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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부서지도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 20. 18:44

‘몸이 부서지도록’

장영수

한국일보 2003. 1. 26

 벌써 봄인가. 세종로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봄 증세’가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며 지나간다. 누구나 계절이 변하면 몸과 마음에 어떤 증세가 나타날 것이다. 나에게 나타나는 봄 증세는 먼 학생 시절, 학년이 바뀌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겪었던 불안한 감정상태가 도지는 것이다.

출발을 앞둔 설레임과 두려움, 어제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되겠다는 어설픈 열망, 내 앞에 펼쳐진 시간들에 대한 막막함...새벽에 눈을 뜨면 이런 여러 가지 느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곤 했다. 그런 불안한 기분이 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곤 한다.

 

 “괜찮아. 너는 이제 학생이 아냐. 그리고 나이도 많아 설레 일 것도 두려울 것도 별로 없잖아” 라고 나는 나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벌써 봄 냄새가 나는 바람 속에서 나는 남 몰래 부대낀다. 새 교복을 맞추러 가는 설레임, 낯선 교실에 처음 들어가는 두려움에서 도망칠 수가 없다.

저 학생들도 모두 설레고 두려울까 라고 나는 교보문고에서 쏟아져 나오는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오늘따라 그들은 말없이 걷고 있다. 신입생들, 졸업생들, 직업을 구했거나 구해야 하는 사회 초년생들, 공부와 일에 찌든 젊은이들..그들 모두가 두려움과 설렘으로 부대낄 것이라고 생각하자 따뜻한 연대감과 함께 연민이 솟는다.

 내가 그 나이에 생각했던 생은 너무나 넓고 크고 깊었다. 그래서 나는 이른 새벽 자주 깨어났다. 끝이 안 보이는 망망대해와 같은 생을 나는 숨을 죽이고 바라 보았다. 겁이 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꿈속에서 그런 새벽을 자주 만난다.

저 젊은이들의 선배인 나는 무슨 말이든 그들에게 해 주고 싶다. “인생은 짦아. 그야말로 휙 지나가 버려. 어떤 사람은 그 짧은 시간을 훌륭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그저 그렇게 보통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나쁘게 살기도 해. 최소한 나쁘게는 살지 말고 보통으로는 살아야겠지만 보통으로 사는 것도 사실은 힘이 들어...”나는 최근 한 선배에게 들은 “몸이 부서지도록”이란 말을 생각해 본다.

패션 전문가를 키우는 학교인 ‘에스 모드 서울’의 박윤정 이사장은 ‘라 코스테’의 아트 디렉터 크리스토프 르메르씨가 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생들과 나눴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세계적인 명품을 만드는 그에게 한 학생이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 연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유능한 디자이너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고,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을 벌고 있다.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디자이너는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그 모임에는 나이 든 여성들이 몇 분 있었는데, “몸이 부서지도록”이란 말에 모두가 동감했다. 그렇다. 인생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지 않고 어떻게 보통으로나마 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일하지 않고 어떻게 성공을 기대하며 또 높은 연봉을 바라겠는가.

 

 

 한 세대 전 만 해도 “몸이 부서지도록 일 한다”는 말이 흔했는데, 요즘 젊은이들도 그런 말을 자주 듣는지 궁금하다. 그 시절에는 육체노동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머리를 써서 일하는 요즘 젊은이들도 몸이 부서지도록 일한다는 것이 어떤 경지인지 이해할 것이다.

봄의 설렘과 두려움 속에 있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선배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은 몸이 부서지도록 공부하고 일하자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첫째가는 미덕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성공에 지름길이나 월반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는 것이다.

1월에 벌써 나의 봄 병이 도지다니 올해 봄은 빨리 왔나 보다. 하긴 구정이 지나면 신춘이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봄을 맞는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새 출발의 각오를 다지는 모든 분들과 함께 “몸이 부서지도록”이라는 옛말을 다짐할 수 있어서 기쁘다.