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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經典을 두루 읽는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1. 30. 13:56

무수한 經典을 두루 읽는다
 
한승원 / 소설가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반야경, 아함경, 열반경, 법구경, 그리고 성경을 읽었다. 나에게는 사서삼경도 경전(經典)이고, 노자·장자도 칸트도 니체도 도스토옙스키도 알베르 카뮈도 데이비드 로런스도 경전이다. ‘겨울이 오면 봄이 또한 멀지 않다’고 노래한 퍼시 셸리도 경전이고,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노래한 폴 발레리도 경전이다. 책으로 씌어 있는 이 경전들을 내내 머리맡에 놓고 깊이 열심히 읽었으므로 그것들은 나의 살과 뼈와 피가 되었으리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게 된 나에게는 책으로 쓰이지 않은 경전과 그것의 해설서들이 수없이 많다. 하늘도 바람도 구름도 달도 별도 찔레꽃도 촛불도 바다도 하나하나의 경전이고 그 해설서들이다. 나에게 생명의 존엄을 가르쳐주는 강아지풀 한 포기도 경전이다.

토굴 시멘트 바닥의 실같이 가늘게 벌어진 틈새에 뿌리내리고 한생을 살아온 강아지풀 한 포기, 그녀의 삶이 하도 경이로워 하늘하고 구름하고 달하고 별하고 바람하고 나비하고 개미하고 들풀하고 너나들이하고 살기 시작한 내가 앞에 쪼그려 앉자 그녀가 꼬리를 흔들었다, 오요요 하며 손짓하지도 않았는데….

그 강아지풀, 얼마나 대단한 경전인가. ‘찔레꽃’이란 시를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법화경을 펼쳐 들면/ 그대의 하얀 넋이 백치처럼 웃고 있다/ 5월 마지막 날 해 저물녘에 그대에게 그/ 경(經) 해설을 듣기 위하여/ 푸른 오솔길을 오른다,/ 그대는 바람으로 이야기하고/ 개미와 진딧물과 꿀벌과 머슴새의 날갯짓으로/ 당신의 먼 데 있는 세계를 정지 화면으로 보여준다,/ 잠깐 핏빛 노을로/ 산 위에서 멋없이 빨갛게 발기한 채로는/ 다만 파도만 볼 줄 아는 눈으로는/ 그대의 숨 막히게 흰 설법을 다 읽을 수 없었다,/ 절정감 같은 환희를 맛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나의 어찌할 수 없는 백치처럼 흰/ 절망이지만 그 절망은 첫사랑보다 더 달콤하다.’

나는 찔레꽃을 통해 법화경을 더 새롭게 자연 친화적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법화경보다 더 깊은 우주적 신화적인 철학을 그녀에게서 읽은 것이다.

가끔 촛불을 켜두고 생각하곤 한다. 나는 촛불을 즐기는 것이다. 촛불은 심지에 맞닿는 부분이 파르스름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노랗고 끝부분은 검붉다. 촛불은 스스로 치열하게 투쟁하는 영혼이다. 촛불은 심혼을 빨아먹고 사는 심오한 철학적이고 신화적인 혼령인 것이다. 가령 허공을 향해 엄지와 검지를 마주 대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면 그냥 두 개의 손가락의 만남에 지나지 않지만, 촛불을 향해 엄지와 검지 끝을 마주 대고 동그라미를 만들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안에 와서 담긴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이다. 촛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촛불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내 속으로 촛불이 들어온다. 촛불과 내가 하나가 되어 탄다. 촛불을 밝혀 두고 울기도 하고 흥얼흥얼 노래하기도 하고 싱긋 웃기도 한다. 촛불은 하나의 경전이면서 훌륭한 해설서이다. 그 속에는 화엄경과 반야경과 열반경이 들어 있다.

구름 또한 대단한 경전 해설서 가운데 하나이다. 얼마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쓴 적이 있다.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당신은 무위사 텅 빈 마당에서

선승처럼

구름 한 장 턱으로 가리키며

겹겹이 껴입은 옷에 갇혀 있는 나를

풀어주었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바람처럼

훨훨 날아가라고.’

(시 ‘무위사에서 만난 구름’ 전문)

구름은 그윽한 경전이고 그 해설서이므로 명쾌한 선문답의 소재일 수 있다. 누군가가 장삼 자락 너울거리며 걸어가는 스님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그 스님은 말없이 하늘에 떠가는 구름 한 장을 턱으로 가리켜주고 총총 떠나갔다고 한다. 이때의 구름이란 무엇일까.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개에게는 개의 길이 있고 구름에는 구름의 길이 있다. 사람은 묘한 짐승이어서 개의 길을 가기도 하고 구름의 길을 가기도 한다. 구름의 길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자유’다.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 하면, 나는 ‘식물성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떠올린다.

찾아온 한 손님에게 내가 토굴 안에서 도를 닦듯이 산다고 말했더니, “도를 닦는다는 것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내가 말했다. “벗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 싶어 못 견디겠으니 지금 만나 차 한잔 하자고, 술 한잔 하자고, 사랑을 나누자고 보채고 싶은 것을 이 악물어 참고 짙푸른 하늘 경전, 흘러가는 바람 경전, 구름 경전을 읽는 것입니다.”

여름철에는 내 토굴에 지네가 출몰하여 나를 물곤 한다. 지네도 나에게는 위대한 경전이고 하나의 해설서다.

어느 날 저녁, “우리 모두는 하나하나의 섬이다. 그 섬에 불을 밝히고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신에게도 악마에게도 의지하지 말고”라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가르침을 생각하며 토굴의 거실에 누워 있는데, 바람벽 틈으로 칫솔만 한 지네가 기어 들어오더니 사방을 휘둘러 살피고 중얼거렸다. “대관절 어떻게 생긴 벌레가 이렇게 큰 굴을 파놓고 사는 것이냐, 그놈을 잡으면 평생 주리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겠구나.”

지네는 내가 한 마리 벌레임을 일깨워준 경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