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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늑대의 인큐베이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3. 7. 11:12

외로운 늑대의 인큐베이터

[중앙일보] 입력 2015.03.07 00:02

 

 

이훈범논설위원

 

영국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은 98세까지 살았다. 논리학·수학·철학·문학·예술을 망라하는 20세기 대표적 지성으로 일컬어지지만 그것은 인생의 절반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나머지 절반은 반전·반핵 평화운동에 불을 살랐다.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게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의 일이다.

 그는 『인생은 뜨겁게』라는 자서전 제목처럼 뜨거운 인생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숱한 오해와 비판도 받았고 고생도 많이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병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가 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났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동한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2차대전 후에는 핵무기 감축을 위해 투쟁했으며 89세의 나이에 시민불복종 운동을 주도하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귀족으로 태어나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그가 그처럼 힘든 삶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말한다. “사랑과 지식은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 주었다. 그러나 늘 연민이 나를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그를 무관심의 안락함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분노하되 유머를 잃지 않게 해준 것이다. 유쾌하고 기꺼이 불편함을 즐길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는 1918년 수감됐을 때를 회상하며 이런 얘기도 들려준다. “교도관은 나를 각별히 대해줬다. 내게 종교가 뭐냐고 묻길래 나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라고 대답했다. 그는 철자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고 내가 알려주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요, 세상엔 많은 종교가 있죠. 하지만 난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신을 섬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의 말로 한 주를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뜬금없는 러셀 얘기가 길어진 것은 55세의 한국형 ‘외로운 늑대(자생적 테러리스트)’의 울부짖음이 안타까웠던 까닭이다. 집이자 사무실인 골방에서 키워온 김기종의 분노가 종북인지 반미인지, 아니면 극단적 민족주의인지는 관심 밖이다. 어차피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의 외침이 공허한 것은 러셀이 가졌던 연민을 그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게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종북이든 반미든 민족주의든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는 무의미할 뿐이다. 무엇 때문에 하는 종북이고, 무슨 이유로 반미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한 민족주의인가. 다 많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에 기초하지 못한 이념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말처럼 “악행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연적인 확고함과 결단력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기와 견해가 다르다고 남을 해코지하지 못한다. 하물며 백주도심에서 칼부림이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느냐 아니냐가 운동가와 테러리스트의 차이다. 그래서 더 걱정이다. 성찰 없이 풍요를 이룬,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현대사회가 외로운 늑대들(종북이건 아니건)의 인큐베이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의 지적대로 그것은 우발적·예외적이 아니라 일상적인 위험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미국대사 피습에서 드러났듯, 이태 전 미국 보스턴 마라톤 테러에서 증명됐듯, 열 사람이 하나의 발생을 막기 어려운 위험인 것이다.

 정치나 경제, 어느 한쪽에서만 노력한다고 해결될 위험이 아니다. 정말 사회 각 분야에서 머리를 싸매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터다. 자공과 공자의 대화가 고민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자공이 묻는다.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으면 되지 않나요?” 공자의 대답이다. “그것도 좋지만 가난해도 즐겁게 살고 부유해도 예를 아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