민주를 보고 반색을 한다. 영화의 긴 머리 웨이브가 살짝 바뀐 듯 싶기도 하다. 영화는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갈라 민주의 손에 쥐어 주더니, 김밥을 집어 민주의 입에 넣어준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교 만점 영화.

“오늘 마감 쳤니?”

민주는 매니저가 얘기 했던 영화의 계약이 신경 쓰여 물었다.

“응. 마감 했지. 언니. 오빠가 하나 했어. 오빠가 소개도 하겠대.”

영화가 민주의 귀에 대고 웃으며 속삭였다. 민주는 매니저가 했던 얘기들을 꿀컥 삼켰다. 아무도 없을 때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민주의 계약은 없다. 팀별, 영업소별 목표 계획을 민주 때문에 달성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라 계약이라도 하나 긁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민주는 자신의 보험금이 얼마일까 생각해 보았다. 각각의 경우가 다르지만 어쩌면 살아서 버는 돈보다 죽어서 버는 돈이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아직 2차 마감도 있으니 오늘은 그냥 눈 감고 지나가야겠다. 일지를 쓰고 사무실을 나오는 민주를 영화가 불렀다.

“언니. 식사하고 가요. 간단하게 식사만 하고 일어서면 되잖아. 언니.”

“애들한테 지금 집에 간다고 전화했어. 남편도 늦는대.”

“아이. 언니도 참. 애들 다 컸잖아.”

그 때 영화의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그렇지만 가끔 저장이 안된 번호로 전화를 하는 고객들도 있기 때문에 영화는 의심없이 전화를 받았다. 민주는 영화의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서 있다.

“여보세요? 이영화 씨 맞습니까?”

처음 들어보는 듯한 목소리의 남자가 거침없이 묻는다.

“네, 전데요. 누구세요?”

“아, 여기 경찰서입니다. 김보미 씨가 따님 맞습니까?”

경찰서라는 말에 영화가 다시 묻는다.

“경찰서라구요? 근데 우리 딸은 왜 찾으세요?”

“아무튼 경찰서에 좀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청소년 성매매특별법 단속으로 김보미 씨가 지금 경찰서에 있습니다. 김보미 씨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전화드린 겁니다. 몇 시까지 오시겠습니까?”

묻고 있는 듯 들리지만, 경찰관은 빨리 오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찰관이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딸이 경찰서에 있다는데, 지체할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영화는 경찰서라는 말에 놀라 성매매특별법이라는 말은 순간 잊고 있었다. 공부만 아는 보미가 경찰서에 있다니.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보미는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다. 영화는 기가 막혔다. 중간고사를 준비하며 짬짬이 컴퓨터를 하면서 머리를 식히는 보미가 경찰서에 있다니. 더구나 독서실에 있어야 할 보미가. 영화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고생하는지 보미는 알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영화에게 자식들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영화는 남들이 뭐라던 상관없었다. 보미를 위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보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보미가 얼마나 착한 딸인데. 경찰서에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남편과 함께 가야 할까? 영화는 남편보다 성철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성철이 더 힘이 있을 것이다. 무슨 일로 경찰서에 있는지 모르지만, 보미를 빨리 데려 오려면 남편보다 성철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다. 영화는 급히 성철의 번호를 누른다.

“오빠, 뭐해? 경찰서로 좀 와 줘요. 우리 딸이 경찰서에 있다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빨리 와 줘요.”

“경찰서? 우리 식사 약속 했잖아. 친구들이랑 기다리고 있을게 끝나고 와. 뭐 별일 아니겠지.”

언제든 영화가 전화를 하면 한 번도 바쁘다거나 거절을 하지 않았던 성철이었다. 영화는 경찰서에 있는 보미보다 성철의 거절이 더 당황스러웠다. 옆에 있던 민주가 영화를 따라 나섰다. 영화 혼자 경찰서에 가게 하기가 어려웠다. 민주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다시 전화를 해 급한 일이 생겼다고, 먼저 식사를 하라고 했다.

오후 7시.

민주의 차를 타고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하는 영화가 사고라도 낼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보미야. 보미야. 보미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설마. 아니지? 너는 아니지? 언니. 아니겠지. 이건 뭔가 착오가 있기 때문일 거야. 보미가 그럴 리 없어. 진짜야 언니. 보미처럼 착한 애는 없단 말이야. 영화는 차 안에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민주가 차를 세우기 무섭게 영화가 경찰서로 뛰어 들어갔다. 경찰서에 들어서는 엄마를 본 보미가 고개를 숙였다. 영화가 보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보미야. 무슨 일이니? 네가 왜 여꺊藪?있어?”

보미를 향해 달려드는 영화를 제지한건 형사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영화 씬가요? 김보미 씨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영화의 신분증을 확인한 형사는 영화와 보미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김보미 씨가 미성년자 성매매 알선혐의와 성매매특별법 위반으로 검거되었습니다. 인터넷에 싸이트를 개설하고 아예 성매매를 했어요. 나이도 어린데……. 세상 무서운걸 모르는 건지, 배짱이 좋은 건지, 참내.”

형사는 인상을 쓰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치 느물느물 웃는 느낌도 들었다. 민주는 형사의 표정에서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들었고, 영화는 절망감이 들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를 위해서 내가 안 한 일이 없는데. 보미야. 응? 보미야. 이건 아니지? 거짓말이지? 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거니. 지금 중간고사 기간이잖아.”

앞뒤 없는 영화의 말이 쏟아지는데, 멀뚱하게 앉아있던 보미가 말했다.

“아빠는? 아빠는 안 와?”

영화는 보미가 심문을 받으며 조서를 작성하는 동안 계속 울었다. 민주는 영화가 딸의 일을 제일 먼저 남편에게 연락해야 할 것 같은데, 울면서도 남편에게는 왜 연락을 안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영화에게 남편은 어떤 의미일까.

형사는 영화에게 내일 보미를 다시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민주는 경찰서를 나와 영화 모녀를 회사 주차장에 내려주고 나왔다. 영화의 울음소리가 계속 민주를 따라오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거리엔 차들이 한산했다. 늦은 시간 때문이겠지. 다들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갔을까. 집은 편안한 걸까? 이 시간에도 거리에 있는 저들은 무엇을 하는 걸까. 모두들 어디로 가는 걸까. 저들에게는 걱정이 없을까. 오늘 하루를 살아내면서 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민주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밤 12시.

남편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들을 재우고 설거지를 하는데 딩동, 민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무래도 회사에 못 다니겠어. 미안, 언니.”

영화의 문자였다. 아침에 나간 남편은 어디에 있는 걸까. 민주는 핸드폰 단축번호 1번을 길게 눌렀다.

이원화 / 1969년 완도 금일에서 태어났으며 200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소설집 『길을 묻다』가 있고 광주일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