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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의 표절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6. 21. 16:08

이응준 “신경숙에게 표절 따졌더니 되레 주변서 핀잔”

소설가 신경숙 ‘표절 의혹’ 일파만파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 제432호 | 20150621 입력
‘원본을 알고 있으면 재미있는 게 패러디, 원본을 알아 줬으면 하는 것이 오마주, 원본을 감추고 싶다면 표절’.

 소설가 신경숙(52)씨의 표절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한 네티즌의 글이 공감을 얻고 있다. 표절 의혹이 일고 있는 신씨의 다른 작품(그래픽 참조)도 인터넷과 SNS를 통해 퍼지면서 표절 논란은 대한민국 문화계를 달구고 있다.

현택수 “책임지는 모습 나와야”
문학작품 표절에 대한 정확한 기준은 없다. 사전적 기준은 인용이나 출처 표시 없이 남의 글을 한 줄 이상, 6개 단어 이상 쓰는 것이다. 신씨를 사기와 업무방해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현택수(57)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은 “단어가 똑같은 건 반박할 수 없는 물증”이라며 “어떤 작품의 어떤 부분이든 단 한 줄이라도 표절은 표절”이라고 강조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냈고 지난해 『표절은 없다:논문조작 가이드북』을 출간한 현 원장은 “학계나 문단이나 표절하는 관행도, 눈감아 주는 ‘침묵의 카르텔’도 똑같다. 다른 이슈가 생기면 흐지부지 시켜 묻히는 양상도 판박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이번 일이 문단과 학계에서 표절 근절의 계기가 돼야 한다”며 “제대로 사과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응준 “신경숙 비판 글 실을 곳 없다”
신씨의 표절 논란을 제기한 소설가 이응준(45)씨는 전화 인터뷰에 앞서 “개인 신경숙씨에 대해서는 아무 불만도, 관심도 없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16일 글은 ‘고발’이 아닌 ‘기록’이라고 규정했다. 이미 10년 전부터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 역시 알고 있던 내용이라고 했다. 심지어 한 번은 신씨에게 직접 왜 표절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주위에서 핀잔만 들었다고 고백했다.

 그 ‘기록’을 온라인매체에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왜 문예지를 택하지 않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철딱서니 없는 얘기다. 나도 그런 곳에 하고 싶었다. 문학의 일이니까 문학의 일로 끝내 보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신경숙을 비판하는 글을 실어 줄 문예지는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문학이 점점 더 왜소해지는 상황에서 그냥 이대로 갈 것인가, 이대로가 좋다는 것인가, 변화하길 원하는가, 무엇을 바꿀 것인가에 대해 오래 고민했고 더 늙기 전에 10년 전부터 고민했던 인생의 숙제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실을 매체가 없고 지금밖에 할 때가 없었다.”

 문인단체는 입장 표명을 자제하거나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소설가협회 백시종(71) 이사장은 “자기가 좋아하는 시적 표현이나 감성적 문구를 지문에 넣는 것은 작가들이 할 수 있는 문제”라며 “많으면 1000장이 넘는 소설에서 어느 문구 한 대여섯 줄을 문제 삼는 것은 트집 잡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모처럼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성공할 수 있는 작가인데 사소한 거 가지고 우리끼리 싸우면 오히려 일본 쪽에서 좋아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백시종 “좋아하는 시적 표현은 넣을 수도”
한국문인협회 문효치(72) 이사장도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언론 보도로 봐서 표절로 몰아가기엔 좀 지나치다”고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를 한 사람이 독점해서 쓰는 건 아니다. 단편이 원고지 100장 정도인데 문제되는 건 2구절이더라. 이것으로 판단하기엔 모호하다”는 것이다.

  한국작가회의 이시영(66) 이사장은 “대답하기 곤란하다”며 즉답을 피했지만 23일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화권력의 현재’를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마련하고 이에 대한 추가 논의를 펼쳐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한편 이씨는 지난 16일 허핑턴포스트에 신씨의 단편 ‘전설’이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1925~70)의 작품 『우국』을 표절했다는 글을 올렸다. 이에 신씨는 17일 출판사 창비에 “읽어 본 적이 없는 작가로 해당 작품은 알지 못한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는 e메일을 보냈고 창비도 이날 “해당 장면의 몇몇 문장에서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를 근거로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비난여론이 비등해지자 창비는 18일 “이 사태를 뼈아프게 돌아보면서 표절 문제를 제기한 분들의 충정이 헛되지 않도록,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자유롭고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언제나 공론에 귀 기울이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구약 ‘노아의 홍수’도 표절 …

 

엘리엇은 『황무지』서 무명 작가 글 도용

세계 역사 속에 나타난 표절

김환영 기자 kim.whanyung@joongang.co.kr | 제432호 | 20150621 입력
프랑스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7)는 인류의 지식 발전이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과학적 단계로 전개된다고 설명했다. 표절의 역사 또한 3단계로 이행한다고 볼 수 있다.

 1단계에서는 표절이 당연시되며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하는 시대였다. 표절은 일종의 ‘오마주(hommage)’였다. 1단계는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시작됐다. 최초의 표절 기록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대홍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5000년 전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에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구조적으로 같은 내용이 나온다(하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수메르판 홍수 이야기에서 신들이 홍수로 인류를 궤멸시키려고 한 것은 어떤 도덕·윤리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신들이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의 표절(plagiarism)은 ‘납치범’을 뜻하는 라틴어(plagiarius)에서 나왔다. 고대 로마의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40~102년께)는 자신의 시를 베끼는 라이벌을 ‘납치범’이라고 비난했다.

 중세까지, 특히 종교 문헌에서는 남의 글을 베끼는 일이 당연시됐다. 중세 시대를 넘어 감리교의 창시자인 성공회의 존 웨슬리(1703~1791) 신부도 다른 설교자·신학자의 글을 ‘표절’했다.

 르네상스(14~16세기)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글의 독창성이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에서 표절이 본격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활동한 시대다. 표절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셰익스피어이지만 그의 역사극은 래피얼 홀린셰드(1529~1580)의 『연대기』를 ‘재창조’했다.

 영국이 세계 최초의 저작권법을 통과시킨 것은 1709년이다. 1755년에는 표절(plagiary, plagiarism)이 사전에 등재된다. 2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19세기에는 표절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에 근접했다. 주석을 다는 방식도 거의 같다. 표절이 죄악시됐지만 표절의 만연은 계속된다. 표절을 통해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번 유명인이 다수 배출됐다.

 성공한 쿠데타가 혁명으로 인정받듯 20세기에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저자들의 표절은 ‘용서’됐다. 대표적인 예가 T S 엘리엇(1888~1965)이다. “미숙한 시인은 흉내 내지만, 성숙한 시인은 베낀다”는 말을 남긴 엘리엇의 『황무지』(1922)는 표절 작품이었다.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시’라고 평가받는 『황무지』는 무명 시인인 매디슨 코윈(1865~1914)의 ‘황무지’(1913)를 상당 부분 도용한 작품이었다. 작품명까지 같다. ‘황무지’가 『황무지』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이 나온 것은 1995년이다.

 미국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1929~68)이 보스턴대에서 받은 신학 박사 학위 논문 또한 표절의 산물이었다. 보스턴대는 킹의 박사 학위 논문이 표절이라고 판정했으나 학위를 무효화하지는 않았다. 킹이 미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서다. 그 유명한 연설 ‘내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또한 표절이었다.

 미국은 1891년까지 외국 작가·출판사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문학·예술적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베른 협약’(1886)에 서명한 것은 1988년이다. 국제정치의 패권마저도 표절을 용인하지 않는 3단계가 그때 개막된 것이다. 세계에서 대표적인 표절 불관용 국가는 미국이다. 세계화를 통해 미국의 표절 기준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됐다.


김환영 기자 kim.whan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