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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宗이 지킨 반가사유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0. 27. 16:58

 純宗이 지킨 반가사유상

입력 : 2015.10.26 03:00

허윤희 문화부 기자 사진
허윤희 문화부 기자
한반도 최초의 근대 박물관은 암울한 시기에 탄생했다. 1909년 11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대중에 개방한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이다. 순종은 근대화 명분을 내세운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박물관을 열었지만 일단 연 뒤에는 의지를 갖고 내실을 다졌다. 1908년부터 전국에서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해 초기 10년간 무려 1만122점을 모았다.

이때 수집한 가장 소중한 명품이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다. 순종이 1912년 일본인 고미술상에게 2600원(지금 돈으로 약 30억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 국보급 고려청자 한 점이 100원 하던 시절이었다. 제실박물관은 경술국치 이후 이왕가(李王家)박물관으로 격하됐지만 당시 고미술상이 40원에 산 것을 65배나 비싼 값을 치르고 기어이 유물을 획득했다. 그런 비상한 각오가 없었다면 반가사유상은 다른 유물들처럼 해외로 반출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또 한 점의 반가사유상이 이 무렵 등장했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일본인 수장가를 거쳐 1912년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에게 상납됐다. 데라우치는 귀국에 앞서 1916년 이를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했다. 소장품을 대거 가져가면서 반가상은 포기한 것이다. "이왕가박물관이 2600원이나 주고 반가상을 구입하는 바람에 당시 조선에선 반가사유상 신드롬이 일었다. 동일한 가치를 지닌 유물을 본국으로 가져가기엔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황윤 '박물관 보는 법')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대불교조각대전'에 두 반가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한 점씩 교체 전시되다가 11년 만에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 초대형 특별전에선 초창기 중국 불상과 비슷하던 한반도 불상이 점차 독자적인 도상을 확립하면서 반가사유상에서 그 예술성과 기교가 폭발하는 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계 각지에서 빌려온 최고급 인도·중국 불상들을 관람한 후 마지막 독방에서 두 반가사유상을 맞닥뜨렸을 땐 눈물이 나올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해방 후 여섯 번이나 유랑한 끝에 용산에 터를 잡은 지 10년이 됐다. '우리 것이 무조건 최고'라는 시야에서 벗어나 이렇게 수준 높은 아시아 전시를 꾸릴 정도로 성장했다는 데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선진국 박물관과 어깨를 견주려면 갈 길이 아직 멀다. 지난해 기준 한 해 39억원 수준인 유물 구입비부터 대폭 늘려야 한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한 해 유물 구입비가 350억원 정도다. 39억원은 해외에 떠도는 최상급 고려 불화나 A급 도자기 한 점을 구입하기에도 버거운 액수다.

박물관은 곧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이다. 미국·일본 등의 박물관들은 각종 기금을 비롯해 개인 소장가의 기증·기부도 활발하다. 이번 전시에 빌려온 미국 박물관 유물 상당수에 '존 스튜어트 케네디 기금' '로저스 기금' 등의 설명이 붙어 있는 게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 어려운 시절에 2600원을 들여 두 반가사유상을 지켜낸 순종의 절박함을 지금의 우리는 절반이라도 갖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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